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영원한 문제- (1)
"용병단이라....... 설마 이런데서 일하게 될지는 몰랐는데."
파울드 성을 빠져 나와, 용병대와 함께 이동하던 카젯은 한숨을 몰아
쉬며 아쉬운 듯, 파울드 성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너와는 딱 맞는 직업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다운크람?"
"물론, 용병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전장에서 싸우기만 하면 되기 때
문이지. 너에게 있어선 천직이라고 할까. 아, 물론 백인장이나 천인장
같은 간부급 용병 말고 그냥 하위 말단 용병을 말하는 것이다."
다운크람은 카젯을 바라보지도 않으며 저 혼자 말하듯 중얼거렸다. 습
관적으로 카젯을 놀리는 것이 입에 붙은 듯, 거침없는 말투였다.
다행이 그들에겐 말이 주어졌다. 물론 나이트길드의 일원으로써 정식
으로 이 작전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쯤은 지급해 주는 게 당연하
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 오직 자신들의 발로써 걷고있는
용병들과 섞여가면서, 지휘관도 아닌 사람이 말을 타고 간다는 것은 별
로 보기에 좋지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원체 파울드의 용병들이 구질구
질한 곳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뭐라고
불평을 해대지는 않았다. 다만 세렌이나 펠린같이 배려심이 투철한 몇
명만이 조금 불편해 할뿐이었다.
"하위 말단 용병...... 그런 것도 있었냐?"
"혹시 없다고 해도 너를 위해서라면 특별히 만들어 줄지도 모르지."
카젯의 볼멘소리에 다운크람은 가차없이 쐬기를 박으며 더 이상의 반
론을 거부했다. 지금 현재는 걷고있는 용병들과 보조를 맞춰야 했기 때
문에 상당히 저속으로 말을 모는 중이었다. 덕분에 직접적으로 힘이 전
혀 들지 않는 세렌 외 다섯 명은 긴 시간을 무척 지루하게 보내야만 했
다.
"그런데...... 미네아는 어디에 있지?"
세렌이 잠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키사르를 부르며 말했다. 대략적으로
이번 작전인원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만 들었을 뿐, 구체적인 세부사
항은 알지 못했다.
"그녀는 후방 수송대에 소속되어있다. 다운크람의 동생들과 함께 동행
하고 있으며 간단한 보급품 정리를 맡고 있다 한다."
"소문에 의하면, 지난 보름간 행군하면서 여러 병사들의 옷을 수선해
주었다던데, 그것도 아주 놀라운 솜씨로 말이야."
키사르의 말에 이어 펠린이 어제 밤 야영을 할 때 용병들 사이에서 들
었던 이야기도 곁들여서 해주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 용병
들은 클라스라인 최고의 재봉사에게서 실력을 전수 받은 공주님에게 손
수 옷을 수선 받은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꿈도 못 꿀 일이군. 공주님께 직접 수선을 받는다......."
루벨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자 세렌은 고개를 저으며 후방을 바라
보며 그곳에 있을 미네아를생각했다.
"그녀는 이제 공주가 아니야. 단지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살기를 결심
한 강한 여자일 뿐이지. 그런데 다운크람......"
"왜 그러는가."
"너의 동생들 말이지......... 혹시 싸움 같은 거 할 줄 알아? 예를 들어
검을 쓸 줄 안다든 가..."
세렌은 터벅터벅 걸어가는 말 위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몸으로 이미 자
신이 아닌 다른 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전이 아닌, 그 다른 사
람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며.
"모두 다 자신의 몸 정도는 지킬 줄 안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옆에 있
는 여자 하나쯤은 지켜줄 수도 있을 테지. 내 동생들은 남자 건, 여자
건, 모두 기본적인 것들은 다 할 수 있게 자랐다."
"다행이야. 물론 네가 그렇게 교육시켰겠지?"
"첫째니까. 부모님이 없으니 내가 그 역할을 할 수밖에."
"사명감이 투철하구나."
"가족이니까."
다운크람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막 석양이 지고있는
서쪽의 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짙게 깔려 있어 마치 피같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늦가을의 하늘. 그것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잔잔하
게 만들고 있었다.
'가족...... 가족이라........'
세렌은 고개를 숙이며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자신도 아
주 어렸을 적엔 완벽한 가족의 속에서 살고 있었다. 자상하고 따뜻한
어머니, 훌륭하고 강인했던 아버지, 귀엽고 착한 동생. 주위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는 완벽한 가족을 이루며 행
복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가족이란 오로지 동생인 에리나뿐이었다. 그
리고 얼마 전에 만난 그 동생은 이제 완전한 성인이 되어 혼자서도 충
분히 살 수 있는 강인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정식으로 공인된 스
피리스트 신전의 정령사였으며 현재는 나이트길드에 비공식으로 속해있
으면서 북부 자치도시연합의 용병단에서 일하고 있었다.
'급료도 나보다 많이 받고 있지.'
그렇기 때문에, 세렌은 생각했다. 이젠 예전과 같은 그런 식의 가족은
필요 없다고 말이다. 그에게 있어서 더 이상 그런 부모님은 필요 없었
다. 물론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것도 없겠지만, 지금 그가 생각하는 가
족의 구성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좋은 부모님 밑에 있는 자식으로써의
존재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부모가 된 그런 가족이었다. 언제부터인
지, 그는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그 옛날의 가족을 포기해 버렸고, 대신
새로운 구성의 가족을 원하게 되었다.
'아버지.... 누구보다 강했던 나의 아버지........... 하지만, 전 당신같이 아
버지가 되지는 않겠습니다. 그 어떤 상황이 있더라도, 자신의 아내와 자
식들을 지킬 수 있는..... 그런 아버지가 되고 말겠어요. 그리고, 그리
고......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세렌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그 유일한 하나의 욕망
이었다. 너무 슬퍼서, 너무 안타까워서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겠다는
그 욕망......
'전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만 합니다.'
"파울드에 잠복해 있었던 밀정이 돌아왔습니다."
"어서 오게 하도록."
현 드라킬스의 영토로 되어있는 제스타니아성. 북부자치도시와의 구경
지방에선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던 성이었다. 하지만, 전에 그것이
북부자치도시연합의 것이었을 때, 철벽의 기갑단을 이끌던 드라킬스의
드래곤 나이트, 파리퀸은 철벽의 수비를 자랑한다고 철석같이 믿고있었
던 북부자치도시연합의 믿음을 단 이틀만에 깨어버리며 이 성을 점령했
었다. 그리고 본국에 내란이 일어나 대부분의 병력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때, 이 제스타니아성을 지키는 것 역시 나이트 파리퀸과 그의 부대인
철벽의 기갑단이었다.
철벽의 기갑단의 총 인원은 몇 달 전 긴급 보충된 신규병력까지 포함
하여 약 2만이 조금 넘어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현재는 예전 같으면
절대 상상도 하지 못했을 '북부자치도시연합을 상대로 병력의 열세'라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리퀸은 다시 이 성을 지키게 되면서부터 몇 명의 특
별히 차출된 병사들을 밀정으로 파울드에 잠입시켜 놓았다. 그는 아무
리 병력의 열세라도, 정확한 정보만 빠른 시간 내에 파악 할 수 있다면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시간과 정보. 이 두 가지를 착
실하게 지키는 정통적인 군사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파리
퀸이 지금까지 전쟁에서 승리해올 수 있는 가장 큰 밑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