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영원한 문제- (11)
"역시 드라킬스의 3대 사령관인 나이트 파리퀸........"
자유기사단 단장, 세텔은 혀를 차며 질서 정연하게, 하지만 강렬하게
아군을 쇄도해 들어오는 철벽의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물론 지금의 사
령관은 파리퀸이 아니었지만, 이런 병사들을 훈련시켜 놓은 것은 파리
퀸이 분명했기 때문에 착각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세텔의 표정엔
아직도 상당한 여유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갈 수는 없지.'
세텔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아군을 추스르며 가까스로 전열을 유지
해 나갔다. 아직 아군은 1만에 가까운 숫자가 남아있었고 적군과의 숫
자적인 차이도 그다지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 전투의 기세와
흐름이 드라킬스군의 쪽으로 넘어가 있을 뿐.
하지만 만약 버티지 못하고 현 상태가 무너지는 날에는 자치도시연합
군은 그대로 끝장이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전멸을 당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지금쯤 올 때가 됐는데......'
파리퀸은 초조하게 드라킬스군을 바라보았다.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지만, 거센 드라킬스의 공격에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전
에 적의 후방에 새로운 부대가 나타나야만 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세텔은 벌써 자신에게까지 달려든 드라킬스의 보병 하나가 펼치는 공
격을 가볍게 튕겨내며 그대로 들고 있던 창을 사용해서 그의 가슴에 커
다란 구멍을 뚫어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꾀어져 버린 드라킬스의 병사
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전신을 꿈틀거리다가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
다.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는 이제 점점 차갑게 식어갈 것이다.
"이대로 적을 죄여가라! 곧 적은 무너질 것이다!"
나이트 임멜은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르며 흔들리는 자치도시연합군을
바라보았다. 아군의 입은 피해도 거의 전군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였기
때문에 쉬운 전투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기병에, 더 많은 숫
자의 적을 상대로 이 정도의 피해를 입고 승기를 잡았다는 것은 상당히
뛰어난 전과였다 아직 자치도시연합군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시간문제였고, 임멜에게 남아 있는 것은 남은 병사들과 부상병
들을 잘 추슬러 제스타니아성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이트 파리퀸에게 어서 이 승리의 소식을......'
"사령관 님! 후방에서 적의 기병이!"
그때 연락병의 황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임멜이 뒤를 돌
아보자, 그들의 후방에서 한 무리의 기병들이 엄청난 기세로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드라킬스의 기병인 쿠스 나이트의 갑옷은 옅은 회색. 하지만 후방에서
쇄도해 오는 기병들은 애초에 갑옷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대륙의 모든
기병 중에 갑옷을 입고 있지 않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혼의 용병!"
임멜은 경악하는 표정으로 비명과도 흡사한 소리를 질렀다. 바로 대륙
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유일한 전원 기병의 용병단. 그 역사
는 성의전쟁이 끝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었으며 결코 멸망하지
않고 언제나 막강한 전투력을 보이며 상대에게 심각한 피해를 안겨 주
었었다.
"설마...... 그렇다면 역시 양동작전이란 말인가?"
임멜은 정신이 아찔 해져오는 것을 느끼며 자유기사단과 전투를 벌이
던 병력을 후방으로 돌려서 혼의 용병들과 맞서싸우도록 하였다. 하지
만 이미 사실을 알아챈 자유기사단은 반전하여 공격에 박차를 가했고,
아슬아슬하게 혼의 용병들과 맞설 수 있었던 후방으로 돌린 드라킬스의
보병들은, 체력과 기세로 가득한 적의 말발굽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삽
시간에 드라킬스의 진형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자치도시연합군은 서서히
앞뒤에서 드라킬스군을 유린하며 마구 도륙하기 시작했다. 상황의 급
반전이었다.
"적군은 지쳤다! 단숨에 해치워 버리도록! 그리고 단 한사람도 살려서
보내면 안 된다!"
스와인은 뛰어난 기마술과 창술을 펼쳐 보이며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드라킬스의 병사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
약 이 상황이 클라스라인 법국이나 세디아 황국으로 들어가게 되면 문
제가 상당히 심각하게 돌아갈 것이 분명했으므로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
더라도 드라킬스군을 반드시 전멸시켜야만 했다.
'이대로...... 패배하는 것인가?'
임멜은 어떻게든 피해를 막아보려 애를 썼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적군의 공격은 압도적이었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철벽의 기갑단은 더 이상 능동적으로 적을 상대할 만한 기운
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령관이 먼저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멜은 직접 검을 휘두르며 혼의 용병들을 상대하기 시작
했다.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틸 수 있도록.
