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무엇을 위하여- (11)
"내가 생각해도 오늘의 나는 왠지 너무 신이 나있는 것 같아.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기분이 즐거우니....... 라프나의 교리대로라면 즉
각 처벌 감이네. 아니.......... 사람을 죽였으니 클라스라인의 형법상 사형
인가......."
카젯은 오늘따라 자신이 들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뭔가 극도로
자유스럽고, 날뛰고 싶다는 기분이랄까. 덕분에 평소엔 엄두도 내지 못
할 말들을 잘도 주절거렸다.
그는 순식간에 초소에서 자고있던 수십 명의 병사들을 몰살한 뒤, 지
하감옥의 입구에 버티고 서서 퇴로를 확보하며 지하로 들어간 펠린을
기다렸다. 키사르의 말 대로라면, 오늘은 새벽이 지나야만 교대인원이
지하감옥으로 오기 때문에, 현재의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깜깜하기 그지없는 밤하늘로 봐서는 시간이 아직 충분히 남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 이제 고향으로 가는 건가......"
카젯이 추억에 잠겨서는 중얼거리고 있을 무렵, 펠린은 한층 한층 마
다 계단을 지키고 있던 보초 병사들을 차례대로 쓰러뜨리며 신속하게
지하 5층을 향해 달려갔다. 지하감옥은 마치 예전에 최종 관문 제 1차
전을 연상시키는 완벽한 어둠이었으므로, 계단에 있는 횃불 하나를 들
고서 달리는 중이었다. 한 손엔 롱소드, 한 손엔 횃불을 들었지만 중간
마다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 무기를 집어드는 병사들을 상대하기엔 조금
도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하 5층까지 내려온 펠린은 재빨리 5층 왼쪽 구석으로
제일 끝 쪽에 있는 세렌이 갇힌 감옥으로 달려갔다. 각 층을 지키던 병
사들 중 누군가가, 혹은 1층의 어디 엔 가 있을 감옥 열쇠를 찾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일단 세렌의 감옥에 도착한 펠린은 자신이 들고있던
롱소드로 있는 힘껏 두꺼운 자물쇠를 가격했다. 쇠로 쇠를 벤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전장에서 수많은 적들의 무기와 방어도구를 파
괴해버린 경험이 있는 펠린이었다. 자물쇠는 단 일격만에 날카로운 쇳
소리를 내며 부서져 버렸고 펠린은 감옥의 쇠창살 사리에 나있는 작은
문을 힘차게 열어 제쳤다.
"세렌! 내가 왔어! 어서 탈출하자!"
그러나 펠린의 기대와는 달리,감옥 안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당황한 펠린은 자세히 감옥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렌!"
"페... 펠린?"
다행이 세렌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세렌은 반쯤 희미하게 감긴 눈
으로 그제서야 겨우 모기 만한 목소리로 작게 대답할 뿐이었다.
"세렌! 잠잘 시간 없어!"
펠린은 감옥 안으로 들어가서는 세렌을 마구 흔들며 일으켰다. 그러나
세렌의 상태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힘겹게 뜬 희미한
눈으로 펠린을 바라보며 무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음식..... 음식에..... 약이......."
"뭣! 음식에 약이 들어 있었다고!"
세렌이 그날 먹은 식사에 결코 좋은 목적으로 탄 것은 아닐 약이 들어
있던 것이었다. 다행이 극약은 아닌 것 같았으나 거의 심각한 마취상태
가 되어있는 듯 했다.
"맛이... 이상했는데....."
세렌은 어설프게 웃음을 지으며 거의 실신지경에 이르렀다. 거의 의식
이 사라진 상태로 몸을 가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앗...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펠린은 극히 당황하면서도 일단 세렌을 자신의 등에다 들쳐업고는 감
옥 안을 빠져나가, 다시 위층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감옥 안에서는
아무리 걱정해 봤자 별다른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
다.
