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35화 (135/166)

제 10장 -운명의 신- (4)

뉴린젤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용병들을 훈련시킨 뒤, 태양이 어눌하게

황혼으로 접어들 무렵이 되서야 그녀의 숙소인 고급여관, 세피로이스로

돌아왔다. 요즘 그녀의 일과는 언제나 용병들의 훈련과 그녀 자신의 훈

련으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그  두 가지 일의 강도가

전과 비교하여 현격하게 높아져 버렸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말수도 더욱 줄어들고, 표정도 그야말로 얼음  인형이라 불리던 별명이

얼음 마녀라고 바뀔 정도로 차갑고 삭막해 져버렸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기며 여관으로 돌아오며, 그녀는 파울드의 길거

리에 못 보던 신관복의 사람들이  무척 많이 눈에 띤다는 사실을 깨 닳

았다. 그 회색 빛 칙칙한 모양의 신관복은 분명 운명의 신, 데스튼의 신

관들이 착용하는 신관복임에 틀림없었다.

'저들이 용병들이 말하던 회색 곰.....'

아마 어제부터 이 도시로 들어와 마족을 찾는다 소란을 떨고있는 기분

나쁜 집단들이었다. 물론 기분 나쁘기로 겨룬다면  뉴린젤 역시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외모라  밭쳐주는데 비하여 데스튼의  신관들은 거의

우락부락한 얼굴에 울퉁불퉁한 근육을 가진 건장한 남성들이었다. 아무

래도 평소에 하는 일이 없는 관계로 신전 안에서 언제나 근육만 단련하

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도 뉴린젤은 더 이상  그들에

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

만으로도 정신의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다. 어디서  굴러 왔는지도 모를

신관 나부랭이에게 관심을 쏟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마, 마족!"

그때 마침 세피로이스의 앞을 돌아다니던 젊은 신관 하나가  뉴린젤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비명을 지르며 마법을 사용했다.

"부정의 세계에서 부정으로! 안티 이블!(anti evil)"

그러자 앞으로 내민 그 신관의 두 손의 앞에서 투명이 빛나는 세 가닥

의 빛의 줄기가 적당한 속도의 화살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뉴린젤을 향

해 날아들었다. 뉴린젤로써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뉴린젤은 등에 메고있던  자신의

장검을 빼어들어 겨우 하나의 빛의 줄기를 튕겨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빛의 줄기는 그대로 그녀의 복부와 가슴에 충돌해 버렸

다.

"콰앙!"

"............!"

그 빛의 줄기는 뉴린젤의 몸에  닿자마자 약간의 빛을 사방에  뿌리며

폭발해 버렸고 그녀는 충돌 부위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을 느낌과

동시에 두 눈을 부릅뜨며 자신에게 이 불시의 기습을 가한 젊은 신관을

바라보았다. 뉴린젤은 결코 마족이 아니었지만, 지금 그녀에게서 느껴지

는 갈려한 살의는 마족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난, 사람을 죽이는 검술밖에 배우지 않았다."

뉴린젤은 그대로 미끄러지듯 엄청난 속도로 그 문제의 신관을 향해 달

려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검은 신관이 두 번째의 마법을 준비하기도 전

에 신관의 목덜미에 거의 근접하고 있었다.

"채앵!"

그때, 순간 덩치 큰 새로운 신관 하나가  뉴린젤과  문제의 신관 사이

로 뛰어들었다. 훈련된 전사나  노련한 용병을 능가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들고있던 날이 하나뿐인 보통 검보다 굵고 긴, 라브린

이라 불리는 데스튼 신관들의 전용 무기로 뉴린젤의 빠른 검을  막아내

었다.

뉴린젤은 새로 난입한 이 우락부락한 얼굴을 바라보며 차갑기  그지없

는 눈동자에 더욱 강렬한  냉기를 띠었다. 순간적으로 다시  몸을 뒤로

뺀 후 그 덩치 큰 신관을 허리를 노리며 비스듬한 대각선으로 베어 내

려갔다. 그녀가 뒤로 빠진 거리는 거의 15세션에 달했으나 그녀의 검은

20세션이 넘는 길이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  신관은 능숙하게 최소한

의 움직임을 동원하여 그녀의 공격을 튕겨내었다. 상당히 여유 있는 움

직임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뉴린젤이 미리  예측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녀는 뒤로 튕겨 나온 자신의  검에 오히려 같은 방향으로 힘을  주어

몸 전체를 회전시키며 그대로 검을 한 바퀴 돌려 신관의 발목을 베어버

렸다.

