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29화 (129/166)

제 9장 -무엇을 위하여- (12)

그때 주위로 둘러놓은 횃불의 불빛에 카젯의 얼굴이 자세하게  드러났

다. 평범하고 가벼운 검은 색  계통의 옷에, 패러딘 나이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휴페리온조차  들고있지는 않았지만, 그 피에  젖은 얼굴은

전장에서 수많은 적들을 죽음으로 불러 넣은,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는

빛의 휴페리온이라 불릴 정도로 빠른 검술을 자랑하는 인물, 그것은 그

들이 익히 알고있는 카젯의 얼굴이었다.

"패, 패러딘 나이트다!"

그 사실을 알았다는 순간부터, 20여명의 클라스라인군은 그 전의를 완

전히 상실해 버렸다. 누군가가 감옥 안의  죄수를 탈옥시키고 도주중이

라는 긴박한 소식을 듣고 재빨리 무장을 갖춰 그들의 앞을 막아 선 것

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도주중인 인물들이  전부 패러딘 나이트인

것이었다. 일반 평민들이나 병사들 사이에선 거의  절대적인 존경과 지

지를 얻고있는 패러딘 나이트. 일단 세렌에게 당한 두 명의 화이트나이

트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의  화이트나이트들은 충격을 먹으면서도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지만, 20여명의 병사들은 그대로  걸음아 나 살려

라, 뿔뿔이 흩어져서는 도망치지 시작했다.

"패러딘 나이트를 상대할 수는 없어!"

"죽음을 당할 뿐이야!"

"그들은 일당백의 무적의 기사들인데!"

패러딘 나이트를 생각함에, 거의 신앙에 가까운 그들의 정신상태를 여

실히 보여주는 모습에, 다운크람은 그만 실소를 금치 못했다. 만약 모든

패러딘 나이트들이 일당백의 무적 기사들이라면, 애초에  백 명의 패러

딘나이트만 준비한다면 1만의 병력과도 같은  존재라는 계산이었다. 만

약 카젯이라 루벨 같은 인간만 백 명 모였다면 모를까...............

어찌되었든, 그들의 숫자는 서로  4대 4. 동점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전 패러딘 나이트 측에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가 한 명 껴있기는

했지만, 이미 그 숫자의 차이가 승리를 가져다주기엔 그들 사이에 있는

실력이라는 이름의 절벽이 너무나도 깊었다.

"화, 화이트 나이트에게 영광 있으라!"

그러나 화이트 나이트도 일단 클라스라인의 주력 기사단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용기와  실력을 발동하여 동시

에 카젯을 향해 뛰어들었다.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상대해 보겠다는 계

산에서였다. 그러나 그 계산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상대하려

는 사람은 명실상부 클라스라인 최고의 실력을 갖춘 자랑스런 '전' 패러

딘 나이트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단 그들은 아무리 용기를 내고 있

다 하지만, 심리적으론 이미 엄청난 공포와  불안감에 시달리는 형편이

었다.

"그래도... 이제 나는 '라프나의 이름을 걸고 패러딘 나이트의  검을 세

운다!'라는 기합을 터뜨려 줄 수는 없지......."

그러나 이미 카젯이 타고있는 말은 가속도를 내고있었고 그의 피에 물

든 롱소드는 화이트나이트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일단 전열에서 휘

두르는 두 개의 창을 가볍게  막아낸 다음에 그중 누구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는 것은 카젯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로  카젯의 선택이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고작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을 더  산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적 전열에  있는 두 명의 화이트나

이트의 가슴을 노린 카젯의 두 번의 찌르기 는 순서에 관계없이 동시에

찔러나갔다고 착각할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크으윽..........."

그들은 다행이 자신들이 갑옷으로 완전 무장을 하고있다는 이유  때문

에 고통의 비명은 질러보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전에 카젯에게

당한 병사나 암살자들은 단숨에 목이나 허리가 절단 되 버려서 그런 사

치스런 비명도 질러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너, 너무 빨라.............."

나머지 두 명의 패러딘 나이트들은 더  큰 공포에 빠져들었고, 그것은

그들의 움직임을 더욱 둔하게 만드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않았다. 구중

한 명은 곧바로 이어진 카젯의 연속공격을 단 세 번도 막아내지 못하고

는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반대쪽 허리에 이르는 깊은 상처를 입으며  말

에서 굴러 떨어져 내렸고, 나머지 한 명은  급히 달려온 다운크람의 검

에 의해 허리에 좌우로 구멍이 뚫려 버렸다. 카젯에게만 신경 쓰다보니,

옆에서 달려오는 다운크람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화이트 나이트의 실력이 이 정도는 아닐텐데......"

