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30화 (130/166)

제 9장 -무엇을 위하여- (13)

클라스라인의 수도, 세인트룸은 지금 한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불이 환하게 켜지어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밤

늦게까지 문을 열고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연출하는 광경이 아니었다.

모두 클라스라인의 병사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번엔 화이트 나이트가 없군! 일반 병사만 10여명?"

또다시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소규모의 집단들을 바라보며,

선두에서 말을 달리고 있던 카젯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클라

스라인이란 대국의 수도답게 곳곳마다 상비된 병사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게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전부 하나로 모여 동시에 막아서지 않

는 한, 결코 카젯을 선두로 한 패러딘  나이트 일행을 저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 막자! 저들은 탈옥자와 그의 동료들이다!"

"그래? 어디한번 막아보시지."

순간적으로 말 위에 있는 카젯의 검이 좌우로 휘둘러지며 순식간에 두

명의 병사들의 흉부가 가로로 잘라져 버렸다. 아마도 심장이 반으로 잘

린 듯, 갈라진 단면에선 마치 폭발하듯 피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가슴

을 보호하고 있던 갑옷은 카젯의 검 앞에선 젓 먹이처럼 무력했다.

"검이 안 좋아서 벌써 이가 빠지는 것  같아. 아무래도 날이 매끄럽게

들어가지 않거든?"

두 명의 살생함을 나머지 모든 병사들의 사기를 완전히 꺽어버린 카젯

은 유유히 그들의 사이를 지나가면서 피에 젖은 롱소드의 검날  부분을

자신의 소매로 가볍게 닦아내었다. 평범한 롱소드를 가지고 벌써 두 자

릿수가 넘는 적들의 갑옷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으니, 날이 상하지 않

고서는 도저히 배기지 못했다. 최고급의 강철로  클라스라인 최고의 대

장장이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휴페리온과는 격이  틀린 것이었다.

휴페리온은 전장에서 세 자릿수의 적들을 갑옷 째 베어버려도 결코  날

하나 빠지지 않는 명검이었다.

"휴페리온 쓰다가 이거 쓰니까 정말 못쓰겠어."

"글세, 북부 자치도시 연합에 실력 좋은 대장장이가 있다면 새로 검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좋을 텐데. 그래도 휴페리온만 못하겠지만 말이야."

카젯의 불평에 펠린도 동감하며 보통 롱소드가 얼마나 약한  무기인지

새삼 깨 달케 되었다. 거의 소모품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클라스라인의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없는 것인지, 아니면 목숨이 아까워서 감히 모습을 드러

내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

아서 서쪽 성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이다! 루벨! 키사르!"

카젯은 환호성을 지르며 성문을 향해 소리쳤다. 그곳에는 몸집이 극히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왔구나. 시간 안에 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성문을 제압하고 세렌 구출조를 기다리고 있던 키사르는 비록  표정의

변화는 없다 하더라도,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 성에서 출

발한 크루세이더들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서쪽 성문에 도착한 것이다.

"자, 이제 어서 나가자. 벌써 법왕청에서 보낸 크루세이더 선발대가 근

처까지 육박해 왔다. 미리미리 도망가두지 않으면  추격 당할 가능성이

높아."

키사르의 말에, 한자리에 모인 그들은 전부 동감의 뜻을 나타내며,  미

리 열어둔 성문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카젯  일행이 달려온 그 대로

로 크루세이더들의 함성과 기세가 느껴지고 있었다. 일반 보초병들과는

달리, 정규 훈련을 받은 크루세이더들은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

에 지금의 그들에겐, 극히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게다가 선발대의  숫자

만 해도 그들의 200배에 육박했다.

"자, 잠... 깐."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일행의 출발을 저지하고 나섰다. 힘없고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그 중에서 누구보다 영향력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세렌! 깨어났구나!"

자신의 등에 묶어놓은 세렌이 정신을 차리자 펠린은 기뻐하며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세렌은  땀 투성이 에 안색이  창백하여 상태가

무척 안 좋아 보였지만,  힘겹게 뜨고있는 두 눈동자는  결코 죽어있지

않았다.

"기, 기다려야.... 기다려야해."

"뭐? 기다린다고? 누굴?"

