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장 -교차로- (1)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지만, 결국 무사히 클라스라인의 수도, 세인트룸
을 빠져 나온 세렌일행은 곧 밖에서 대기 중이었던 마차와 합세하여 국
경지방을 향해 달려갔다.
마차 안에는 다운크람의 동생들뿐만 아니라 긴 여행에 필요한 각종 식
량과 생필품 등이 실려 있었다. 모두 미리미리 준비해 둔 다운크람의
수훈이었다.
"확실히, 추격 병들은 없는 것 같아,"
마차 뒤에서 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있는 카젯이 넓은 평야를 바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인트룸을 빠져 나온 지 약 한달 째, 그러나 클
라스라인의 추격 병들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물론 세렌일행도
거의 전속력을 다해 마차를 이동시키고 있었지만, 만약 화이트 나이트
가 따라온다면, 금새 잡힐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우리가 어느 곳으로 도망가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쪽
의 국경인지, 북쪽의 국경인지, 아니면 그밖에 자세하게 어느 지방으로
도망가려 하는지, 머리가 떨어지는 재상으로썬 금새 알아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키사르도 상당히 무료했던지, 평소에는 상대도 하지 않는 카젯의 말에
대꾸해 주었다. 확실히, 도망치는 집단의 여행답지 않게 지난 한 달은
너무도 한가했다.
"이제 몇 일만 더 가면 국경을 지나, 북부 자치도시의 영토에 들어가
게 될 거야. 그런데 국경은 어떻게 통과할 거지?"
앞에서 말을 몰고있던 펠린이 루벨과 자리를 교대하면서 마차 안으로
들어오며 키사르에게 물었다. 그는 어제 밤부터 지금 석양이 깔리는 순
간까지 쉬지 않고 말을 몰아서 그런지, 상당히 엉거주춤한 자세로 마차
의 바닥에 엎드리며 앉았다.
"지금은 드라킬스와의 전쟁으로 국경지방의 군사력이 많이 약해졌다.
모든 국경을 순찰할 정도로 국경지방의 병력은 풍부하지는 않아. 그냥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 지나가기만 하면 별 탈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거
다."
키사르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손에 들고있는 지도를 펼쳐들었
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클라스라인 북쪽 국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평야지대, 원래는 농사를 짓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내년 농사를 위
해 휴경을 하고있는 상태였다, 덕분에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드물었다.
"그렇지만....... 결코 클라스라인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지가
않다."
그때 막내 동생에게 숫자 계산법을 가르치고 있던 다운크람이 악간 어
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의견엔 그곳에 있는 모두가 동의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에겐 클라스라인의 둘째 공주가 동행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운크람은 마차 한쪽 구석에 잠들어 있는 세렌을 간호하며 앉아 있는
미네아 공주를 가는 눈으로 응시했다. 그건 물론 당사자들 간의 문제이
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간섭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그들 일행의 완벽한 도주에 상당히 큰짐이 되고 있었다.
'물론... 하지만 저 공주의 선택은 탁월한 것이었다. 어차피 저 클라스
라인에 공주로 남아 있어봤자 별 볼일 없이 생애를 마쳤을 테니.....'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다운크람이 정의를 내릴 수는 없
었지만, 그래도 남에게 휘둘리며 사는 것 보단,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네아 역시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대로 공주라는 탁월한 지휘를 버리면서까
지, 세렌을 따라 나라를 등지고 나온 것이었다.
"모두... 다 .........했으면 좋겠다."
"뭐? 뭐라고 했어 다운크람?"
다운크람의 중얼거림을 들은 펠린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다운크람은 애매하게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 아니다. 곧 국경이라고...."
"일단.... 모조리 화장하여 각각 상자에다 담아 두었습니다. 사망한 데
스튼의 신관은 총 2백 12명. 처음 이곳에 왔던 사람들 중에서 단 한 명
을 제외한 숫자입니다."
