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영원한 문제- (8)
무엇을 위하여 난 이곳에 서있지,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
가슴속의 답답함.
견딜 수 없는 답답함.
내 자아를 이끌어 가는 유일한 버팀목.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지금 난 이 검을 들고 있는가.
"이봐, 왯지. 지금쯤 북부 자치도시연합군과, 우리 군대간의 전투가 벌
어졌겠지?"
제스타니아의 부서진 성문을 지키고 있던 수비병 한 명이 옆에 있던
동료에게 말을 걸며 긴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농성은 무리라고 판
단한 드라킬스군은 몇 시간 전에 제스타니아성을 벗어났다. 그렇기 때
문에 지금 제스타니아성에 있는 드라킬스의 수비병 백 여명을 제외하고
는 텅 빈 상태였다. 애초에 제스타니아에 사는 시민들은 무기가 될만한
모든 것들을 빼앗긴 채, 집안에서 죽은 듯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때
때로 근처 농지로 농사를 지러 나간 사람들이 파울드나 그 밖의 자치도
시연합의 영토로 도망을 치곤 했으나 어차피 얼마 있으면 드라킬스의
주민들이 이 곳으로 이주해서 살게 될 테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파리퀸은 집단으로 모여 군사적인 활동을 제외한 그 모든 평민들의 생
활에 간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도주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 제스타니아성에 남아있는 북부자치도시연합의 시민들은 일
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겠지. 자치도시연합군은 전원 자유기사로 구성되어 있다니까.......
빨리 전투가 벌어졌을 꺼야."
"하지만...... 사령관 님이 부재여서 걱정인데."
"그러게 말이야. 물론 나이트임멜 님이 대신 맡아서 전투를 벌이겠지
만.... 이 철벽의 기갑단은 사실 파리퀸 님이 지휘하셔야 제 실력을 발휘
하게 되어있잖아. 그렇지........"
왯지라는 이름의 젊은 병사는 한숨을 내쉬며 동료를 바라보았다. 그러
나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장신의 여자 하나가 긴 검은머리를 휘날리며 다른 병사들을 전부 베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너... 넌 뭐......."
왯지는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곧 그 결심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미 그 여자의 엄청나게 긴 장검이 자신의 목에 들이밀어져 있었다. 아
직 식지도 않은 동료들의 뜨거운 피를 자신의 옷 위로 천천히 떨어뜨리
면서.
"방금... 파리퀸이 어쨌다고?"
왯지의 동료들을 전부 살해한 장신의 여자, 뉴린젤은 왯지의 목에 칼
을 바짝 갔다 댄 체 섬짓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얼어붙은
눈동자에서 나오는 파리한 안광과, 아무런 인정도 담겨있지 않을 것 같
은 삭막한 표정은, 왯지를 항거할 수 없는 극심한 공포로 몰아넣기에
지나칠 정도로 충분한 것이었다.
"파, 파리퀸 님은......."
"그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
"그분은.... 지, 지금 아마 시청 건물의 자신의 방에.........."
왯지는 창백해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 파리퀸의
상태까지 덧붙여 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이미 자신의 목엔 그 살벌한
여자의 차갑고 흰 손이 감겨 있었다.
"이건 답례다."
뉴린젤은 한쪽 손으로 병사의 목을 쥐어 그의 몸을 들어올린 뒤, 뒤에
있는 성벽을 향해 그대로 집어던졌다. 병사는 순간 목뼈가 부러질 듯한
충격과 질식할 것만 같은 고통을동시에 느껴야만 했으나, 그 고통은
아주 잠시 뿐이었다. 하지만 뉴린젤의 손에서 해방된 그는 곧바로 성벽
에 부딪쳐 버리며 그대로 의식을 잃어 버렸다.
"시청건물........."
뉴린젤은 중얼거리며 텅 빈 제스타니아성의 동쪽 성문 안으로 달려들
어갔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이 소란을 들은 몇 명의 병사들이 창과 검
을 세워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 방해하려 하는가."
그러나 뉴린젤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병사들을 향해 파고
들어 갔다. 그리고는 선두에 있던 검을 든 세 명의 병사의 허리를 동시
에 베어 버리며 스쳐지나갔다. 순간적으로 내장이 베이는 섬짓한 소리
가 세 번 연달아 들려왔고 그 병사들은 그대로 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
서 허물어져 갔다.