"지레 겁먹고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자 다시  출발하자. 뒤

쪽에서 언제 크루세이더로 이루어진 추격  병이 쫓아올지 모르는 일이

다."

카젯이 땅에 떨어지거나, 말 위에서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 여섯 구의

시체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자 다운크람은 매정하게 한마디하며  다시

말을 몰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길로 쭉  지나가면 바로 서쪽 성문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미리 키사르와  루벨이 제압하여 점

거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래. 어서 가자. 지금  세렌의 상태도 정확히 알  수 없고..... 이대로

계속 놔두면 위험한 것일지도 몰라."

펠린도 말을 달리며 자신의 등에 묶여있는 세렌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미미하게 들썩이는 그의 가슴으로 봐서는 아직 생명에 지장은 없는  것

같지만, 그것도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빨리 안전한 곳으로 가

서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극히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최악의  사

태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애써 세렌을 구해온 의미가 사라

지는 것이다.

"지하감옥에서 죄수가 탈옥! 탈옥했다!"

"지금 수십 명의 병사들을 살해하고는 서쪽 성문으로 도주중이다!"

"어서어서 출발해! 준비가 끝난 제 3부대의 크루세이더들은 벌써 출동

했다! 나머지도 어서 대기해!"

현재 법왕청의 크루세이더 대기 창구는 급격한 소란스러움과 혼란함이

한데 뒤섞여 엄청난 소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대장들이 병사들을 부르

는 소리. 갑옷끼리 부딪치는  소리. 병장기를 챙기는  소리..... 고작해야

탈옥자까지 합쳐 총 여섯  명의 일행을 잡기 위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바로 그 여섯 명의 신원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여섯 명 다

패러딘 나이트인 것이다.

물론 클라스라인의 군대가 탈주자 일행의 정확한 숫자와 상황을  파악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각지에서  들려오는 긴박한 보고, 즉  서쪽

성문이 완전 제압되었다는 사실과 지하감옥의 모든 병력이  몰살되었다

는 사실, 그리고 몰튼  후작의 직속부하라 사칭하는 몇  명의 사람들에

의해 대부분의 사실은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가

장 중요할 사실은 왠지는 모르지만  이 시간까지 잠도 자지 않고  있던

클라스라인의 재상, 몰튼 후작이 크루세이더 대치창구로 달려와서는 소

란을 피우며 큰소리로 명령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전부 동원하여 탈옥자와 그의  일행들을 반

드시 죽여야 한다! 반역자에겐 오직 죽음 뿐이야! 어서! 어서!"

그리고 이 소란은 금새 근처에 있는 법왕청과 몇 개의 별궁까지  들려

왔다. 특히 법왕청과 가까운 곳에 있는 두 번째 별궁, 즉 미네아 공주가

사용하는 별궁에는 그야말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의 끔직한 시끄러움

이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 이구나 어쩌지... 어쩐다지........"

세렌이 갇혀 있었던 지하감옥을  다녀온 후로, 제대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구간을 서성거리던 미네아 공주였다. 그대  세렌이 했던 말의

의미는 자신과 함께 이 나라를 떠나자는  것이었다. 자신은 패러딘나이

트라는 직위를 버리고, 그녀는 공주라는 신분을 버리고서 말이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공주인 그녀의 장

래는 그야말로 황금빛의 비단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융단이 끝까지 깔

려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니었다. 모두  클라스

라인의 공주라는 이름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손에 준비되어진 길이었다.

그 길이 너무도 편하고 아름답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인

지,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미네아 공주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과연....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지 옳은 것일까.... 아니야. 이

미 옳은 길은 정해져 있어.... 나는 남이 만들어 놓은 길을 걸어서는  안

돼. 하지만.... 하지만......"

그녀는 마구간 안에 들어가 그녀의 아버지,  법왕을 졸라 얻은 최고의

혈통과 성능을 자랑한다는 세브리나라는 멋진  이름은 암말 앞에 서서

혼란한 자신의 마음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다.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말을 타고 서쪽 성문으로 가버린다면, 그녀는  무능하고

비정상적이지만 하나뿐인 아버지와, 역시 하나뿐인 친언니를 버리는 것

이었다. 그들은 현재 유일한 그녀의 가족......

"아아.... 더 더는 시간을 끌 수 없는데...... 이대로  라면 세렌은 가버릴

텐데.... 나를 두고  이 도시에서..  이 나라에서....  아.... 아아............

는...... 어찌해야....."

그녀의 손은 겨우 말안장 위에 놓여 있었다. 남 보기에 애처로운 정도

로 떨리는 손. 그리고 그 손이 움직임에  따라서 그녀의 운명은 결정되

었다. 그대로 힘없이 떨굴 것인가, 아니면 온 힘을 대해 안장을  부여잡

고 말 위에 올라 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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