펠린은 깜짝 놀라며 세렌에게 물었다. 지금  모든 일행이 그곳에 전부

모여있었으며 다운크람의 가족들은 이미 성밖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들을 기다리며 대기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기다릴 사람은 펠

린의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야..... 약속했어. 기다리기로. 반드시 올 꺼야...... 그녀는...."

"그녀?"

"그래.... 미... 미네아 공주........"

"미네아 공주라고!"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세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들 사람들은 경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네아는 명실상부한 이 나라의 공주가 아니던가.  그런

데 그런 그녀가 아무리 세렌과 친분이 기로 서니 나라를 버리고 도주하

는 반 클라스라인 집단을 찾아온다는 말인가?

"그건 말도 안돼! 어째서 미네아 공주가 우리를  쫓아 이 나라를 빠져

나간다는 거야! 미네아 공주는 그야말로 이 나라의 공주라고!"

펠린은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흥분하며 소리쳤고 옆에서 지켜보던  다

운크람도 고개를 저으며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무엇을 위해 우리와 동행을 하겠는가, 아무리 세렌, 자네와 모

종의 친분이 있다고 해도, 그녀는 결국 클라스라인의 왕족, 결코 클라스

라인을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는 지하감옥으로 찾아왔어. 그녀는.... 반드시 현명한 선

택을 할 꺼야. 믿을 수 있어. 그녀는... 그녀는 이런 미래가 없는 나라에

서 공주라는 이름아래  천천히 썩어갈 인간이 아니야...... 감옥에서 그녀

를 보며..... 난, 난 확신할 수  있었어.... 비록 먹을 것 하나고  가져오지

않아서 좀 아쉬웠지만......."

"이,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는 거야!"

"너는 그렇게 믿고 싶겠지만, 지금은 빨리 성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곤

란하다. 혹시 그녀가 뒤늦게 이 사대를 알고 찾아온다 하더라도, 크루세

이더의 선발대가 이곳으로 도착한 뒤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카젯과 키사르가 동시에 말하며 세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렌의 얼

굴은 확고했다. 그는 자신과 펠린을 묶은 겉옷을 풀어서는 말에서 내리

더니, 지금까지 그가 펠린의 뒤에서 달려온 그 대로를, 그리고 그  대로

의 저 멀리에 보이는 법왕청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

다.

"너희 덕분에 내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듯이..... 지금 그녀에겐 우리가

있어야 진정한 존재의 가치를 가질 수..... 느낄 수 있게 된다."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으니까,  지금은 일단 기절시켜버리고 데려가면

안 될까?"

카젯이 옆에 있던 루벨에게 귓속말로 중얼거렸으나 루벨은 고개를  가

로 저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몸 상태는 안 좋을지 모르지만..... 정신은 제대로 인 것 같아. 좀 감상

적으로 말을 하고는 있지만.......  지금은 세렌을, 그리고 그가  믿고있는

미네아 공주를 믿는 수밖에."

"아니, 루벨! 그러면 어떡해!"

펠린도 말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흥분하여 소리쳤으나 일단 루벨의

생각은 세렌을 믿는 것이었다. 결코 세렌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뭐, 하는 수 없지. 기다리는 수밖에."

"크루세이더들은 일반적으론 보병이기 때문에, 조금은 늦어도 큰 문제

는 없을 꺼다."

"아앗! 다운크람! 키사르! 우리 중에 제일 격식 있고  상식적인 너희마

저 이러면 어쩌라는 거야!"

펠린은 소리치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시  세렌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그들이 상식적이고, 판단력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다운크람이 개인

적으로 얼마나 세렌을 믿고 있는지. 그리고 키사르 역시 지금의 세렌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그리

고 펠린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뭐라고 말을 꺼낼 수는 없

었다.

"아.... 저기, 보인다."

그러나 그런 펠린의 눈에, 서쪽 성문으로  통하는 대로를 가득 메워서

는 달려오고 있는 천 여명의 크루세이더의 모습이 들어왔다. 게다가 그

들을 지휘하고 있는 저 어둠 속에서도 약간의 불빛으로 눈부신  섬광을

발하는 갑옷. 바로 패러딘 나이트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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