"크억!"

설마 이런 방식으로 공격해올지 몰랐던 덩치 큰 신관은 얼굴에 가득하

던 여유를 순식간에 지워버리며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가 베인 오른쪽 발목은 완전히 잘라지지는 않았으나,  움직

일 수는 없을 정도로 깊이 베여있었다.

그리고 뉴린젤은 가차없이 검을 위로  치켜세웠다. 단숨에 베어버리겠

다는 단호한뜻이 그 자세에 담겨있었다.

"자, 잠깐! 저는 당신을 공격하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그 신관은 다급히 소리치며 뉴린젤의 최후일격을 저지했다. 다

행이 일단 뉴린젤의 공격이 멈추자, 그 덩치  큰 신관은 자신의 발목에

신성마법을 사용하며 고통스러운 표정과 함께 변명을 시작했다.

"저 신관은 정식으로 신관 자격을 얻은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마계의

힘을 감지해 내지 못합니다. 어쩌다 당신의 얼굴을 보고 당황하여 엉겁

결에 공격을 가한 것 같이  보여서 황급히 달려와 대신 당신의  공격을

막은 것입니다."

"............... 이름을 대라."

"데스튼의 전투 신관 호밍. 저쪽은 리차스라고 합니다."

덩치 큰 신관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덩달아 그의 뒤에서 덜덜  떨고

있는 젊은 신관을 가리키며 그의 이름도 친절하게 대신 말해주었다. 만

약 이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악귀 같은 실력과 기운을 풍기는 여자의

기분을 잘못 건드린다면 당장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난 이 북부 자치도시연합에  용병대를 지휘하는 천인장 뉴린젤  파우

카. 먼저 공격한 것은 그쪽이었으므로 책임도 그쪽에 있다."

"물론입니다. 데스튼의 이름을 걸고 최고의 사죄의 뜻을 밝힙니다."

"비켜라, 그리고 다음 번엔 기분 내키는 대로 베어버리겠다."

뉴린젤이 차가운 눈으로 호밍이라는 이름의 신관을 바라보며 더  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회복계의 신성마법이  익숙하지 않은지,

아직 피도 멈추지 않은 발목을  놀리며 뒤에 있던 신관 리차스와  함께

재빨리 길을 비켰다. 어쨌든  잘못은 확인도 하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공격한 이쪽에 있었으므로 신관을 대함에 있어서 뉴린젤이 아무리 오만

하다 하더라도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목

숨이 왔다갔다하는 순간인 것이다. 신관 호밍은 평소 갈고 닦은 자신의

실력에 대단히 자부심을 가지며 언제 어둠의 세력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간단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이 북부자치도시연

합의 수도라 불리는 어느 도시에서 그의 생각은 물거품처럼 산산이  흩

어져 버리게 되었다.

'짜증나는 인간들......'

뉴린젤은 그들이 비킨 길로 다시 걸음을 시작하며 들고있던 검을 다시

등으로 가져갔다. 사실 오늘  하루종일 쉬지 않고 몸을  움직여서 여간

피로가 쌓인 것이 아니었는데 웬 기분 나쁜 신관에게 불시의 기습을 받

아 또 다시 힘들게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가슴에 맞은 두발의 안티 이

블은 아무래도 마족들에게나 그 효과가 있는 듯, 폭발의 크기에 비해서

그다지 큰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으나,  지

금은 그저 약간 욱신거릴 뿐이었다. 체력만  원상태였다면 애초에 나머

지 두발도 전부 튕겨 낼 수도 있는 속도였다.

'마족, 마족들에게나 효과가 있다고?'

그때, 뉴린젤의 머릿속에 킬츠의 동료라고 했던 크라다겜이라는 한 인

물이 스쳐지나갔다. 분명, 그는 킬츠와 다크핵사곤의 결계에서 만났다는

확실한 '마족'이었다. 물론 성격이  포악하지도 않았으며 본위를  알 수

없는 마족 특유의 파괴본능도 없었지만.