그리고 막 1층에 도착한 펠린이 본 것은, 검은 옷과 복면을 쓰고는, 검
으로 완전 무장한 10여명의 괴인들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카젯의 모습
이었다.
"펠린! 이 녀석들, 세렌을 노렸던 거야! 예상대로 암살자를 보내려 했
어!"
펠린이 감옥에서 나온 것을 발견한 카젯은, 동시에 대여섯 명과 상대
하며 곤란을 겪는 와중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끝내 해버리고 말았다.
상황은 불에 보듯 뻔한 것이었다. 몰튼 후작은 그냥 암살 대를 보내는
걸로도 부족하여, 미리 마취약을 세렌이 먹는 식사에 타도록 지시한 것
이었다. 간수 장에겐 그저 푹 자는 약이라고 속이며, 결코 극약은 아니
라며 말이다.
"이런..... 지금 세렌은 약에 중독 되어 의식을 잃고 있어! 이 비겁한 놈
들!"
펠린은 들쳐업고 있던 세렌을 옆으로 내려놓고는 힘겨운 전투를 벌이
고 있는 카젯에게 합류했다. 복면을 쓴 괴인들은 결코 평범한 암살자는
아닌 듯, 빠르고 능숙한 실력을 보이며 이제는 두 명으로 불어난 패러
딘 나이트를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고 전투를 벌여갔다.
"흥! 전 방위에서 나를 포위했을 땐 별 뾰족 한 수가 없었지만, 내 등
뒤를 펠린이 지켜주는 이상, 너희들은 내 적수가 아니야!"
그러나 카젯은 기세 좋게 소리치며 본격적인 공격에 들어갔다. 사실
카젯의 검은 공격의 검이지 수비의 검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적이 그
를 포위하고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에 오직 수비에 치중하여 자신의 본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지만, 상황이 바뀐 이상, 상대가 다섯 명이건,
열 명이건, 자신의 앞에 있는 한 모두 공격의 대상인 것이었다. 진정한
카젯의 실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죽엇! 너희들에게 당할 정도로 나는 느리지 않다!"
카젯은 곧 고속으로 암살자들을 향해 달려들어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검술을 선보이며 암살자들을 도륙해 나갔다. 강력한 힘에,
그것을 능가하는 속도가 카젯의 검에 실려 있었으므로, 암살자들은 갑
자기 변한 카젯의 검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의 목
이 날아가고, 겨우 뒤에 있던 두 명의 암살자들이 협공하여 카젯을 공
격했으나, 카젯은 양쪽에서 날아오는 그 공격의 중심이 자신의 중심에
이르기 전에, 스치듯 두 개의 검 사이를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며 오른
쪽에서 공격해온 암살자의 허리를 자신의 롱소드로 절단 내 버렸다. 비
릿한 냄새의 피가 카젯의 후각을 자극하며 사방으로 흩날리며 퍼져나갔
다. 그리고 그를 공격한 나머지 한 명의 얼굴에 유일하게 드러나 있는
두 개의 눈동자에, 공포의 빛이 막 스쳐지나가려고 할 때 다시 카젯의
검은 그의 목과, 몸을 양단 해 놓으며 또 한번의 피의 샴페인을 터뜨렸
다. 마치 격렬히 흔든 샴페인의 뚜껑을 단숨에 딸 때, 터져 나오는 거품
처럼 그 암살자의 목에서 핏줄기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나의 생명을 노리는 자에게, 자비란 없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이 전투에 대해, 너무 했던 것은 아닐까 후회를
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썬 그런 상념을 가지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
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방금 전 두 명의 공격이 그의 양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그곳에 난 가늘고 긴 상처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이미 그것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카젯의 몸엔 지금까지 그가 도륙한
적들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피로 샤워를 했다 하더라도 결코 과장
된 표현이 아니었다.
