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화
게임 혹은 현실
“크헉!”
후끈거리는 통증에 절로 비명이 흘러나왔다.
뭐지? 나 다친 건가?
흐릿한 시야에 피가 묻은 손이 보인다.
찢겨진 상의, 복부의 상처.
눈을 몇 차례 깜박이자 초점이 잡히며 정신이 들었다.
“뭐야…….”
아니, 정신이 들었다는 표현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
대체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코를 찌르는 풀 내음과 땅바닥에서 일어나는 흙먼지.
언제나처럼 방구석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꾸이이익!
랏, 쉬오레- 크만!
누워 있던 자신의 귀로 시끄러운 소음들이 들려온다.
통증을 참으며 바닥을 짚고 상체를 세우자, 좀 더 다른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거의 자동차만 한 크기의 거대한 멧돼지와 그 앞에서 몽둥이 하나를 들고 뛰어다니는 갑옷을 입은 남자.
괴물과 싸우는 인간의 모습이다.
저게 뭐지? 무슨 영화 촬영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머릿속에서 벼락이 쳤다.
“끄, 으으…….”
형용할 수 없는 감각과 함께 기억이 뒤죽박죽 섞이기 시작한다.
다 망해가는 쓰레기 온라인 게임을 플레이하며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자신과는 다른,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기억이 머리를 채운다.
대장장이 막심의 둘째 아들.
기사의 종자.
알렉스.
‘이곳’에서 불리는 자신의 이름이다.
뇌리를 스쳐 가는 무수한 기억의 편린들에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이 기억은 대체……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생생한 감각은, 여기가 꿈속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하게 해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자신은 더 이상 키보드와 마우스를 만지며 놀던 현대인이 아니었다.
기사를 꿈꾸는 스콰이어(Squire) 알렉스였다.
“이 X신 같은 놈아! 검을 이쪽으로 던지란 말이다!”
한국어가 아님에도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는 고개를 들었다.
괴물 멧돼지와 싸우고 있던 남자가 이쪽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기사 프라이먼.
자신이 섬기는 주인이다.
정확히는 본인이 아니고 이 기억 속의 인물과 엮인 신분이지만.
프라이먼의 손짓에 고개를 돌리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롱소드가 눈에 보였다.
‘프라이먼이 괴물 멧돼지와 싸우다가 검이 튕겨져 나가고, 보조무장인 메이스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상황…… 이었나.’
머릿속의 정보가 사태를 파악해 주었다.
‘나는 멧돼지의 돌진에 휘말려 검도 박살 났고, 엄니에 스쳐 부상을 입어 쓰러졌었지.’
마을 주민들에게 괴물이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녀석을 퇴치하기 위해 산에 올랐던 일이 떠오른다.
마기로 인해 변이된 짐승인 마수.
놈을 해치우고 이곳의 영주에게 바치겠다는 프라이먼의 결심에, 자신 역시 자연스럽게 뒤를 따라야 했다.
“검! 검을, 크억!”
프라이먼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전황이 매우 좋지 않다.
‘움직여야 한다.’
이대로 있다가 프라이먼이 당하고 나면 다음은 자신의 차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윽.”
떨어져 있는 롱소드를 줍기 위해 움직이려던 알렉스는, 신음을 흘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통증 때문에 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사실 깊숙하게 파고든 상처가 아니기에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평범한 일반인의 정신력으로는, 복부에 피가 흐르는 형편에서 함부로 몸을 움직이기란 쉽지 않은 일.
‘X발…… 지금 이대로 움직여도 괜찮은 건가?’
절로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지를 품었다.
그러자 익숙해 보이는 어떠한 그림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알렉스 Lv 10]
‘뭣?’
힘과 체력, 지능 따위의 수치가 나열된 목록이 담긴 반투명한 창이, 알렉스의 눈앞에 펼쳐졌다.
게임을 하며 숱하게 봤던 상태창이다.
잠시 멍하니 있던 알렉스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게임 시스템이라고? 무슨, 게임만 하다가 내가 결국 미친 건가? 망할…… 어쨌거나 이게 진짜라면 살 수 있을지도.’
레벨이 있고 스테이터스가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것도 존재하리라.
‘스킬.’