'그를 노리고 온 것인가. 하지만, 과연 싸움이 될지는 모르겠군.'

뉴린젤은 내려온 앞머리를 가볍게 뒤로 쓸어 넘기며 샤워시설 완비에,

편안한 침대로 그녀를  기다리는 세피로이스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사실 이 신관들이 크라다겜을 노리던, 어쩌건  그녀에게 아무런 상관은

없었다. 단지 그녀의 머릿속에 앙금으로 남아있는  것은 크라다겜과 절

친한(?) 킬츠가 신관들의 표적이 되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처음에 그 젊은 신관이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마족이라  생각했다

는 사실이었다. 그건 평소에 그러려니 하고 관심을 끄고있던 그녀의 신

경을 거세게 자극시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마족..... 내가 마족으로 보였단 말인가.'

하루종일 도시 전체를 제집처럼 헤집고 다녔던 데스튼의 신관들은 결

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는 시장대리가 마련해준 시청 관사의 건물에

있는 강당으로 집결했다. 비록 그들이 마족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최

근까지 마족이 이 도시에 머물렀다는  남아있는 마족의 기운을 감지한

것이었다. 마족의 기운은 너무 강렬하여 한자리에  잠시만 머물고 있어

도 그 기운이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그리고 데스튼의 신관들은 그 기운

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운이 가장 강렬히 남아있는 한군데의 장소를 지적

했고 내일은 바로 그 문제의 장소를 집중적으로 수색하기로 결정을  내

렸다. 오늘은 그 동안 오랜 여행과, 휴식도 없이 이어진 수색으로  인해

피로가 상당히 쌓여있어 더 이상 일을 진행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러나 애초에 데스튼의 대신전에서부터 이곳 파울드까지 이동해  왔으면

서 바로 수색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엄청난 체력이었다. 아니,  정신

력이었다. 그들이 언제나 자신의 몸을 갈고  닦으며 체력, 검술, 신성마

법들을 죽어라 습득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이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온 것이라고나

할까.

"어제 하루동안 시청으로 시민들의 항의가 100여건도 넘게 들어왔습니

다."

"데스튼의 신관들이 너무 마음대로 도시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 같습

니다...... 물론 해를 끼친 것은 아니지만.... 허락도 없이 가정집을 마음대

로 들어가기도 하고...."

다음날, 나이트길드의 정보원들이 알려온 사실은  대부분 간부들의 신

경을 상당히 거슬리는 것이었다. 어제는 특히  나이트길드의 숨은 본거

지인 세피로이스에도 두 명의 신관이 무단으로 들어와서는 다른 손님들

이 묶고 있는 방을 마음대로 열고 들락거린 것이었다. 다행이 크라다겜

이 묵고 있던 방은 에리나가  정령마법을 운용하여 남아있는 기운들을

서로 상쇄시켰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는 듯 했다.

"물론 크라다겜은 마족이지만, 결코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데,

왜 이 난리를 부리는지 모르겠어."

루디와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있던 킬츠는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세피로이스의 식당에 아침 메뉴로 나온 쿨드의 등심정식이

킬츠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아주 먹기 좋게 갈기갈기 찢어졌다.

"데스튼의 뜻은, 오직 이 지상예의 운명은 지상계의 생명들에 의해 결

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야. 그러나 크라다겜 씨가  아무리 인간에게 피해

를 입히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용납이 안 되는 것이지."

"그런 어거지가 어딨어. 그럴 거면 신도 이  지상계에 참견하면 안 되

는 것 아니야?"

"내가 생각해도 그래. 사실 마족이  사는 마계, 신이 존재하는  천계와

마력의 근원인 이계, 거기에 또 껴줘서 환수들이 살고 있다는 환계까지,

모두 이 생명이 살고있는 지상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말

이야. 애초에 마계라는 존재가 생명의 마이너스  감정과 욕망들을 유발

시키기 때문에, 서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지. 생명에게,

특히 인간에게 욕망이란 게 없다면  어떻게 이 세상이 지탱될 수  있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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