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31화 (131/166)

제 9장 -무엇을 위하여- (14)

"제길!"

카젯은 이를 악물며 그 대규모의 군사집단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그가

클라스라인 최고의 검술을 갖춘 전 패러딘 나이트라 할지라도 저  엄청

난 숫자의 군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긴박한 순간에서도 결코 세렌의  눈동자에 담긴 뚜렷한 의

지는 변하지 않았다.

"잠깐, 크루세이더들의 뒤쪽에 뭔가  대열이 갈라지는데? 말  한 필이

달려오고 있다."

그때 그들 중에서 가장 눈이 좋고키가 큰 루벨이 적들 사이에서 일어

나는 미세한 변화를 놓이지 않고 간파해 내었다.  후 열이 돌진하는 한

필의 말에 의해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 여자가 타고 있다. 아무래도 미네아 공주 님 같군."

그리고 연이어 나온 루벨의 말은 벼락이 되어 세렌의 머리를 강타하며

지나갔다. 나머지 네 명의 얼굴에도 감출 수  없는 놀람의 빛이 떠올랐

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세렌에게  달려오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공주가 자신의 나라를 버리면서 까지.

"비켜줘요. 기다려요! 난, 난 저기로 가야해요!"

갑자기 혼란해진 크루세이더들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세렌은 미네아 공

주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긴박한, 그리고 확고한 의지에

가득 차있는 바로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자, 잠깐 공주님 아니십니까!"

"붙잡아! 미네아 공주님이다! 탈옥범들에게 가게 해서는 안돼!"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런 일이라 상황판단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고  있

던 크루세이더들이었으나, 미네아가 거의 그들의 선두까지 헤치며 달려

오자, 일단 그들을 지휘하던 패러딘 나이트의  명령으로 그녀는 붙잡히

고 말았다.

"까악! 놔줘요!"

"공주 님! 왜 이러십니까! 어서 성으로 돌아가세요!"

"놔줘요! 난 어서 저들에게도, 세렌에게로 가야해요!"

결국 붙잡힌 그녀는 심하게 반항하며 자신을 붙잡고 있는 패러딘 나이

트를 마구 밀쳐내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녀를 붙잡고 있는 나이

트의 억센 팔에 힘이 풀릴 리는 없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어서 놔주지 못해!"

그때, 멈춰있던 천 여명의 크루세이더들의  웅성거림은 단숨에 압도하

는강렬한 외침이 들려왔다. 순식간에 그들은 전부 조용해지며 바로 그

외침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세, 세렌!"

"검을 빌리겠다. 펠린."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세렌이었다. 주변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

도의 격렬한 외침이었다. 자신의 의지가 가득 담긴, 타인을 압도하는 위

력적인 목소리였다.

"너의 그 더러운 손을 놓아라 클라스라인의 하수인. 레이디의 비할 바

없는 아름다운 피부가 상한다."

"뭐, 뭣?"

"덤벼라, 하찮은 너의 임무로써 한 인간의 천금보다 고귀한 결심을막

을 수 없다."

세렌은 그 패러딘 나이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상대가 누구이던 간에  그대로 밀어버릴 기세로 달려오던

크루세이더들의 움직임은, 그런 세렌의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너, 넌 누구냐!"

당황한 패러딘 나이트는 미네아 공주를 옆에 있던 크루세이더에게  맡

기며 세렌을 노려보았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언행이었으나, 그에겐  그

럴만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난, 세렌. 세렌 마틴스. 패러딘 나이트이다.하지만 지금부터  난 세렌

그란드라다. 패러딘 나이트라는 직위는 내가 버리겠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신의 전의가 위축되어 옴을 느끼던 패러딘

나이트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하며 재빨리 자신의 휴페

리온을 꺼내 들었다.

"나, 난 패러딘나이트 NO47 나이트 루켄! 라프나의 이름을 걸고 패러

딘 나이트의 검을 세운다!"

나이트 루켄은 좀 전에 미네아 공주를 붙잡기 위해서 말에서 내린 상태

였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세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검에서  뿜어

나오는예기가 범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선 역시 패러딘 나이트에  손색

이 가지 않는 뛰어난 실력을 갖춘 듯 했다.

"세워라. 그리고 죽어라!"

세렌은 가볍게 소리치며 달려드는  나이트 루켄에게 펠린에게서  빌린

롱소드를 치켜세웠다.

검의 성능, 몸 상태, 방어도구, 그 무엇을 보아도 세렌의 절대적인 열세

였다. 게다가 세렌의 몸  상태는 보통 사람이라면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몰튼 후작은 세렌의 식사에 치

사량을 능가할 정도의 마취약을 넣은 듯 했다.

나이트 루켄의 검이 달려드는 기세를  받아 엄청난 힘을 실어  세렌을

향해 대각선으로 베어졌다. 정교하고 빠른, 그리고 힘있는 균형 잡힌 솜

씨였다. 지금의 세렌이 상대하기엔 너무나도 강력할 정도로.

그러나 세렌은 세워든 롱소드를 가볍게 옆으로 기울이며 루켄의  검을

막아내었다. 검과 검이 서로 부딪치기 전에 벌어진 아주 미묘한 변화였

다. 그러나 이 변화로 인해,  나이트 루켄은 자신의 휴페리온이  세렌의

몸을 비껴나며 옆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그 강한 기세와

힘은 어느새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리고, 힘없이 비껴나가는 것이었다.

"잘 가라 나이트 루켄."

그와 동시에 평소답지 않은 말투로 작게 중얼거리며 세렌은 검을 옆으

로 비껴들며 그대로 스치듯 루켄의 옆을 지나가  버렸다. 그 순간 세렌

이 얼마나 정교하게, 그리고 얼마나 세련되게 검을 휘둘렀는지는,  그곳

에 있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커, 커억... 어떻게....."

그리고 나이트 루켄은 옆구리에서 피를 쏟으며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서 쓰러져 버렸다. 허무한 일말의 신음소리를 남기며.

그리고 세렌은 쓰러지는 루켄에겐 전혀 관심도  주지 않고, 그대로 크

루세이더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한 청년이

평범한 롱소드 한 자루로 패러딘나이트를 죽음에 몰아넣은 이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 크루세이더들은 거이 미동도 하지 못하고 다가오는 세렌

을 그저 경악의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레이디의 몸에서 손을 떼어라."

그리고 미네아 공주를 잡고있던 크루세이더에게  다가간 세렌은 작고,

낮은 톤의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그 크루세이더는 마치

유령의 목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기겁을  하며 미네아를 잡고있던 손을

황급히 놓아버렸다.

"세렌......."

"믿고 있었습니다. 레이디."

"절보고....... 레이디라고 그러셨나요."

"네. 레이디. 이젠 프린세스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세렌은 가볍게 미네아의 손에 입을 맞추며 그녀가 타고 온 말에  함께

올라탔다. 그리고는 유유히 자신들의 동료가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갔고,

곧 그들은 성문을 빠져나가며 짙은  어둠 속에 잠긴 성밖의 어딘  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 서있던 크루세이더들은 후속대가  도착할 때까지, 그곳

에서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얼어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9장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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