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무엇을 위하여- (10)
"하음... 졸려 죽겠네. 드라킬스도 군대를 철수시킨 이 마당에, 왜 우리
는 이 시간까지 성문이나 지키며 보초를 서야하는 거지?"
"내 말이 그 말이야. 집에 있는 푸근한 내 침대로 돌아가서 한숨 늘어
지게 자고 싶구먼....."
달도 뜨지 않은 한밤중, 약 20명 정도의 규모로 클라스라인의 수도, 세
인트룸의 서쪽 성벽을 지키고 있던 보초병들은, 각각 열 명씩 나누어서
한쪽은 성벽 위에, 한쪽은 성문 바로 앞에 서있었다. 현재는 드라킬스가
클라스라인과의 국경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기 때문에 그만큼 경비도 줄
어들어, 평소의 절반도 안 되는 숫자의 병사들이 한밤중에 불침번을 서
고 있었다.
"쳇, 이 시간에 누가 성으로 공격해 올 리도 없고......."
성문을 지키던 보초 한 명이 궁시렁 거리며 자꾸 불평을 해대었다. 그
러나 그들을 노리는 공격이, 성밖에는 없었지만, 성 안쪽에는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안 냐고...... 엥?"
그는 그렇게 혼자 떠벌거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옆에서 가끔 가다
자신의 말에 맞장구 쳐주던 동료 병사가 사라져 있음을 발견해 내었다.
그는 당황해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그 동료는 물론, 주위에
있어야할 예닐곱 명의 다른 병사들의 모습까지 보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버리고는 혼자라는 불안감에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며 성벽 위에
있는 동료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 이봐! 거기! 여기 있던 다른 녀석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어!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에... 엥?"
그는 갑자기 자신의 등뒤에서 들려오는 넉넉한 힘이 담긴 목소리에 소
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덩치가 산만한 남자 하나
가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띄우고는 그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자네도 곧 같은 지경에 처하게 될 테니 말이야."
그리고는 그 덩치가 산만한 남자, 즉 루벨의 거대한 주먹이 자신의 복
부에 박히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그 마지막 한 명의 경비병은 의식
을 잃고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버렸다.
"암습을 당할 수 있어서 다행인 줄 알아. 안 그랬으면 목숨을 잃어야
했을 테니...."
루벨은 기절해 버린 그 남자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다른 사람들처럼
양쪽 손발을 포박하고는 입에 재갈을 물려 경비 초소 안으로 던져버렸
다. 이미 그곳에는 아홉 명의 다른 경비병들이 같은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루벨, 루벨, 여기 이 녀석들도 데려가라."
그때 성벽 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루벨의 귀로 들려왔다. 바로 키
사르의 목소리였다. 이미 성벽 위도 키사르에 의해 제압이 끝나있는 것
이었다.
이로써 세인트룸의 동쪽 초소는 단 몇분만에 단 두 사람에게 의해서
완전 제압되어 버렸다. 안쪽 성벽에 매달려 있는 횃불들은 단 두 사람
의 그림자만을 만들기 위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는 끝났으니......... 이제 세렌만 구해오면 탈출 성공이군. 병력을
퇴각시켜준 드라킬스군에게 감사를 해야겠는데."
성벽 위에 있던 열 구의 기절한 병사들마저 전부 경비초소 안으로 던
져버린 루벨은, 혹시 그들이 깨어나 부비적 거리는 소리가 밖으로 새나
가지 않도록 초소의 문을 단단히 잠그며 가볍게 손을 털었다. 그리고
키사르는 성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시켜 놓았던 두 필의 말을 그
곳으로 가져오며 허리에 차고있던 롱소드를 꺼내어 들었다.
"이제부터 오는 병사들의 목숨을 보장해 줄 수 없다. 오는 즉시 빠르
게 처치해 버려야 해."
"뭐, 이젠 우리 나라 병사들도 아니니까. 상관없지 뭐."
루벨도 준비해온 자신의 롱소드를 꺼내며 가볍게 몇 번 휘둘러보았다.
좀 전까지 애용하던 휴페리온이라는 패러딘 나이트의 병기와 비교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가벼운 검이었다. 절반도 안 돼는 무게랄까. 보통 사
람들에겐 그 롱소드조차 힘에 겨워할 정도의 무게이긴 했지만, 그 동안
보통 대검보다 무겁고, 날이 넓은 휴페리온에 익숙해진 그들에게 상대
적으로 훨씬 가볍고 얇은 이 롱소드를 다루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모두들, 패러딘나이트의 상징은 집에 두고서 오늘밤의 파티에 참석하
고 있었다. 물론 패러딘나이트의 갑옷이나 검은 무겁기 그지없기 때문
에 재빠른 행동을 요구하는 이번 파티에서는 쓸모가 없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역시 이제는 더 이상 패러딘 나이트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
라고 할 수 있는 성격이 더 짙었다.
"이왕이면 롱소드보다는 바스타드 스워드를 준비할걸."
"아니, 너라면 능히 투핸드 스워드도 다룰 수도 있을 거다."
평화롭기 그지없던 세인트룸의 지하감옥. 그러나 일단 정문의 경비를
서던 네 명의 병사들이 비명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목이, 혹은 허리가
양단 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부터는 그곳에 피의 파티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메인 게스트는 물론 카젯과 펠린이었다.
"역시 빠르구나 카젯. 네 검은 클라스라인에서 가장 빠를 꺼야."
"뭘, 검이 가벼워져서 그런 거야. 그리고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검밖에 없으니... 아니, 내가 뭔 이상한 말을, 못들은 걸로 해줘 펠린.
이건 자꾸 다운크람이 옆에서 나를 세뇌시켰기 때문이야."
카젯은 엉겁결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을 취소하며 발자국 소리가 나
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감옥 안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감옥 안쪽의 본
건물의 경비를 서고있던 십 여명의 병사들이 들고있는 횃불이, 그의 눈
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엇?"
"어어어......."
"으윽....."
곧 가지각색의 신음소리가 정문과 본 건물의 사이에서 들려왔다. 실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재빠른 솜씨였다. 그리고 펠린은 지하 감옥 본
건물의 문으로 다가가, 살짝 문을 두드렸다.
"엥.... 왜 그래?"
몇 번을 두드리자, 잠시 후, 졸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한 병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이 짧은 순간동안에 밖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
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의심 없이 문을 열어줄 수 있었
다.
그러나 펠린은 그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리
문 바로 옆에서 대기 중이던 카젯이, 오직 피에 젖은 한 자루의 검으로
그의 목 한 가운데를 관통시키며 대신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펠린은 아무 말 없이 재빨리 감옥 안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카
젯은 그 자리에서 퇴로를 확보해 놓고, 미리 현장답사를 통해 감옥 안
의 지리를 알고있던 펠린이 세렌을 구출하기로 한 것이었다.
"빠른 시간 내에 돌아와야 해."
"바람처럼 세렌과 함께 돌아올 체니 걱정 마."
펠린은 카젯을 향해 가볍게 미소지은 다음 재빨리 지하로 내려가는 계
단을 행해 뛰어갔다. 그리고 카젯은 후환을 줄이기 위해서 1층에 있는
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의 초소를 기습해 들어갔다. 모두 여덟 개의 방이
있었는데, 방 하나에 대략 두세 명씩의 병사들이 잠들어 있었다. 한 방
을 처리하는데 단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카젯에게 그들을 일일이 결박
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