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영원한 문제- (7)
킬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본 크랭크는
속으로 혀를 차며 재차 말해주었다. 아무래도 충격이 심각한 듯 했다.
"그, 그럼 미리 못 가게 잡았어야......."
"그러니까 너무 갑작스런 상황이었다니까? 이미 저 멀리 가있는데 어
쩌라고. 그렇다고 내가 말을 뉴린젤보다 잘 모는 것도 아니고."
킬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크랭크는 중간에 그의 말을 끊으며 고
개를 저었다. 그야말로 불가항력.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이런...... 쥬크! 쥬크어딨어!"
킬츠는 창백해진 얼굴로 막사 밖 한쪽 구석에서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쥬크를 불렀다.
"또 뭔 일이냐 킬츠."
킬츠의 외침에 쥬크는 부스스 몸을 일으켜 어슬렁거리며 킬츠에게 다
가왔다. 사실은 밤새 전력질주를 했기 때문에 피곤에 지쳐 그대로 벗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자면서도 외부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그의 귀는 고성능이었기 때문에 슬프게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
다.
"뉴린젤이... 뉴린젤이혼자서 제스타니아성으로 가버렸어!"
"아, 그 건방진 여자 말인가. 결국 아버지와 결단을 내려고 하나보군."
쥬크가 심드렁한 말투로 빈정거리듯 말하자 킬츠는 펄쩍 뛰며 쥬크에
게 소리쳤다.
"뉴린젤이 아버지와 어떻게 하던지, 그건 그녀의 판단이지만, 혼자서
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야! 지금쯤 파리퀸은 군대를 집결하여 자유기사들
을 상대하러 떠났을 텐데! 혼자 드라킬스군에게 돌격한다면 파리퀸을
만나기도 전에 뉴린젤은 죽고 말아!"
"쳇... 알았어, 알았다구. 그러니까 나보고 다시 뉴린젤을 쫓아서 제스
타니아성으로 가라는 거지?"
"바로 그거야! 부탁해 쥬크. 밤새 달려서 힘든 줄은 알지만, 이건 뉴린
젤의 생명이 달린 문제라구........"
킬츠가 두 눈을 번득이며 쥬크에게 사정하자 쥬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어서 등에 올라타. 하지만 난 어제 내가 낼 수 있는 보통 속도
의 두 배에 가까운 속도로 장시간을 달렸어 지금은 전력으로 달리지 못
해. 고작해야 보통 말보다 조금 빠를 정도.... 그보다 못할지도 모르지."
"상관없어! 그 정도면 뉴린젤이 전장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
을지도 몰라. 어서 가자!"
킬츠는 재빨리 쥬크의 등에 올라타며 막사 안에 있는 크랭크에게 소리
쳤다.
"나 대신 부대를 이끌고 예정대로 페이오드로 향해 줘! 곧 뉴린젤을
데리고 따라 갈 테니!"
"그러지. 그럼 꼭 데려오라고!"
크랭크는 이미 제스타니아성을 향해 달리고 있는 킬츠의 등뒤로 소리
쳤고 킬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다시 진행방향으로 돌렸다.
"아무튼 동료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니까.... 킬츠대장. 저러다가
몸 버리지."
"킬츠는 저렇게 사는 게 어울리니까요."
크랭크는 저 멀리 달려가는 쥬크와 킬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
과 함께 고개를 저었고 옆에 누워있던 루디가 가볍게 웃으며 눈을 감았
다. 킬츠라면 반드시 믿을 수 있었다. 뉴린젤을 무사히 데리고 돌아올
것을,
'뉴린젤...... 킬츠는 저렇게 당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데...... 당신은
아버지에 대한 원한으로 눈과 귀를 막고 있으니..... 조금 더, 조금 더 주
위를 둘러본다면 좋으련만....'
그때 스와인은 혼의 용병을 이끌고 제스타니아성 동쪽을 향해 달려가
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 달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적당한 속
력을 내며, 곧 벌어질 전투에 대비하여 체력을 비축해 놓고 있었다.
'오랜만의 전투구나.............'
스와인은 혼의 용병단, 선두에서 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600년 역사를
가진 혼의 용병의 현 용병장. 그것이 지금 스와인의 위치였다. 순수하게
검과 창을 연마하길 좋아하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많은
30대의 청년의 모습도, 이때만큼은 긴 생명력을 이어오는 무력 집단의
사령관다운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옆에는 혼의 용병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는 파킨스라 불리는 동갑
내기 청년이 함께 말을 달리고 있었다. 매사에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어
사교적이지 못한 이 딱딱하게 생긴 남자는, 스와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언제나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파킨스
는 충실하게 혼의 용병단의 용병장 자리를 맡아서 무리 없이 무리를 이
끌었다.