알렉스의 생각에 반응하여 또 다른 창이 나타났다.
[무구 손질 Lv 2]
[소드 마스터리 Lv 3]
[메이스 마스터리 Lv 1]
[잔여 스킬 포인트 3]
‘있구나.’
스킬창을 살펴본 알렉스는 남은 스킬 포인트라는 글자에 주목했다.
게임에서는 스킬 포인트를 소모하여, 기존의 스킬 레벨을 올리거나 새로운 스킬을 배울 수 있다.
포인트를 사용하겠다는 생각을 품자, 새로운 창이 활성화되며 긴 목록이 나타났다.
“하.”
실소가 흘러나온다.
이번에 나타난 것 역시 상당히 익숙한 모양새였다.
그가 하던 게임 속에는 몇십 개의 직업이 있고, 그에 따른 천 가지가 넘는 스킬들이 존재했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중에서 유일하게 완벽한 이해도를 가졌다고 자신하는 성기사의 스킬 트리.
그리고 성기사는 그가 만렙을 찍었던 캐릭터의 직업이다.
‘의문투성이지만…… 아무튼 스킬을 배울 수 있다면 살아날 기회가 생긴다.’
알렉스는 스킬 포인트를 소모해 주저 없이 하나의 스킬을 익혔다.
[신앙 Lv 1]
사제 클래스처럼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기사인 성기사.
신앙은 그 능력의 근간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스킬이다.
신앙 스킬을 배우자, 회색 글자로 표시되어 있던 몇몇 스킬들이 색이 또렷해진다.
습득 조건을 충족했다는 의미.
곧바로 남은 포인트를 소모해 다른 스킬을 배웠다.
[치유의 손길 Lv 1]
신성력을 활용한 스킬 중에서도 가장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능력.
힐러 계열의 존재 이유인 회복 스킬이다.
알렉스의 손에 미약한 신성력이 맺혔다.
‘미친. 진짜 되는구나.’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자, 피가 멎으며 부상이 점점 치료되는 것이 느껴졌다.
다만 속도는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렸다.
스킬 레벨과 관련 능력치가 낮은 탓.
애초에 성기사의 회복 스킬은, 사제와 비교하면 효율이 떨어지기도 한다.
알렉스는 상처를 치료하며 전투 상황으로 눈을 돌렸다.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뛰어다니는 프라이먼의 상태는, 이제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껴졌다.
몸놀림이 둔해진 것이 훤히 보인다.
기사라고 하지만 프라이먼은 나이만 많았지, 모시는 주군도 없고 실력도 변변찮은 작자였다.
어느 한미한 귀족가문의 삼남으로 태어나, 적당히 검술을 익히고 그럭저럭 말과 무장을 갖출 정도의 재산만 물려받은 자.
전형적인 별 볼 일 없는 귀족자제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번 일로 이곳 영지의 주인에게 의탁할 자리를 얻어내거나, 못해도 한동안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만한 금화를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마수라고 해도 조금 커다란 멧돼지일 뿐이라 여겼는데.’
마을 주민들에게 정보를 듣기는 했어도, 촌무지렁이들의 과장일 뿐이라 여긴 게 실수였다.
이건 커도 너무 컸다.
녀석은 하찮은 짐승에서 갓 변이된 마수가 아니라, 적어도 그 상태로 몇 년은 힘을 비축한 제대로 된 괴물이었다.
종자인 자신은 놈의 돌진에 바로 나가떨어졌고, 기사 프라이먼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꼴에 기사랍시고 제대로 된 일격을 성공시키긴 했는지, 거대 멧돼지의 눈 한쪽이 터져 핏물이 흐르는 모습도 눈에 띈다.
그렇지만 메이스를 이용한 공격으로는 그 이상 깊은 상처를 낼 수가 없다.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은 터프하다.
마수가 되었으니 더욱더 뛰어난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터.
둔기로 근육과 뼈를 파괴하기엔 거대 멧돼지의 몸이 너무 단단했고, 견습기사 수준에 머물러 있는 프라이먼의 실력으로 극복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괜히 검을 던지라고 계속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다.
‘좋아. 통증이 많이 줄었어. 이제 내가 검을 넘겨주기만 하면-’
콰직.
“커헉.”