펠린도 두어 명의 적들을 베어 쓰러뜨렸다. 나머지 암살자들의 숫자는
네 명. 그러나 익히 그 두 배의 숫자로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음을 절실
히 알고있던 그들은 패러딘나이트의 압도적인 강함을 온몸으로 뼈저리
게 느끼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카젯과 펠린은 그런 그들을
추격할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았다.
"자,어서 다운크람에게로 가자. 이젠 말을 타고 이 지긋지긋한 도시를
탈출하기만 하면 돼."
카젯은 한쪽 옷소매로 얼굴에 튄 피들을 닦아내며 감옥의 정문을 통과
하여 밖으로 달려나갔다. 펠린도 쓰러져있는 세렌을 다시 들쳐업고는
카젯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을 준비하고 대기중
인 다운크람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저 멀리 법왕청 쪽에서 불길한 종소
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성에 대기중인 크루세이더들의 출동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제길! 벌써 눈치 채버렸다!"
카젯은 으아악하고 비명소리까지 곁들이며 고개를 좌우로 마구 저었
다. 만약 성의 크루세이더들이 동원된다면 그들에게 결코 승산은 없었
다. 아무리 날고, 기는 패러딘 나이트라 해도 수천 명의 잘 훈련된 클라
스라인의 정규병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성에서 크루세이더들이 출동한 것 같다! 어서 말에 올라타!"
지하감옥에서 조금 떨어진 도심지의 골목에서 총 네 마리의 말을 대기
시켜놓고 있던 다운크람은 달려오는 카젯일행을 발견하고는 말들을 거
리로 몰아 내오며 빠른 도주를 재촉했다.
"세렌은 지금 말을 몰수 없는 상태야. 내가 뒤에 태우고 달릴 테니 말
한 마리는 버리자."
펠린은 세렌을 들쳐업은 채로 말 위에 올라타 것 옷을 벗어 세렌과 자
신을 하나로 묶었다. 두 사람을 태우고 빠른 속도를 내기는 힘들겠지만,
펠린의 뛰어난 기마술에 그 정도는 문젯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달리는 세 마리의 말과 네 명의 사람 앞에, 밤거리를 순찰 중
이던 수도 주둔 화이트 나이트들이 역시 도시에 대기 중이던 병사들과
연합해서는 나타났다. 말까지 완벽히 갖추고 있는 화이트나이트들의 숫
자는 총 여섯 명이었고, 병사들의 숫자든 대략 20여명이었다.
"적들이다! 숫자가 많아!"
다운크람은 약 천 세션쯤 앞에서 대기하고있는 그들 집단을 바라보며
긴장한 눈빛을 번득였다. 한쪽 손으로는 말의 고삐를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허리에 차고있던 롱소드를 가볍게 빼어 들었다. 패러딘 나이
트 전용 병기인 세인랜스가지는 아니더라도, 평범한 장창 한 자루만 있
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들에게 창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적이라..... 맞아 이젠 화이트나이트도적이지! 크루세이더도 적이고!"
새삼스러운 사실을 소리치며 카젯은 일행의 선두로 뛰쳐나왔다. 현재
즐거운 쾌감으로 극도의 흥분상태가 되어있는 카젯에게 그 정도 규모의
적들은 타오르는 전의를 가라 안칠 정도로 심각한 숫자가 아닌 것이었
다.
적들의 전열에 서있던 화이트 나이트 한 명이 그를 향해 먼저 창을 찔
러왔다. 그러나 그가 한번 창을 찔러들 때, 카젯의 검은 총 세 번의 움
직임을 끝낸 후였다. 한번은 찔러오는 화이트나이트의 창을 튕겨 낸 것
이었고, 두 번째는 그 화이트나이트의 갑옷 위 옆구리를 찌른 것이었으
며 세 번째는 다시 빼낸 검으로 미처 공격하지 못한 뒤에 있던 화이트
나이트의 가슴갑옷위로 검을 찔러 넣은 것이었다. 말의 이동하는 속도
에 전혀 뒤지지 않는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어엇! 다, 당신은 나, 나이트 카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