'파킨스.... 나의 믿음직한 동료. 이번 전쟁에서도 부디 후회 없는 전투
를 벌일 수 있도록.....'
그 동안 수많은 전장을 치러오며 스와인에겐 거의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가지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적과 아군의 병력에 차이
가 난다해도, 정말로 모든 정신을 다 쏟아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실력으로 전쟁에 임한다면 그는 반드시 그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긴 시간을 이어오는 혼의 용병 전체의 신념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혼의 용병들은 대부분 그런 생각으로 전투에 임했으며
그렇기에수많은 전쟁을 겪고서도 언제나 큰 피해를 입는 일없이 대다
수의 병력을 살려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휘관의 명령에 마치
자신이 그의 손발이 된 것처럼 완벽히 실행하는 것도, 뛰어난 실력으로
말 위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도, 고속으로 이동하다가 갑자기 전투가 시
작되어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것도, 전부 혼의 용병 전부가 각자 이런
신념으로 살아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최선을
다해 전투를 한다는 것은, 곳 자신이 죽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나도, 그리고 나의 동료들도 이번 전투에서 반드시
살아 남을 것이다.'
스와인은 몇 명의 나이트 길드 인원과 함께 먼저 페이오드의 티엣타
왕자에게로 떠난 크라다겜을 생각했다. 그는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또 한가지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나, 당신 제자한테서 검술을 배웠는데..... 이게 어느 정도인지 당사자
한테 직접 확인을 받아야겠어..... 곧 나도 페이오드로 갈 테니..... 그때
다시 만나자구.'
"나이트 임멜, 전방에 자유기사단이 보입니다. 숫자는 약 2만 5천 정
도입니다."
병사들이 알려온 사실에 임멜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
었다. 원래대로라면 파리퀸이 이 자리에서 철벽의 기갑단을 지휘하고
있어야 마땅한 것을, 갑자기 파리퀸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기 때문에 그
가 대신하여 지휘봉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보병으로 기병을 상대하는 것, 그것도 아군보다 많은 수의 적군을 상
대한 다는 것은 보통 마음가짐으론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
지만 파리퀸은 평소에 이 철벽의 기갑단을, 그 어떠한 상대라도 능동적
으로 대처하여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완벽하게 훈련시켜 놓았다. 그렇
기 때문에 그는 북부 자치도시연합과의 전재 초반에 자유기사단을 상대
로 단 한번의 패배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군대를 최고의 지위에서 지휘해보고 싶었지만.... 이런 상황이 되어서
지휘하길 바랬던 건 아니었는데......'
천천히 실적을 쌓고 성장하여 언젠가 자신도 하나의 부대를 직접 지휘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임멜이었다. 하지만 그는 드래곤 나이트
가 아닌 쿠스나이트였다. 물론 쿠스나이트 중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도 드래곤 나이트에 비교한다면 그다지
높은 것도 아니었다. 일단 사령관이 되려면 드라킬스군의 규칙상 드래
곤 나이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군에 드래곤 나이트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임시로 사령관직을 맡
은 것뿐이었다.
임멜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두 눈을 가만히 감았다. 이제 곧 전쟁의 시
작이다. 평소에 자신이 익히고 터득했던 병력 운용의 기본들을 충실하
게 지킨다면 이 잘 훈련된 병사들을 가지고 적을 이기지 못할 리가 없
었다. 이미 1선 지휘관들에게 모든 전술에 대한 지령을 내려놓았고 어
떻게 싸울 것인지, 적의 공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완벽하게 구상이
끝나있었다. 남은 것은 그것을 적절하게 실행하는 사령관의 명령뿐.
'반드시... 반드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유감없이 발휘해야한
다........ 유감없이, 후회를 남기면 안돼......'
최초로 사령관의 위치에 서본다는 불안감, 그리고 내심 끓어오르는 투
지와 의욕, 이 모든 것을 적절히 컨트롤하며 어느 한쪽에 빠져들지 않
도록 노력해야 했다. 언제나 냉철하게, 언제나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며
군을 지휘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장에 들어선 사령관의 유일한 임무이다.'
임멜은 감고있던 두 눈을 강하게 뜨며 허리에 차고있던 검을 힘차게
빼어들었다 그리고는 높이 치켜세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
그것이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전군 공격! 전방의 적에 맞서 싸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