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무엇을 위하여- (9)
과연 자신의 아들이 중죄인을 탈출시키고, 이 나라를 도망치는 극악한
사건이 일어난다면, 아마 그 아버지에게 갈 피해도 물질 적으로 던, 정
신 적으로 던 막대한 수준에 이를 것이었다. 아마 아들의 죄를 대신하
여 감옥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재산은 몰수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 키사르에게 커다란 고통만 떠 맡겨 놓았지, 정작 그에 대한 책
임을 지지는 않았으므로 키사르 역시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다.
"역시 살벌한 키사른데. 나도 나중에 결혼해서 자식을 가지면, 좀 신경
써야겠어."
키사르의 말에, 카젯이 혀를 차며 장차 있을 후세에 대한 생각을 늘여
놓았다.
"카젯, 너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다."
"응? 왜지? 내 자식은 날 닮아 착할 것이기 때문에?"
"아니, 너의 자식은 키사르만큼 냉철하거나 머리가 똑똑하지 않을 테
니까 말이야."
"...................."
카젯의 얼굴이 막 분노로 일그러지려는 찰나, 다운크람은 재빨리 말을
바꾸며 그들이 모인 본 목적에 대해서 다시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세렌을 탈출시키고 나면 어떤 방법으로 도주할 거지?
북부 자치도시 연합으로 간다 하더라도 그 전에 세인트룸에서 경비대들
에게 잡혀버리면 끝장이지 않나."
"교활해 다운크람......"
"시끄러 카젯."
"그건 내가 생각해 두었다. 일단 세렌을 지하감옥에서 구해내기 전에
미리 대기중인 사람이 세인트룸의 서쪽 성문을 소란이 나지 않게 조용
히 제압해 놓아야해. 그리고 한 사람은 지하감옥 옆에서 미리 말을 대
기시키고 있다가 세렌을 구출하고 나오면 바로 말에 타서 제압해놓은
서 쪽 성문을 향해 달려야 하고, 서로간의 호흡이 잘 맞는다면, 아마도
힘들지 않게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에 보초를 서는 소규모의 경
비병들이야 우리의 힘으로 간단히 상대할 수 있고, 법왕청에 대기중인
대규모의 크루세이더들이 동원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므로 그전에
탈출해버리면 되는 거지."
"역시 키사르로군. 빈틈이 없는데?"
다운크람이 감탄하며 그의 계획을 칭찬했다. 그리고 이미 그의 말에
집중하던 카젯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감정을 폭발시키기 몇 초 전이었
는데 말이다.
그리하여 약간의 대화 끝에 서쪽 성문을 제압하는 것은 루벨과 키사르
가 맡기로 했고, 미리 말을 대기시켜 놓는 것은 다운크람이, 그리고 세
렌을 직접 구출해 내는 역할을 맡은 것은 카젯과 펠린이었다.
"역시 지하감옥으로 들어가는 인원이 두 명이라는 것은 부족한 숫자가
아닐까? 게다가 그 두 명중에 한 명은 카젯인데 말이다."
"다운크람! 내가 뭘 어쨌다고!"
"어쩐지 믿음이 안 가서 그렇다."
다운크람은 눈을 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일어나!"
"부족해도 별 수 없으니..... 이렇게 결정은 났고, 난 내 동생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러 가야겠다."
"동생들이.... 반대하지는 않을까?"
펠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방을 나서는 다운크람을 바라보았다. 확실
히, 미운 정이든 고운 정이든 자신들이 태어나서 평생을 살아온 이 도
시와 나라를 단지, 자신들의 맏형, 맏오빠의 친구가 위험하다는 이유 때
문에, 헌신짝 내버리듯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었다. 물론 자세히 따지고 보면 그들의 미래도 불투명하다는 것과, 몇
가지의 더 중요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은 일단 가정적인 미래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 이미 이 나라를 버릴 것에 대한 이야기는 동생들과
끝나있으니까. 난 지금 동생들에게 미리 성밖으로 도망쳐놓기 위해 마
차라던가, 그 밖의 여러 물건들을 준비해 놓으라고 말할 생각이다."