바로 어제, 끔직한 피의 향연을 끝낸 고급여관 세피로이스는 즉각 청
소를 시작했지만, 겨우 오늘에 와서야 끝낼 수 있었다. 모두 50명의 인
원이 동원되었으며, 신관들의 시체를 태운 30여 개의 소각로가 20시간
이상을 끊이지 않고 타올랐으며, 피 냄새를 지우기 위한 탈취제와 향수
만 해도 500상자가 소비되었다.
"그, 한 명이 문제입니다... 귀환마법을 쓴 바로 그 신관....."
나이트길드의 자치도시연합 담당관, 피리우크의 보고를 들은 나이트길
드총평의장 슈레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회의장에 모인 나이트 길
드와 자치도시연합의 간부들을 바라보았다. 이 사건은 너무도 끔직하고,
그 후유증이 엄청날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에 모든 이들의 마음을 불
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데스튼은 세디아 황국의 국교이고 데스튼의 대 신전과 세디아 황국간
은 서로 친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아마... 근 시일 내에 세디아 황국의
군사적인 압력이 가해질 것입니다."
총 참모장 마인슈는 상당히 어두워진 얼굴로 도표를 가리키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양국간에 전면전으로 확산된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것은 세디아 황국의 대략적인 군사력을 집계한 차트인데....... 일단 이걸
보시기 바랍니다."
"세디아 황국이라면.... 임페리얼 나이트인가?"
스와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자 마인슈는 고개를 저었다.
"임페리얼 나이트는 황제 친위기사단이기 때문에 숫자가 아주 적습니
다. 물론 그들 중에서 지휘관이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문제는
세디아황국의 주력 기사단인 에리우스기사단과 체레인 산악병입니다."
에리우스기사단, 세디아 황국의 주 기사단으로 선발된 세디아 황국의
젊은이들을 약 4년간의 훈련을 거치고 나서 선발되는 역사가 깊은 기사
단으로써 성의 전쟁 때 마족과 마수들을 상대로 상당한 위력을 보이며
선전한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체레인 산악병은 세디아황국의 북부 산
악지방인 체레인에서 선발된 병사들로, 기동성과 체력이 상당히 우수하
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정확한 숫자는 아니지만, 일단 나이트길드에서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에리우스기사단은 약 2만 정도. 체레인 산악병은 약 3만 정도 인 것으
로 추측됩니다. 거기에 일반 보병들까지 합세하면, 대략적인 세디아 황
국의 전력이 나옵니다."
"약 6만 이군 요."
회의에 함께 참석하고 있던 부시장 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6
만, 한나라의 군대로써 그다지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현재 북부 자치
도시연합의 총 병력보다는 훨씬 많은 숫자였다. 그것도 최소한 그렇다
는 말이다.
"어차피 세디아 황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치도시연합
밖에 없으니, 세디아 황국 측으로썬 병력을 전부 동원할 가능성도 있습
니다."
마인슈는 도표에 나타난 양 국가간의 전력 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북
부 자치도시연합 37%, 그리고 세디아 황국이 63%였다.
"현재 드라킬스의 영토를 공략하기 위해 병력의 출동 준비는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지금 막 세디아황국이 쳐들어온다 해도 막아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막아낸다 하더라도..... 우리 군대의
심각한 피해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영토 회복은 물 건너가겠군, 아니, 드라킬스의 재 침공에 휘말
려 이 도시마저 완전히 빼앗길지도......"
마인슈의 설명에 자유기사단 단장, 나이트 세텔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현재 드라킬스의 영토가
되어있는 제스타니아 성을 함락하려 했는데, 난데없이 세디아 황국과의
전면전의 위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세디아 황국이 공격을 해올지, 안 해올지는 모르는 일
이지 않습니까?"
그때, 나이트 네프일이 손을 들며 의견을 말하였다. 지금 그로써는 빨
리 제스타니아를 점령하여 페이오드로 가는 통로를 확보한 다음 봉기하
고있는 티엣타 왕자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
다. 그래야만 현재 페이오드에 점령중인 그의 나라인 남부 자치도시연
합이 해방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습니다. 나이트 네프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 기다리
며 세디아 황국의 정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연 군사를 일으킬 것인
지, 아니면 무엇인가 다른 요구를 해올 것인지........"
