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2화
험악한 세계
전투가 끝난 후.
알렉스는 발을 움직여 쓰러져 있는 프라이먼에게 다가갔다.
살짝 벌어진 입술과 생기 없는 눈동자.
얼굴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숨소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지만, 맥박 역시 뛰지 않고 있었다.
“……죽은 건가.”
치유의 손길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부활 주문이 가능한 대사제가 있다면 또 모르겠다.
알렉스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본 건 처음이었다.
‘미안합니다. 도움을 주지 못해서.’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던 알렉스는 자신의 뺨을 때리고 일어났다.
짝!
‘쓰으! 정신 차리자.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마냥 넋 놓고 가만히 있어선 안 돼. 그랬다간 이 사람처럼 죽을 뿐이야.’
넘겨받은 기억 속의 이 세계는, 매우 위험하고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뭘 해야 하지?’
이런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강한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신분이 미천한 이가 힘을 갖출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길은, 개인의 무력을 단련하는 일이다.
원래의 알렉스 역시 그렇기에 기사의 스콰이어 제안을 받고, 부친의 가게에서 배우던 일을 집어던지고 따라나서지 않았는가.
기사라는 존재는 이 세상의 무력을 대표하는 직업 중 하나이자, 평민들이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기도 하니 말이다.
사실 프라이먼과의 관계는 기사가 후견인이 되어주는 종자라기보단 그냥 시종에 가까웠으나, 그래도 2년 넘게 따라다니며 싸우는 방법을 어찌어찌 배우긴 했다.
3레벨의 소드 마스터리와 1레벨의 메이스 마스터리가 그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실력으로는 어딘가에 정착할 수준이 못 되는데.’
잡일을 시키며 가끔씩 검술을 가르치던 프라이먼이 죽어버렸으니, 이제 알렉스는 종자도 아니고 그냥 18살의 뜨내기 전사에 불과했다.
물론 신성력을 다룰 수 있으니 평범한 전사는 아니지만, 그것만 믿고 안전을 자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수를 잡았으니 프라이먼의 처음 계획대로, 영주에게 알리면 몸을 의탁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휘하 기사의 종자로 배정시켜 줄지도 모르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뭔가 딱 이거다 싶은 계획이 떠오르진 않았다.
이곳이 자신이 아는 그 게임의 세계라 해도, 이런 부분에선 만렙을 찍었던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소한 보조 퀘스트조차 하나도 놓치지 않고 클리어한 그라 해도, 세계관이나 배경지식 따위를 진지하게 곱씹었던 적은 없었기에.
아우우울-
멀리서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에, 알렉스는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래에 대한 생각도 좋지만, 일단은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
피 냄새를 맡고 산짐승이라도 나타나면 위험하다.
‘아, 잠깐.’
막 몸을 돌리려던 알렉스는, 떼었던 발을 내려놓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윽고 고민을 마친 알렉스는 프라이먼의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잔뜩 찢겨서 쓸모없어진 서코트(Surcoat)를 치우고 갑옷을 벗겨낸다.
가난한 자유기사인 프라이먼은 갑옷의 최종 테크라 불리는 풀 플레이트 아머 같은 귀한 장비를 갖추진 못했다.
기껏해야 체인메일과 가죽을 덧댄 보호구를 걸쳤을 뿐.
그마저도 구멍이 크게 뚫리고 피에 젖은 상태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솜을 누빈 패딩 아머 하나만 걸친 알렉스에겐 이 정도도 감지덕지다.
체인메일을 걸치고 기존의 패딩 아머를 덮어 입었다.
부러진 롱소드 대신 튼튼한 메이스를 허리춤에 매달고 나니, 그럭저럭 전사에 어울리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온 길을 돌아가던 알렉스는, 문득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 상태창을 확인했다.
‘레벨이 올랐었지.’
[알렉스 Lv 15]
무려 다섯 단계나 올라갔다.
거대 멧돼지가 그만큼 대단한 녀석이기도 하고, 알렉스의 레벨이 워낙 낮았던 탓도 있으리라.
상태창을 살피던 알렉스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
‘스텟 포인트가 없어? 능력치들이 분명 아까보다 오르긴 했지만…… 내가 하던 게임은 스테이터스를 자동 분배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는데?’