'항복...... 이란 있을 수 없다.'
임멜은 부들거리며 혼의 용병과 검을 교차하였다. 그리고는 재빨리 말
과 말을 부딪쳐서 적의 균형을 잃게 만든 다음, 검으로 그의 목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는 마지막 힘을 다해 발악하듯 소리쳤다.
"드라킬스군에 항복이란 없다!"
이미 도망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자치도시연합군은 이미 완벽하
게 드라킬스군을 포위하여, 단 단명도 살려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
고 있었다. 그렇다면 드라킬스군으로써도 그에 맞는 대접을 해줘야만
했다. 끝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며.
"항복하면 서로 더 이상의 피해를 남기지 않고, 좋을 텐데....... 하지만
뭐, 그게 더 속 편할 지도 모르겠군."
스와인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면서 분전하고 있는 적의 사령관을 향해
뛰어들어갔다. 물론 지금 적의 사령관을 쓰러뜨린다 하더라도 적군이
항복을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더욱 빨리 전투를 종결시킬 수
는 있었다. 그리고 스와인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채앵!"
스와인은 아무 말 없이 임멜을 향해 창을 찔러 들어갔다. 그러자 임멜
은 검을 사용해서 가볍게 그 창의 공격을 튕겨 내었고 드디어 서로는
서로의 눈을 마주볼 수 있었다.
"호오, 만만치 않은데?"
"넌 누구냐! 이름을 대라!"
임멜은 적의 솜씨가 여간하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속으로 최후
일지도 모른다는 다짐을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상대의 이름 정도는 알
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적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음, 이럴 땐 원래 먼저 자신의 이름을 대야 하는 거 아닌가? 뭐 상관
은 없지만, 난 스와인. 혼의 용병단의 용병장이다."
스와인은 창의 옆 날을 이용하여 임멜의 옆구리를 공격했고 임멜은 한
쪽 팔에 들고있던 방패로 그 공격을 막아 낸 뒤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공격해 들어갔다.
"난 나이트 임멜! 쿠스나이트이자 철벽의 기갑단 사령관인 나이트 파
리퀸의 부관이다!"
"응? 부관이 왜 사령관을 하고 있는 거지?"
스와인은 궁금증을 느끼며 중얼거렸으나 임멜에게 더 이상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임멜은 상대의 이름만 알면 됐다는 듯,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스와인도 그런 임멜의 기분을 눈치 채며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전념하고 싶다 이거지.'
스와인은 자신을 공격해 오는 임멜의 검을 창의 자루부분으로 막아내
었다. 스와인의 창은 창 날 뿐만 아니라 창의 자루까지 철로 만들어져
있어서 무게는 상당히 무거웠지만, 그만큼 파괴력이나 내구력이 뛰어났
다. 게다가 덕분에 이렇게 자루 부분으로도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아압!"
스와인의 창이 적의 검을 튕겨 내고는 가볍게 반원을 그리며 적의 목
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임멜은 그 공격을 몸을 돌려 피해냈고
큰 공격이 빗나간 스와인은 몸이 그대로 아래쪽을 향해 쏠리며 균형을
잃고 말았다.
'기회다!'
그리고 임멜은 그 기회를 놓이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스와인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임멜은 스와인의 가장 큰 특기가 바로 상대를 속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못했다. 만약 지금 스와인이 숙인 고개 아
래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만 알았더라고 그런 공격을 감행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스와인은 그대로 땅에 박혀버린 빗나간 자신의 창을 발판 삼아 재빨리
자신의 몸을 말에서 던져 버렸다. 이때 임멜의 공격은 허공을 가르게
되었고 창에 거꾸로 매달리게 된 스와인은 그대로 방향을 돌려 가볍게
회전한 뒤 임멜이 타고있는 말의 뒷자리에 자신의 몸을 태워버렸다.
"아앗!"
"체크메이트."
스와인은 득의 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려는 임멜의 목에 가
볍게 일격을 가했다. 임멜은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스와인은 그의 말에
서 내려, 자시 자신의 말로 올라탔다.
"하지만...... 이 젊은 부관...... 아니, 사령관 대리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녀석을 쓰러뜨렸다 해서 드라킬스군의 상황이 그다지 달라 질 것 같지
는 않군....."
스와인이 바라보는 전장은 이미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이었다. 남은 드
라킬스군은 이미 지휘계통이 완전히 무너져서 무력한 저항을 일삼다가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완벽한 소탕전뿐이었
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하지만 항복하는 사람까지 죽이지는 마라!"
스와인은 그렇게 소리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