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65화 (165/166)

제 12장 -영원한 문제- (13)

성안으로 들어간 킬츠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무참히 잘린 병사들의 시체

였다. 물론 본 것은 아니었지만, 보지 않아도 그것들이 누구의 작품인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그 여자의 짓인 것 같다. 급했나 본데."

"나도 마찬가지야!"

"누가 뭐래...... 쳇....."

킬츠는 잠시 멈춰선 쥬크에게 소리쳤고, 쥬크는 투덜거리며 다시 전속

력으로 성문에서부터 연결되어있는 대로를 따라 도시 안쪽으로  달려갔

다. 그리고 금새 그들은 시청건물의 앞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긴가!"

킬츠는 재빨리 쥬크의 등에서 뛰어내려서는 시청 문을 열고 안으로 달

려들어갔다.

"이건......."

문을 열자마자 1층 홀 안을 가득 메운 피의 내음이 킬츠의 후각을 자

극했다. 그곳엔 여러 명의 병사들이 시체가 되어 이미 식어버리고 굳어

버린 핏물 사이를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 그들 시체사이에 뉴린

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뉴린젤... 뉴린젤은?"

킬츠는 순간적으로 소울아이를 극대한 으로 발동하며 이 집안에  있는

생명들의 기운을 감지했다. 여러 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중에

는 평소 느낄 수 있었던 뉴린젤의 기운도 섞여 있었다. 끔찍한 살기, 그

리고 강렬한 슬픔을 퍼뜨리며.

"3층의 끝인가......"

위치를 확인한 킬츠는 몸을 계단으로 이끌며 초조한 마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는 도중  웬 쓰러진 아이가 발에  채였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쓰고 있을 틈이 없었다. 점점  극에 달하고 있는 뉴린젤의

감정이 마치 폭발할 것처럼 킬츠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저쪽 끝 방........."

3층에 올라온 킬츠는 복도 끝에 있는 커다란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리

고 그곳 안에서 뉴린젤과 또 다른 한사람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리고 그들에게 느껴지는 공통적인 감정이 킬츠의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

다.

"슬픔..... 아...."

그때, 갑자기 불길이 꺼지듯 뉴린젤의 감정이 사라져 버렸다. 다른  한

명의 감정은 느껴지는데, 뉴린젤의 감정만 일순간에 사라져버리며 미약

한 생명의 기운만이 느껴졌다.

"뉴린젤!"

킬츠는 비명을 지르며 그 방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방

물을 확 젖히며 방안으로 박차 들어갔다.

"뉴린젤!"

킬츠의 눈에 처음 들어온 모습은 검을 들고 서있는 한 명의 중년 남자

와 그 옆에 쓰러져 있는 긴 흑발의 여자였다. 그녀는 전신으로 피를 흘

리며 미동도 하지 않고 쓰러져 있었다.

"뉴린젤!"

킬츠는 아직 옆에 있는 중년의 남자가 검을 들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

은 체 쓰러진 뉴린젤을 향해 달려갔다.

"후우....."

중년의 남자, 파리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쓰러진  뉴린젤을 향해

달려오는 킬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들고있던 검을 한쪽 벽에 기

대어 놓으며 천천히 찬장을 향해 걸어갔다.

"너무 걱정 말게 젊은이. 그 아이는 죽지 않았으니."

킬츠는 뉴린젤이 치명상을 입지 않았으며, 단지 온 몸에 잔 상처만 여

러 개가 나 있다는 사실을 깨 닳았다.

"단지.... 기절해 있을 뿐이라네."

파리퀸은 찬장을 향해 걸어가며 낮은 어조로  흘려 버리듯 말했다. 그

가 지나가는 곳은 붉은 핏자국이 새로 생기고 있었다.

"당신은........."

뉴린젤이 목숨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자 킬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찬장 문을 열고있는 파리퀸을 바라보았다. 그의 상

의는 이미 자신의 가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붉은 피로 가득 물들어  있

었으며 더 이상 배어들 곳을 찾지 못 한 나머지 피들은 천천히 바닥을

향해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검의 면 부분으로 쳤으니 정신만 잃은 게야.  후........."

파리퀸은 찬장의 깊은 구석에 놓여있던 붉은 와인병과 투명한 와인 잔

을 꺼내 들었다. 와인 잔에는 조금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파리퀸은 별

로 개의치 않은 듯, 와인 병을 열고 잔에 붉은 액체를 쏟아 부었다.

"나이트 파리퀸?"

"많이 흘렸으니..... 다시 마셔줘야겠지. 오랜만이야.  이렇게 맛있는 와

인을 먹어 보는 것은. 자네도 한잔하겠는가?"

파리퀸은 고개를 끄덕이며 킬츠에게로 다가오며 훌쩍 마셔버린 빈  와

인 잔을 들어보았다. 하지만 킬츠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파리퀸의 모

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드라킬스의 3대 사령관중  한 명으로 불리는 뛰

어난 사령관이자, 자치도시연합의  병사들을 수없이 죽게  만든 철벽의

기갑단을 이끄는 드래곤 나이트였지만, 지금 그의  모습에선 그런 지휘

에 알 맞는 기백이나 위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틀어져 버린 것일까..... 나의 꿈들은. 난....... 이런 식의 만

남과 이별을 원하지 않았는데."

파리퀸은 힘없는 눈동자로 가만히 와인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투명해진 와인 잔을 지나 바닥에 쓰러져 있는 뉴린젤을 향하고

있었다.

"나의 행동에 대한 죄 값인가...... 저 아이를  슬프게 한..... 그 것에 대

한 대가인가...."

킬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파리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몸

에서 서서히 생명이 사라지는 모습이, 킬츠의 가슴에 깊은 파문을 남기

고 있었다.

"오래 살았지....... 한 50년...... 영원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너무 긴 시간

이었어. 난,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단지.... 나의 행복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이런 마지막을 맞게 되는 건가......"

".................."

파리퀸은 고개를 들어 킬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킬츠의 검은 눈동자 안에 있는 복잡한 감정들을 가만히 응시했

다.

"자네는....... 눈 안에 또  하나의 눈을 가지고 있군.....  그 눈이라면... 저

아이가 나와 같은 길을 걷게 않게 이끌어 줄 수 있을꺼야......."

파리퀸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도... 저 아이도... 가슴 안에 있는 말들을 꺼내는 데  익숙하지 못했

을....... 뿐이라네."

파리퀸의 손에서 와인병과 와인  잔이 떨어져 버렸다. 와인  병은 침대

위로 떨어져서 작은 흔들림을 남기었고, 와인 잔은 바닥에 떨어져서 날

카로운 소리를 내며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단지......  그것뿐이라네."

킬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뉴린젤을 일으켜 들쳐업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미세한 박동. 킬츠는 그것이 뉴린젤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나이트 파리퀸. 저는 제 마음 안에 있는 말을 꺼내는데 익숙하니까요."

-12장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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