"고, 공격하자! 적이다!"
당황한 병사들은 다짜고짜 동료들을 베어버린 이 살벌한 여자를 바라
보며 협공을 해 들어갔다. 그들의 숫자는 여덟 명, 숫자는 뉴린젤에게
크게 앞서있었지만, 기세와 전의, 그리고 실력에 있어서 그들은 뉴린젤
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뉴린젤은 아무소리 없이 조용히 자세를 낮추며 달려드는 병사 하나의
다리를 베어버렸다. 양 무릎이 잘린 그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아버렸고 뉴린젤은 주저앉은 병사의 복부를 오른발로 강하게 차
올리며 그를 뒤로 날려버렸다. 어찌나 세게 찼는지, 뒤로 날아간 병사는
그대로 뒤에 있던 자신의 동료들과 충돌해 버렸고, 그 순간 뉴린젤은
갑자기 날아온 병사 하나에 몸이 부딪쳐 동작이 멈춰져 버린 바로 그
병사의 정면에 도착해 있었다.
"으, 으악!"
당황한 병사는 주춤하며 검을 휘둘렀으나 이미 그때는 그의 목에 뉴린
젤의 검이 반쯤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순식간에 목이 베어지며 머
리가 옆으로 날아가 버렸고 잘린 목의 혈관들에서 분수처럼 피가 뿜어
져 나오며 사방으로 뿌려졌다.
자신에게 날아온 목을 엉겁결에 받아든 병사 하나가 기겁을 하며 그
목을 던져버렸으나 그것은 너무 감정적인 안일한 행동이었다. 그런 빈
틈을 놓일 뉴린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뉴린젤은 아무 말 없이 그 병사의 복부에 검을 찔러 넣은 뒤 힘을 주
어 옆으로 빼어버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새로운 병사들의 목숨을 노
리기 위해 다시 그들을 향해 파고들었다.
뉴린젤이 달려들자 나머지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마구 검과 창을 휘
둘러 대었다. 아무리 잘 훈련되고 경험이 많은 파리퀸의 병사들이었지
만, 최근 들어 신병의 유입이 많아졌고, 더구나 지금으로썬 뉴린젤의 행
동 하나하나가 그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공포를 유발하고 있었다. 침착하
기만 하다면, 많은 머릿수를 사용해서라도 어떻게 상대를 해볼 만도 했
지만, 지금은 침착하기는커녕 제 정신상태를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뉴린
젤에게 무릎이 베이고 복부를 차여 입으로 하염없이 피를 토하고 있는
병사, 목이 잘려 쓰러진 채로 대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병사, 허리가
반쯤 잘라져 내장을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병사, 이 모든 광경이 한 여
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여자가 이번에는 자
신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로 썬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
려웠다.
전의를 상실한 적을 상대하는 것처럼 쉬운 일도 없었다. 뉴린젤은 간
단히 병사들이 휘두르는 무기를 피하여 정확하게 그들의 급소를 베어갔
고, 그것은 단 한번도 빛나가지 않고 그대로 치명상이 되어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시청건물..........."
병사들을 전부 처리한 뉴린젤은 가만히 대로를 따라 멀리에 보이는 커
다란 4층 건물을 바라보았다. 가운데 드라킬스의 깃발이 걸려있는 뾰족
한 탑이 있어 한눈에 그 건물이 시청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곳에........"
뉴린젤은 다시 전 속력을 내어 시청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병사들은 그녀를 막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다. 원래 없는 건지,
아니면 방금 전의 전투를 목격하고는 기가 죽어 나오지 못하는 건지,
그녀로써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알고싶지도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것은 오직 한사람의 모습이었다.
몇 분을 달리자 뉴린젤은 곧 시청건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양쪽으
로 열리는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시청의 정문은 곧 뉴린젤의 손
에 의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뉴린젤은 자신이
연 시청의 정문에 달린 손잡이에 붉은 피가 다량으로 묻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결코 자신의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온몸을 흠뻑
적신 드라킬스병사들의 것이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체 목숨을 빼앗긴 슬픈 운명의 병사들.
'하지만, 그들도 나보다 슬픈 운명이라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