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4화
상인, 용병, 도적
‘내가 맞게 가고 있긴 한 건가?’
마을을 떠난 알렉스는 날이 밝을 때까지 횃불 하나에 의지하여 말을 몰았다.
길처럼 보이는 곳을 따라 움직이긴 했지만, 포장도로도 아니고 이정표가 곳곳에 있는 것도 아니기에, 제대로 된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사실 제대로, 라는 표현도 맞는지 모르겠군. 영주에게 간다는 선택지가 정말 옳은 걸까?’
무작정 기존의 계획을 따르고 있긴 했지만, 솔직히 그게 정말 최선인지 의심스러웠다.
보잘것없는 가문이나마 귀족 출신이고 기사였던 프라이먼과 달리, 알렉스는 평민이고 딱히 눈에 띄는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수의 부산물을 진상하겠다고 해서, 영주씩이나 되는 이가 쉽게 만나주긴 할지도 의문이다.
‘생각을 잘해야 한다. 일단 어디서 정보라도 좀 얻었으면 싶은데.’
바뀐 환경에 적응하고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선 지식이 필요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형세.
사람들이 가진 사상.
어떤 것이 가치가 있고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하는가? 등등.
전이된 기억이 있다지만 기존의 알렉스는 지식이나 교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성인이긴 해도 고작 18살의 나이라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물론 이 세계의 평민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기에, 그를 탓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일단 내가 가진 능력이 나쁘지 않아. 아직 저렙이라 수준이 형편없다는 게 문제지만.’
게임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고 마음대로 플레이할 수 있었지만, 신성력이란 것은 이곳에선 아무나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게다가 현실이 된 이곳의 세상은 극명한 신분제가 존재하는 세계.
전사나 궁수, 상인이나 장인과 다르게 마법과 신성력 같은 비현실적인 힘을 가진 직업의 가치는, 앞엣것들과는 비교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다.
‘신성력에 대해 밝히고 교단 쪽에 몸담으면, 이따위 위험 없이 안락한 생활을 보낼 수 있을까?’
당장은 어떤 결정을 내리긴 어려웠다.
아는 게 있어야 뭐라도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알렉스는 일단 어디라도 가까운 마을에 들러,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한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정보를 수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프르륵.
힘겨운 기색이 담긴 투레질 소리에, 알렉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두운 길이라 속도를 늦췄다고는 해도 새벽 내내 말을 걷게 했으니, 슬슬 체력이 다해 지칠 만하다.
“고생했다. 조금 쉬도록 할…… 으음!”
적당한 자리를 찾아서 휴식을 취하려던 알렉스는, 저 앞쪽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삐를 잡아당겼다.
길옆에 피워놓은 모닥불과 그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막 야영을 끝내고 아침 식사를 해결하는 모습이다.
‘용병인가?’
머릿수가 열 명이 넘어 보이고 전원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함부로 다가가기가 망설여진다.
길가에서 만나는 이세계의 용병이란 존재는, 열에 일곱은 도적 떼와 별반 다를 점이 없다.
일거리가 있어 충돌 없이 넘어가면 용병이고, 주머니가 허전한 상태면 남의 재산을 털어먹는 자들인 것이다.
곧 저기서도 알렉스를 발견했는지, 몇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을 바라본다.
‘피해야겠지? 시비라도 붙으면 나 혼자선 당해낼 수 없을 거야.’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원한 관계가 없던 마을 주민들이, 몇 푼의 재산을 노리고 자신을 죽이려 들지 않았던가.
어설픈 습격자였던 자경단원들과 달리, 제대로 장비를 갖춘 용병들은 능숙한 살인마 집단이다.
싸움이 벌어지면 필패라고 봐도 좋다.
‘응?’
막 말머리를 돌리려던 알렉스는 무언가 다른 것들을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용병으로 짐작되는 무리 안쪽으로, 무장을 갖추지 않은 사람 두 명이 눈에 띄었다.
이어서 무장한 이들에게 신경 쓰느라 바로 인식하지 못했던, 커다란 수레와 짐말 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둘은 용병으로 보이진 않는데. 질 좋아 보이는 외투하며…… 아, 상인들인가?’