마인슈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그곳에 있는 나이트길드 전원의 얼굴
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세디아황국이 전쟁을 일으
키지 않고 무엇인가 요구를 해온다면, 그 요구가 무엇일지는 보지 않아
도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요구는 들어줄 수 없었다. 그것
은 나이트길드의 신념이자, 동료를 위하는 기사의 명예와도 같은 것이
었다.
"아, 몸은 좀 괜찮나 크라다겜?"
화의를 마친 스와인이 세피로이스의 4층에 새롭게 마련된 크라다겜의
방을 찾아갔다. 이미 그의 방에는 복부에 붕대를 칭칭 감고 얇은 옷 한
벌만 입고있는 킬츠와, 로브를 벗고 평상복 차림을 하고있는 루디, 그리
고 과일을 깎고 있는 쿠슬리와 크라다겜의 머리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있는 에리나가 있었다.
"아, 너무 화기애애한데, 이봐 킬츠, 넌 상처도 상당한데 여기서 이렇
게 놀고 있어도 되는 건가?"
"뭐, 나보다는 크라다겜이 훨씬 상태가 안 좋으니까. 여기서 이렇게 즐
겁게 지내는 것만이 크라다겜의 상처가 빨리 날수 있어서 말이야."
킬츠는 어깨를 으쓱하며 누워있는 크라다겜을 바라보았다. 그는 식사
중이었는데, 물론 그 식사를 제공해 주는 것은 그와 머리를 맞대고 있
는 에리나였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이, 이 크라다겜 씨한테는 소중한 식량이
된다고 하니, 기분이 좋아요. 이런 식으로 남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
니...."
에리나는 잠시 후 크라다겜의 머리에서 자신의 이마를 떼며 스와인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단숨에 방안 분위기가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
다.
"확실히, 에리나의 감정을 먹는다면, 크라다겜의 상처도 금새 낳을 것
같군. 이봐 크라다겜, 자넨 정말 복 받은 남자야."
스와인이 의자에 앉으며 쿠슬리가 깎아 놓은과일조각 하나를 집어먹
으며 중얼거렸다. 마족은 신체구조가 인간과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인
간의 약으로는 상처를 치유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에게 에너지가 되는
인간의 감정을 풍부하게 공급하여 마족 특유의 빠른 자체 치유능력을
최대한 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으악! 시어! 이건 뭔 과일이야!"
"아, 그건 세디아 황국의 특산품인 옐브린 나무열매지. 영양이 풍부해
서 환자들에게 아주 좋은 과일이거든."
"으..... 그래도 이건 너무 시구만, 난 신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스와인인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안타까운 얼굴로 테이블에 놓아진 접시
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담겨진 과일들은 모두 다 옐브린 나무 열매였다.
"그건 그렇고, 오늘 회의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루디가 자신도 열매를 한 조각 집어들면서 스와인에게 물었다. 그리고
는 한입 깨물어 먹었는데, 루디는 스와인과는 달리 신 것을 좋아하는
듯,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아, 뻔하지 뭐. 세디아 황국과의 전면전에 대한 정보와 대비.. 뭐 대충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했어."
"결론은 요?"
"........... 좀 더 기다려 보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
스와인은 팔짱을 끼며 다리를 꼬았다. 세디아 황국과의 전면전이 벌어
진 다면, 그것은 확실히 엄청난 피해를 이곳 북부 자치도시연합에 안겨
줄 것이었다. 멸망까지는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병력의 절대적인 괴
멸........ 아무리 총 참모장 마인슈의 전략 전술이 뛰어나다 해도 그 정도
는 각오해야만했다.
"쳇, 무능력한 놈들, 저희 힘으로 안 되니까 나라의 힘을 빌리다니..."
킬츠가 이를 갈며 데스튼의 신관들을 매도했다. 잘못했으면 또 한 명
의 소중한 사람, 아니 소중한 마족을 영영 잃을 뻔한 것이었다. 게다가
신관들과 전투를 벌인 뉴린젤도 상당한 부상을 입어 지금 자신의 방 침
대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몸서리가 쳐지는 섬
뜩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