레벨이 오르면 스킬 포인트처럼 스테이터스 포인트를 얻어, 원하는 능력치를 올릴 수 있어야 했다.
게임이 현실처럼 되었기 때문일까?
그가 알고 있던 것과는 분명히 다른 부분이었다.
의아해하던 알렉스는 이번에는 스킬창을 열어보았다.
[잔여 스킬 포인트 5]
올라간 레벨만큼 스킬 포인트가 생겨 있었다.
이것 역시 알던 것과 조금 다르다.
원래 스킬 포인트를 얻기 위해선, 메인 레벨과 별개로 직업 레벨이라는 것을 따로 올려야 했다.
‘그런데 직업 레벨이 따로 표시되지 않는 걸 보면, 메인 레벨과 통합되어 있다는 건가?’
좋은 소식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애매했다.
알고 있던 익숙한 시스템과 다른 것이니 나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건 따져봐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바뀐 건 바뀐 대로 적응하는 수밖에. 포인트를 어떻게 배분할지나 고민해야겠네.’
털레털레 산길을 걸으며 곰곰이 생각해본 알렉스는, 일단 신앙 스킬에 2개의 포인트를 배분했다.
[신앙 Lv 3]
신앙 스킬은 신성력의 양과 회복속도를 늘려주고, 신성력을 사용하는 모든 스킬의 위력에 영향을 끼친다.
언젠가는 무조건 마스터해야 하는 스킬로, 몇 개를 찍어도 문제 될 게 없다.
다만 당장은 모든 포인트를 신앙에 투자하기보단, 적절한 분배로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될 효율적인 스킬 트리를 구상해야 한다.
알렉스는 남은 포인트로 방패술과 관련된 스킬을 익혔다.
[실드 마스터리 Lv 1]
[방어 본능 Lv 1]
방패를 다루는 전반적인 행동에 보정을 주는 실드 마스터리.
자신에게 가해지는 공격을 일정 확률로 완전히 차단해주는 방어 본능.
둘 다 패시브 스킬로, 공격보단 방어에 치중한 탱커 계열 직업인 성기사의 필수 스킬이다.
‘당장은 방패가 없지만, 그건 마을에 돌아가면 해결되는 문제니.’
알렉스는 프라이먼이 산행을 위해 마을에 잠시 맡겨두고 온, 그의 늙은 전투마를 떠올렸다.
여행에 필요한 자잘한 짐이 말과 함께 보관되어 있고, 그 안에는 방패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멧돼지 하나 잡는 데에 거추장스럽기만 하다며 두고 왔던 물건이다.
애초에 구색을 위해 갖췄을 뿐, 프라이먼의 방패술은 형편없는 수준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방어 본능은 어떤 식으로 발동되는 거지? 게임 속에서야 일정 확률로 피격 판정을 무효화시키는 거였지만…….’
게임이 이렇게 현실이 된 상황에서까지, 공격이 몸에 닿았는데 머리 위에 숫자 0이 뜨고 넘어갈 것 같진 않다.
상황에 맞춰 조정이 되었다면 바뀐 스킬 설명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불친절하게도 따로 설명문이 출력되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걷고 있자니, 저 앞에 마을의 초입부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은 한 개의 포인트는 조금 더 고민하며 상황을 봐서 유동적으로 찍기로 정하고, 알렉스는 다리에 힘을 주어 속도를 더욱 높였다.
* * *
“정말로 그 괴물을 잡으셨단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프라이먼 경께서 놈에게 상처를 입히고, 제가 마무리를 했지요.”
“세상에. 두 분께서 자신만만하게 올라가시긴 했지만, 솔직히 영주님께 병사들을 요청해야 하지 않나 싶어 많이 걱정했습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촌장을 찾은 알렉스는, 그와 대화를 나누며 그간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애초에 의뢰를 받은 것도 아니고 마수에 대한 정보를 접한 프라이먼이, 공적을 쌓고자 욕심을 냈었던 일.
굳이 이쪽에 보고할 이유는 없지만, 마을 주민들의 협력이 필요한 알렉스는 촌장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전했다.
“놈을 해체하고 부산물을 수거할 인력이 필요합니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려면 지금 바로 움직여야겠군요. 으음, 그러면 기사님께서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가 보오?”