알렉스의 안색이 밝아졌다.
상인이 포함된 집단이라면 위험도가 꽤 낮아진다.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춘 행상인이라면, 용병을 호위로 고용해 데리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그리고 그런 이들이라면 갑자기 도적 떼로 변신해 남을 공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경험 많은 상인이라면 대화 상대로도 딱이야. 크게 위험할 것 같진 않으니 말을 붙여 봐도 될 것 같군.’
경계심을 완전히 지우진 않았지만, 알렉스는 저들에게 다가가도 괜찮을 거라 판단하고 앞으로 말을 몰았다.
“여행자인가 보군. 델트시로 가시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용병들 중 하나가 나서서 말을 걸어왔다.
델트시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지만, 알렉스는 이 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도시겠거니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른 시간부터 부지런하시군. 경계하지 않아도 되니 지나가시오.”
“아, 그…….”
“음? 뭐 다른 용무라도 있으신가?”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쪽 상인분과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만.”
“흐음. 뭐 그러시오. 도비슨 씨! 이 사람이 잠깐 보잡디다.”
용병의 부름에 상인이라 짐작했던 이 중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볼일이신가?”
알렉스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알고 싶은 정보는 많았지만, 아무런 친분도 없는 이에게 다짜고짜 이것저것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마수를 잡고 얻은 부산물이 있는데 혹시 그런 것도 취급하십니까?”
일단은 연결점을 만들기 위해 거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마침 팔만한 물건도 가지고 있으니, 말을 꺼내보기도 나쁘지 않다.
“호오, 뒤에 실린 그것 말인가? 뼈는 아니고…… 무슨 뿔 같기도 한데.”
“멧돼지 마수의 엄니입니다.”
“허! 뭔가 했더니 멧돼지라. 이빨이 저 정도면 크기가 정말 어마어마했겠군.”
알렉스의 말에 주변의 다른 용병들도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엄청 굵직한데?”
“저기에 들이박히면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지겠어.”
“이런 흉악한 걸 달고 있는 마수를 젊은 친구가 잡았다고?”
“그런 대단한 실력자치곤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재물이 화를 부른다는 사실을 이미 한 차례 몸으로 체감했던 알렉스는, 쏟아지는 관심이 살짝 당황하며 헛기침을 했다.
위험할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했지만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기에, 살짝 풀었던 긴장의 끈을 다시 꽉 조였다.
“험! 뭐 혼자는 아니고 동료와 잡은 후 제 몫을 분배받은 겁니다. 아무튼, 관심 가지는 중에 미안한데, 이 엄니는 일단 당장 팔려고 내놓은 물건은 아닙니다. 제가 말한 건 가죽이지요.”
“가죽? 한번 볼 수 있겠소?”
말에서 내린 알렉스는 가죽 꾸러미를 꺼내, 묶은 끈을 풀어내고 활짝 펼쳐 보였다.
두툼한 멧돼지 가죽을 본 상인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좀 만져봅시다.”
“그러시죠.”
“오! 아직 무두질이 되지 않은 생가죽인데도 단단하군. 튼튼하고 질긴 게 확실히 마수의 것으로 보이오. 대장이 보기엔 어떻소?”
상인의 말에, 처음 알렉스와 대화했던 용병이 가까이 다가와 가죽을 살폈다.
대장이라 불리는 걸 보아하니, 아마도 그가 용병들을 이끄는 대표인 모양이었다.
투박한 손가락으로 가죽을 만지작거린 용병대장이 입을 열었다.
“좋군요. 훌륭한 가죽으로 보입니다. 잘 가공해 갑옷을 만들면 어지간한 철제갑옷보다 낫겠소.”
“그 정도나?”
“적어도 제가 본 가죽들 중에선 가장 튼튼한 축에 속해 보이오.”
용병대장의 말에 상인은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보기에도 확실히 상품 가치는 충분하다.
문제는 가격일 뿐.
“어디 보자. 품질은 괜찮고 이 정도 면적이면 은화로…….”
