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영원한 문제- (2)
"파리퀸 사령관 님. 드라킬스 철벽의 기갑단 소속인 막센이라고 합니
다."
"무사히 잘 돌아왔다. 막센."
파리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밀정에서 돌아온 병사의 어깨를 두드
려주며 그 동안의 노고를 그 한마디로써 풀어주었다. 확실히, 드라킬스
의 병사들 사이에서 최고로 인망 있고 존경받는 장군다운 행동이었다.
"감사합니다. 사령관 님. 그럼 일단 급한 정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막센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눈가에 보이는 검은 흔적과 퀭
한 두 눈은 며칠 밤을 세우며 이곳까지 달려왔던 그 동안의 피로를 여
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기력이 가득 담겨있는 충실
한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파울드에서 용병들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보름쯤 전의 일입니다. 예전에 파울드에서 일어났던 마족과 데스튼
신관들의 사건은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이다. 그래서 그 주모자로 용병단의 대장과 혼의 용병단의 용병
장이 감옥에 갇혔다고 들었지."
"그래서 세디아황국의 사신이 그들을 압송하려고 파울드에 왔을 때,
파울드의 두 용병단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들의 사령관을 구출한 것입니
다. 지금 파울드를 탈출하여 이쪽으로 오고있습니다. 그들이 이대로 계
속 전진하면, 이 제스타니아성의 남쪽으로 100만 세션쯤 되는 위치를
지나갈 것입니다."
"그랬군. 정말 잘된 일이다. 북부자치도시연합의 병력은 30% 이상이
그들 용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제 파울드는 마음대로 자유기사
단을 출격시키지 못할 것이다."
파리퀸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밀정에서
방금 돌아온 막센에게 다시 한번 수고했다는 말을 한 뒤 돌아가서 푹
쉬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그에겐 약속된 충분한 포상과 보름간의 휴가
가 주어졌다.
하지만, 일단 막센이 그의 방을 나가고 문을 닫자, 파리퀸의 얼굴에 담
겨있던 환한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곧바로 심각한 표정을 바뀌어
자신의 집무책상에 앉으며 고민에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확실히 잘된 일이다. 하지만 무언가 석연치가 않아. 과연 이 사건을
액면 그대로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파리퀸은 지도를 펼쳐들며 생각했다. 일단 용병들이 북부 자치도시연
합을 배신한 이상,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다면 어딘가 새롭게 자신들을
고용할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일단 드라킬스로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선 드라킬스로 오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들
의 진행방향으로 보아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십중팔구 페이오드왕국으
로 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 페이오드는 티엣타 왕자와 사시드 총관이 내란을 벌이고 있으니
까...... 그 어느 쪽으로 가도 그들은 환영하며 용병단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군. 그걸 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 제스타니아를 스쳐지나가
페이오드로 가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파리퀸의 머릿속에 있는 가장 큰 의문은 해소
되지 않았다. 보다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의문.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혹시....... 이 모든 사건이 북부자치도시연합의 총 참모장, 마인슈의 머
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미 여러 정보를 종합한 결과, 북부자치도시연합의 모든 전략과 군사
적 방침을 결정하는 총 참모장은 마인슈라는 인물로 추정되었다. 그는
예전에 페이오드에서 참모장 격인 직책을 맡고있던 사람으로 드라킬스
와의 국경분쟁에서 뛰어난 전술을 보여주며 드라킬스의 국경수비군을
섬멸했던 전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 새롭게 보여지는 북부자치도
시연합의 전략... 그 모든 것은 뒤에 마인슈라는 인물이 있음으로써 성
립되는 일이었다.
'확실히, 그 사람이라면 이런 일을 충분히 꾸미고도 남는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무엇을 최종적으로........'
만약이것이 모두 그들의 작전이라면, 일단 이렇게 함으로써 북부자치
도시연합은 두 명의 인재를 잃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 이어져 드라킬스를 공격하기 위함이라면, 이 상황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탈출한 용병들을 이 드라킬스에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좋은 게 아닐까? 그렇게 된다면 내부에서부터 공격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동시에 밖에서부터의 공격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 여러 가지의 상황이 가정되었기 때문에 그 모든 상황을 판단하
고, 각각 그에 맞는 대처법을 구상하기엔 40대 후반의 그의 머리가 밭
쳐주지를 않았다. 좀더 젊었을 때는 몇 날 몇 일의 밤을 세워서라도 끝
까지 생각하고 판단했는데, 지금은 그게 너무 힘든 일로 변해가고 있었
다. 더구나 지금처럼 그 상황의 분기점이 엄청날 경우에는 특히 더욱
그러했다.
'이 일은..... 이제 나에게 너무 힘든 것 같다.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위
해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젊었을 때, 그가 전력으로 몸바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유는
사실, 그가 뛰어난 애국자이어서도, 아니면 전쟁을 좋아하는 전쟁광이어
서도 아니었다. 오직 한가지, 자신의 자식이 나중에 커서 좀 더 넓고,
강한 나라에서 일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자신의
딸인 뉴린젤을.
'하지만.... 그 아이는 나를 떠났지..... 저 북부자치도시연합으로.....'