거대 멧돼지의 엄니가 프라이먼의 갑옷을 파고들었다.
비명을 내지른 프라이먼의 몸이 축 늘어진다.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었다고 판단한 알렉스가, 막 몸을 날려 검을 주워든 타이밍에 일어난 일이었다.
머리를 흔들어 엄니로 꿴 프라이먼을 내동댕이친 거대 멧돼지가, 이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썅.”
검을 들고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 알렉스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프라이먼이 당했으니 회생의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레벨 10의 자신이 저런 괴물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그가 기억하기로,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 NPC의 레벨이 5나 6쯤 되었다.
10레벨이면 아직 전사라 부르기도 민망한 훈련병이나, 타고난 체격과 용력이 뛰어난 일반인과 비등한 수준.
만렙 성기사였던 자신의 캐릭터를 들고 온다면 모를까, 절대로 무리라고 판단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고 죽어줘야 하나?
‘X랄 났네, 진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지금의 상황이 게임이라면 쉽게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느껴지는 감각들은 현실이 아니라고 하기에 너무 사실적이다.
죽음 이후에 다시 재시작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닐 것이라 여겨진다.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
스킬 두 개를 배우고 남은 포인트 하나를 사용했다.
‘검술 능력을 올려야 하나? 아니, 그거론 안 돼.’
알렉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스킬에 대해 생각했다.
소드 마스터리.
검을 다루는 행위에 보정을 주는 스킬이다.
레벨 3은 단계로 따지자면, 어느 정도 기본을 익힌 초급자의 실력이다.
4레벨로 올린다면 간신히 중급자 수준에 발을 들이밀겠지만, 그렇다 해도 저런 괴물을 상대하기엔 부족했다.
짧게 고민한 알렉스는 포인트를 소모해 새로운 스킬을 익혔다.
[홀리 웨폰 Lv 1]
무기에 신성력을 불어넣어 강화하는 스킬이었다.
무기 자체 데미지에 가중치를 주며, 사악하고 부정한 존재라면 추가 피해를 입히는 능력.
상대가 언데드나 악마 같은 신성력과 상극인 존재는 아니기에, 극적인 데미지 증가가 있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마기로 변이된 마수라 하니, 어느 정도의 추가 피해는 들어갈 거라 여겨졌다.
‘단번에 끝내야 해.’
부상을 빨리 치료하느라 신성력을 마구 밀어 넣어 남은 힘이 얼마 되지 않기에, 홀리 웨폰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잠깐에 불과하다.
그래도 어차피 전투를 길게 끌고 갈 수도 없으니 상관없다.
콧김을 푸훅 하고 내쉰 거대 멧돼지가 알렉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알렉스 역시 놈을 마주 보며 달렸다.
“흐아악!”
거대 멧돼지와 충돌하기 직전, 비명 같은 기합 소리와 함께 알렉스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미약한 빛이 그가 쥔 검에 맴돌았다.
이윽고 아슬아슬하게 거대 멧돼지의 엄니에 몸을 스친 알렉스가, 있는 힘껏 검을 내질렀다.
목표는 부상당한 놈의 눈.
프라이먼이 쓰러지기 전에 뭉개놓은 그 위치였다.
푸욱.
뀌에엑!
롱소드의 날이 눈을 파고들며 거대 멧돼지의 머리 안쪽을 헤집었다.
운이 따라준 성공적인 일격이었다.
쨍!
“으윽!”
거대 멧돼지가 발광하며 머리를 흔들자, 검이 부러지며 알렉스의 몸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손잡이만 남은 검을 내려놓은 알렉스는, 바닥을 기며 다급히 녀석과 거리를 벌렸다.
‘망할! 안 되는 건가?’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으나 마수는 여전히 멀쩡해 보였다.
암담한 표정으로 놈을 지켜보며 죽음을 기다리던 알렉스는, 잠시 뒤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제자리에서 난동을 부리던 거대 멧돼지는 알렉스를 향해 다가오지 않았다.
점차 움직임이 잦아들며 비틀거리던 녀석은, 이내 쿵 하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넘어갔다.
다행스럽게도 머리를 파고든 검이 충분한 치명상을 입힌 것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
“하, 하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인식하며, 알렉스는 바닥에 주저앉아 헛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