“……안타깝게도 프라이먼 경은 놈에게 심한 부상을 당해, 전투가 끝나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저런, 이리도 안타까운 일이 있나.”
애석해하는 표정을 짓는 촌장.
하지만 눈빛은 침착하게 알렉스의 위아래를 훑는 것이, 머릿속으로 무언가 계산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한데 아무리 내가 마을을 대표한다 해도, 사람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일을 시키기는 어려운 노릇이오.”
기사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소리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을의 위협을 제거해 주었는데 그따위 소리를 하느냐며 호통을 치면, 어쩔 줄 몰라 하며 땅에 머리를 처박았을 터.
그렇지만 홀로 남은 알렉스는 그만한 권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우리 같은 놈들이야 마수를 상대할 방법이 없다지만, 진짜 실력 있는 기사라면 오히려 그런 마수보다 더한 괴물이거늘. 빈약한 무장도 그렇고, 마수를 잡다 죽었다면 필시 용병이나 다를 바 없는 이름 없는 자였겠지.’
눈앞에 있는 죽은 기사의 종자 역시도 그리 대단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계산을 마친 촌장은 바로 움직여야 하겠다는 조금 전의 이야기와 달리,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며 간을 보기 시작했다.
“가죽과 뼈 같은 부산물을 손상 없이 분리하고, 상품 가치를 보존할 수 있도록 처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오. 그런 커다란 괴물에게서 나온 것들을 산에서부터 운반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
촌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은 알렉스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동에 대한 삯을 요구하는 것은 그에 관점에서도 당연해 보이는 일이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 혼자 부산물을 회수할 능력도 없다.
게임처럼 자동으로 루팅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영주님께 갖다 바칠 양쪽 엄니만 잘 챙겨주십시오. 나머지 부산물은 적당히 같이 나누도록 합시다. 저도 괜한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으니.”
“오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아무 문제가 없지요.”
촌장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 * *
알렉스는 안내를 위해 다시 한번 산을 올라야 했다.
부산물을 해체할 재주를 가진 몇몇 사람들과 마을 자경단의 젊은 청년들이 함께였다.
다행히 그사이에 늑대 같은 맹수가 꼬이진 않았는지, 사체의 수습에 문제가 될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사냥꾼이 가죽을 벗겨내자 식당 주인이 고기를 자르고 뼈를 발골했다.
마수의 고기는 함부로 먹어선 안 되기에 버려졌지만, 단단한 뼈는 쓰일 데가 많아 돈이 된다.
평범한 짐승보다 훨씬 두툼하고 질긴 가죽의 가치는 두말할 것도 없다.
“기사님의 시신은 어떻게 할 거요?”
“……적당한 자리에 잘 묻어주십시오. 값은 치르겠습니다.”
마수의 근처에서 죽어 있는 프라이먼의 처우를 묻는 말에, 알렉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마스터로 모셨던 기억이 섞여 있긴 하지만 현대의 기억이 주체가 되기 때문인지, 솔직히 그를 위해 뭔가를 더 해줘야 한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크흠. 뭐 그럽시다.”
마을로 돌아온 알렉스는 부산물의 분배를 어떻게 처리할지 물어오는 촌장에게, 날이 밝으면 논의하자는 말을 남기고 그가 내어준 방으로 들어갔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 피로한 상태였기에 조용히 쉬고 싶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촌장의 집이었지만, 잠자리라고 내어 받은 방의 상태는 싸구려 여인숙만도 못해 보였다.
‘앞으로 이런 낙후된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건가. 하…… 게임 속에서나 판타지 세계의 모험과 낭만이 있었지, 실제로 이런 삶을 살고 싶진 않은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워낙 피곤했기 때문일까?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룰 것 같았던 알렉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곯아떨어졌다.
밤이 점점 깊어져 갔다.
어느 순간, 알렉스는 눈을 떴다.
불에 덴 듯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깨웠다.
‘뭐야, X발!?’
눈을 뜨자 가장 먼저 팔뚝에 박힌 나이프가 보였다.
그다음으로 나이프의 자루를 쥐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도 시야에 들어왔다.
“끄으! 이런 개X!”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며, 알렉스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암습한 남자를 밀쳐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