그 언젠가. 딸의 충격적인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잘못됨을 시인
하고, 인정할 기회가 있었다. 하자만, 자신의 신념과 자존심이 그걸 허
락하지 않았고, 지금은 적이 되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는 벽장에 놓아둔 한 병의 위스키를 꺼내어 들었다. 예전에 그는 오
직 레드와인만을 즐기며 마셨지만, 그 어느 날부터인가 위스키로 바뀌
게 되었다. 가슴의 허무함을 잊기 위해선, 와인의 알코올 도수로는 부족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지금은 내 부하들을 죽이지 않게 하는 것이 우선 이다...... 나
를 믿고 따르는 부하들의 목숨..... 나는 그 모든 것의 책임을 지어야 하
는 것이다. 한 명이라도.... 한 명이라도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살릴 수 있
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파리퀸은 위스키를 함께 꺼낸 잔에다 부으며 언젠가 자신이 마셔야 했
던 묽은 레드와인을 생각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그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런 갈색 술병쯤이야 저 멀리 창 밖으로 던
져버릴 수 있으련만.....
"사령관 님. 나이트 임멜입니다."
"........ 들어오도록."
파리퀸은 한잔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던 술병을 다시 제자리로 집어넣
으며 문을 두드린 임멜을 방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그는 예전에 파울드
평원전쟁에서 대패하며 사망한 드래곤 나이트 펠류즈의 부관으로 그 실
력을 아깝게 여긴 파리퀸이 직접 부탁하여 자신의 부관으로 배속시켰었
다. 그리고 그는 파리퀸의 기대대로 맡은 일을 충실히 처리하며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했다. 착실하고 머리 좋은 청년이었다.
"좀 전에 밀정에게서 사실을 들었습니다."
"아, 그래. 자네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파리퀸은 이 상황에 한 가닥 서광이 비취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임
멜의 의견을 요구했다.
'왜 내가 이 뛰어난 부관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가.'
그라면, 온갖 상념으로 고통받고있는 자신을 충분히 도와줄 수가 있었
다. 나이트 임멜은 부관으로써 독창적이거나, 새로운 방법을 구상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사실에 충실한 정통파의 자질은
갖추고 있었다. 마치 파리퀸 자신의 젊었을 때를 보는 듯 했다.
"네. 그걸 말씀드리고 싶어서 찾아온 것입니다."
임멜은 조금 고민하는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 사건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구분 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
다. 일단 첫 번째로는 사건 그대로 파울드의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이 모든 사건이 북부 자치도시연합의 계획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지. 물론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의 진행이었지만....."
마족의 사건. 그리고 주모자의 수감. 주모자를 따르는 용병들의 반란.
이 연이은 사건들이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계획인지, 어
쩌면 모든 것들이 진실일지도, 어쩌면 모든 것들이 계획된 것일지도 모
르는 일이었다.
"일단 첫 번째 경우라면 우리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단
그렇다면 파울드의 병력은 반감하여 이 제스타니아성을 쉽사리 공격해
오지 못할 테니까요. 물론 자유기사단 만으로도 우리의 병력을 능가하
긴 하지만.....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떨어져 나가 제
스타니아의 남쪽 부분을 지나가려 하는 용병들도 우리를 공격해오지는
않을 테고 말입니다."
"그렇군.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두 번째 경우입니다. 처음에 저는 이 문제를 아주 복
잡하게 생각했지만........ 일단 이 경우는 분명히 북부자치도시연합이 용
병단과 기사단의 양동작전을노리고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과
정이야 어떻든 말이지요."
"하지만, 그럴 계획이었다면, 애초에 용병단이 이 제스타니아로 사람을
보내 자신들을 받아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건 만약 우리가 예측했다면 오히려 성으로 들어오려는 용병들을 대
기하고있던 우리들이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을 감안해서 하지
않은 것일 겁니다."
"호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군."
파리퀸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해 주자 임멜은 더욱 생기 있고 기운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부동자세로 상관을 대함에 있어
부족함은 없었지만, 그 말을 하는 열정이 벌써 파리퀸의 방을 가득 메
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 생각은.... 우선 용병단을 제스타니아의 뒤쪽으로 보내어
성의 서쪽 성문을 공략하게 하고, 나머지 자유기사단은 바로 성의 동쪽
성문을 공략하게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파울드의 용병단이 마치
페이오드로 가기 위해 슬며시 지나가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구요."
임멜의 명쾌한 의견에, 파리퀸은 머릿속에 잔뜩 쌓여있던 수많은 상황
들이 한번에 정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어차피 문제는 한
가지인 것이었다. 이 제스타니아를 지키는 것.
"아, 역시 자네답군. 과연 그렇겠어. 내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네."
"사령관 님이라면, 제 의견을 들어주실 줄 믿고 있었습니다."
임멜은 파리퀸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기쁜 표정을 드러내었다. 과거
그렇게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다가 적의 함정에 걸려 아군을 전멸시킨
자신의 상관을 생각하며, 지금 이곳에 있는 파리퀸을 비교하는 것이었
다. 그리고 그 비교는 현재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즐거운 가로 이미 판
가름 나 있었다. 그는 지금 이 파리퀸의 밑에서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
휘하며 즐거운 생활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부관의 의견을 듣는 것은 사령관의 의무가 아니던가. 그런 데
에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당연한 것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한시간 쯤 뒤에 1선 지휘관들을 모두 부르도록 하게. 작전
회의를 열 테니까. 준비는 미리미리 해두는 것이 좋지."
"물론입니다. 파리퀸 사령관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