그러나 다운크람은 가벼운 어깨의 들썩임과 함께 그런 걱정은 필요 없
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다운크람의 동생들이어서, 옳은 것과 부조리
한 것에 대한 정확한 시아를 갖추고 있었는지, 이 나라를 떠날 것은 이
미 합의가 끝나있는 것이었다. 그는 키사르와는 달리 네 남매의 맏형으
로써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번 탈출로 인해 그들에게 피해
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으로 배려해야 했다.
"음, 그러고 보니까 내가 떠나면 내 양부가 무척 곤란해하겠군."
다운크람이 방을 나가자, 잠자코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며, 긍정의
표시만 하던 루벨이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현재 자신의 가문인 타
키노피아 가문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린 단지 그들 가문에 패러딘 나이트라는
명예를 가져다주기 위해서 온 것이지, 한 가정의 소중한 아들이 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잖아? 난 상관없어. 그들이 곤란을 격 건 말건......."
카젯이 가슴을 당당히 펴며 그에 대해선 문제없다는 듯, 가볍게 자신
의 생각을 말하였다. 오히려 지금 가려는 북부자치도시연합에 작고 허
름한, 아니 지금쯤은 돈 좀 벌어서 그 보단 더 큰 여관을 하고있을지
모르는 그의 친부모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카젯의 기억 속엔, 그의
어머니, 아버지가 자신의 자식을 처치하기 곤란해서, 이곳 귀족가문에
떠맡겼다는 기억은 없었다. 오히려 그날 밤에 부모님들이 그를 방으로
불러, 앞으로 카젯의 장래를 위해, 그 귀족 가문에 양자로 가는 게 좋겠
다는, 진정 자식이 잘되는 것 을 위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만을 느꼈
을 뿐이었다.
"그런데... 펠린도 상관없는 거야?"
푸근한 웃음을 짓던 아버지와, 언제나 바쁘게 여관 일을 하면서도 언
제나 저녁때면 비록 맛있는 것은 아니여도 항상 손수 만든 따뜻한 음식
을 한 상 가득 만들어 가족들에게 주었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카젯은 이곳 세인트룸에 친족이 살아있는 또 한 명의 동료를 바라보았
다.
"응, 내 아버지는 어차피 나를 자신의 친아들로 취급해 주지 않았으니
까...... 물론 내가 패러딘 나이트가 됐으니, 지금은 또 혹시 모르지
만........ 그건 너무 가식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해. 내게 필요한사람은 서
로를 어떤 목적에 의해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언제나 힘들 때 의지할 수 있으며 함께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야.
그래서, 난너희들이 좋아. 비록 나와는 피로써 이어져 있지 않지만, 원
한다면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며 도와줄 꺼야."
"그런가....... 펠린. 나도 마찬가지의 생각이다. 아니, 우리 모두도 너와
마찬가지의 생각일 것이다."
그곳에 있던 모두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이 펠린의 말을, 이런
감정적인 표현으로 받아 준 것은 다름 아닌 키사르였다. 평소에 주위사
람들에게, 얼음 마왕, 혹은 감정결핍의 장애자라고까지 불리던 키사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무척 신기한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의과거를 아는 다섯 명의, 현재는 세 명의 친구들은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키사르가 그런 말을 하다니, 뭐, 나도 마찬가지인 건 확실하지만 말이
야. 함께 있을 때 좋은 사람은 오직 너희들 뿐이야."
카젯도 고개를 끄덕이며 키사르의 말에 동조했다. 언제나 다운크람에
게 당하고만 사는 그였지만, 그래도 마냥 좋은 카젯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이런 계기를 만들어준 그 한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맞지 않는 부당한 대접을 받으며 감옥에 갇혀있는 거야 그걸 그
냥 보고 있을 수는 없지. 반드시, 구해내고 말겠어."
펠린은 다시 한번 목소리에 힘을 주며 그 한사람을 생각했다. 벌써 세
렌이 감옥에 들어간지도 한 달이 넘어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빛을 내
며 주위를 인도하는 세렌이, 고작 자신들의 추악한 탐욕에 의해 행동하
는 귀족들의 행동 때문에, 그 빛을 잃고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세
렌이 그 빛을 다시 찾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오직 그들 다섯 명의 손
에 달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