계산을 마친 상인이 알렉스에게 가격을 제시했다.
가죽 한 묶음치고는 상당한 금액이다.
거의 한 달 생계비와 맞먹는 액수.
‘가죽 전체였다면 상당한 금액이었겠군. 근데 좋은 가격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네. 이런 물건을 사고판 기억이 전혀 없으니 원.’
전이된 기억을 뒤져봐도, 마수는커녕 평범한 짐승의 가죽조차 취급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이쪽 세상의 평민들은 대부분 다양한 경험을 쌓을 기회가 전혀 없는 삶을 살기에, 풋내기 전사인 알렉스의 기억을 토대로 해서는 적절한 가격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알렉스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상인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마음에 안 드시오? 미안하지만 나로선 그 이상의 값을 치르기가 어렵소. 물론 도시로 가져가면 더 높은 금액을 부르는 상인도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지금 제시한 금액도 그리 나쁘진 않을 거요.”
상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후려친다는 느낌은 들지 않기도 하고, 돈 몇 푼보다 상인과 괜찮은 관계를 맺는 게 더 중요하기도 했다.
“그 가격으로 합시다. 그런데 부탁이 있습니다만,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흐음. 동행이라. 요즘 도적놈들이 많이 늘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하니, 확실히 혼자 다니기엔 불안하겠구려.”
“예, 뭐…… 마냥 지켜달라는 소린 아니고, 위험한 상황이오면 당연히 저도 손을 거들겠습니다.”
“마수를 사냥할 정도의 전사라면 물론 믿음직하겠소만. 일단 내가 이 행렬의 주인이긴 해도, 안전을 책임지는 우리 용병대장의 의사를 묻지 않을 수 없소.”
상인의 말에, 알렉스는 곁에 있던 용병대장과 눈을 마주쳤다.
잠시 조용히 눈빛을 주고받던 용병대장이 의견을 내었다.
“사고 칠 것 같은 인상은 아니군요. 아군에 기병 하나쯤 있는 것도 든든하지. 어디 같이 다녀봅시다.”
말을 타고 무장을 제대로 갖춘 전사라는 건, 외견만으로도 적에게 압박감을 줄 수 있다.
다만 나이가 어려 보이고 전사 특유의 강렬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과연 실력이 장비값을 따라갈지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딱히 수당을 나눠 먹자는 것도 아니었기에, 용병대장은 알렉스의 합류를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상단과 함께하게 된 알렉스는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며 식사자리에 끼어들었다.
맛있다고 하긴 어렵고 건더기도 거의 없는 묽은 스튜였지만, 어제저녁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다 보니 게 눈 감추듯 허겁지겁 먹어치울 수 있었다.
‘배가 차니 졸리네. 끄응, 그래도 지금 잠들 순 없으니.’
피습을 당해 잠을 얼마 못 자고 새벽 내내 움직인 탓에, 피로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래도 당장은 상단을 따라나서야 하기에, 알렉스는 피곤함을 참으며 말을 몰아 수레를 끄는 짐말과 나란히 섰다.
“도비슨 씨라 하셨지요?”
수레 위에 올라 마부 역할을 하고 있던 도비슨이, 알렉스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그렇소만.”
“가는 길에 말동무나 되어 주시겠습니까?”
“나야 나쁠 것 없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시나?”
“그냥 상단의 활동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점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허헛! 상인이라도 되고 싶은 거요?”
“뭐 관심은 있습니다.”
알렉스의 말에, 도비슨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상행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닌, 큼지막한 비명소리였다.
“끄아악!”
갑작스레 도비슨의 어깨에서 솟아난 나뭇가지를 멍하니 바라보던 알렉스는, 그것이 화살이 날아와 틀어박힌 것이란 걸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또 뭔데 X발!’
“도적이다!”
“대형을 갖춰!”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주변을 둘러보자, 수풀을 헤치며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일단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무장한 강도들이었다.
‘……진짜 X랄 맞은 세상이구만.’
암습에서 목숨을 지켜낸 지 반나절 만에 위험한 싸움이 발생하는 현실에 어처구니없어하며, 알렉스는 메이스의 그립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