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무엇을 위하여- (8)
"그 말이.... 맞아. 그래서 하나의 개체로써 인간을 보게되면 인간에 빠
져들 수밖에 없는 것 같아. 그게 크라다겜 같은 마족이던지... 아니면 나
같은 인간이던지 말이야."
"나 같은 영원한 시간을 가진 되다 만 환수 같은 종족도 마찬가지이
다."
"음, 쥬크도 인간에게 빠진 거야?"
"물론이지. 난 예전에 안개의 숲에서 네가 보여준 그 행동에 큰 충격
을 받았던 것이다. 그 후로, 너라는 인간을 좀더 자세히, 좀더정확하게
알고 싶었기 때문에 이렇게 따라다니지 않는가."
쥬크는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킬츠의 몸에 자신의 얼굴을 부벼대었다.
"어어.... 떨어져!"
"걱정 마라, 떨어지면 내가 재빨리 구해줄 테니."
"그거 듬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떨어뜨리지는 말아 줘."
킬츠도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쥬크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최고
급의 실크와 견준다 하더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부드러
운 실리온 늑대의 털. 그저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가라앉으며 편안해
졌다. 그리고 그것은 만지는 쪽뿐만 아니라, 만져지는 쪽도 마찬가지였
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다행이 헛걸음하지는 않았군."
그때 성벽위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킬츠
에겐 둘도 없는 형이자 소중한 동료, 그리고 쥬크에게는 예의바른 인간
에 속하는 사람. 바로 루디의 목소리였다.
"어? 루디형이 웬 일이야?"
"너 찾으려고 방으로 갔는데..... 아무도 없기에, 혹시나 하고 이곳에 와
봤지."
루디는 역시 뉴린젤의 문제를 거론하며 킬츠에게 성 방위 사령관의직
권(?)으로 다음에 있은 영토 수복 전투에서 뉴린젤을 어떻게든 제외시
켰으면 하는 의견을 말하였다. 루디의 생각으론 아버지가 딸을 죽이던
지, 아니면 딸이 아버지를 죽이던지 둘 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
었다.
"하지만 루디형, 그렇게 되면 뉴린젤은 평생 그것을 한으로 생각할지
도 몰라.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모든 결정은 뉴린젤에게 맡기
기로 했어, 그녀가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던지, 아니면 결국 원한
을 갚고는 그 뒤에 있을 더 큰 고통을 견뎌내던지.... 전부 그녀가판단
해서, 결정해야할 일이야."
"하지만 그녀는 지금 파리퀸과 겨루어서 원한을 갚겠다는 생각밖에 머
릿속에 들어있지 않아.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는데 말이야. 예를 들
어....... 음, 그녀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보통 여자가 되어 행복하고 평
범한 생활을 한 다던지 하면 더 큰 복수가 될 텐데....... 서로 목숨을 잃
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루디가 극히 평범한, 그러나 정말로 훌륭한 예를 들며 안타까운 신음
소리를 내었다. 킬츠는 생각했다. 평범한 여자라...... 지금까지 킬츠가 만
나본 여자들은 전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그래서 인지, 사실은
지금의 뉴린젤의 모습도 그다지 특이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었다.
장님에, 소울아이를 가지고 남들과는 다른 세계를 보고 있던 카름, 현재
스피리스트에서의 수련을 마치고 당당히 정령사가 된 에리나, 공포의
정령을 정신 속에 간직하고 슬픈 인생을 살고있던 이트라이......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 의해 철저히 전사로써 키워져 감정을 나타낼지 모르
는, 뉴린젤......
'아니, 뉴린젤은 감정을 나타낼 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익숙하지
않은 것일 뿐......'
늦은 저녁, 앞으로 있을 일을 대비하여, 마른 식량과 생필품 등을 두
손 가득히 사 가지고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허름한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온 다운크람은, 어둑어둑한 정원 한편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희미
하게 늘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물건을 내려놓고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고, 다운크람은
다시 내려놓은 물건들을 집어들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키사르, 자네 군, 그렇게 가만히 서있으니까 마치 유령 같잖아."
"오랜만이다 다운크람, 하지만 지금은 이런 말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일단 다른 사람들을 불러주지 않겠나? 난 지금 원래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니,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다."
역시 무표정의 대가인 키사르는, 동료와 오랜만의 재회의 기쁨을 나누
기보다는 현재 그들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문제를 보다 빨리 해결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집안에 시종들은 모두 해고한 후였기 때문에, 다운크람은 그의 동생들
을 시켜 현재 그자리에 모이니 않은 세 명의 다른 동료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곧 다운크람의 저택에 세 명의 근신중인 패러딘 나이트들이 모여들었
고, 그들은 곧 저택 가장 안쪽의 테이블이 있는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
겼다.
"일단 현재의 상황부터 이야기하겠다. 세렌은 드라킬스 영토를 공격하
던 도중 퇴각해온 클라스라인군의 책임을 지고 지하감옥에 감금당한 상
태다. 그리고 앞으로 약 사흘 뒤에 법왕청에서 재판이 열릴 예정이지."
"재판?"
"그래 재판이다. 그리고 세렌이 가진 죄명은 항명죄. 그것은 곧 반역죄
에 버금가는 강력한 중죄로써 십중팔구 사형 아니면 무기 징역이다. 이
미 패러딘 나이트가 신전기사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무기징역이
될 가능성이 높지."
"그럼 어떻하지?"
카젯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키사르는 무심한, 그러나 결단을
촉구하는 눈으로 그 자리에 모인 다른 네 명을 바라보았다.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세렌을 구해낼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
가 이 클라스라인의 패러딘 나이트가 되는 것을 포기한다면, 비합법적
인 방법을 사용해서 세렌을 구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미 이런 썩을 대로 썩은 나라의 이름뿐인 지위 따위는 필요 없다.
나중에 빼앗기기 전에 지금 미련 없이 내 던져 버리는 것이 보기에도
더 좋지."
키사르의 말에, 다운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는 클라스라인과
작별을 결심, 그에 따른 여행에 필요한 물품까지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
었다.
"모두 마찬가지의 생각인가?"
"물론이야."
"당연하지."
"생각하고 자시고도 없지."
펠린과 루벨, 카젯이 차례대로 대답하자, 키사르는 평소의 무표정한 얼
굴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희미한 기쁨의 표정을 떠올리며,
본격적인 작전의 설명에 들어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렌이 감금되어 있는 지하감옥을 기습하여
빠른 시간 내에 이 세인트룸을 빠져나가 해외로 도피하는 것이다."
"해외? 어디?"
"현재로써 갈 수 있는 곳은 세디아 황국과 드라킬스 공국, 그리고 북
부 자치도시 연합이다. 드라킬스는 내란이 일어나 병력을 철수시킨다는
정보가 있으니, 우리를 받아 줄지는 정확하지 않다. 세디아 황국은 원래
부터 무척 폐쇄적인 나라라서 제외하고, 결국 북부 자치도시 연합밖에
없다는 것인데. 사실, 이곳에 바로 우리 같은 기사들의 집단인 나이트
길드가 있는 것 같다."
"나이트 길드?"
키사르의 입에서 추방된 기사들의 집단인 나이트 길드의 이름이 거론
되자 카젯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되물어 왔다.
"나이트 길드에 대한 세세한 정보는 정확히 확인된 바 없지만, 일단
신원이 확실하고 본인의 의사가 있으면 나이트길드의 인원이 되는 것은
간단하다고 하니 그쪽으로 간다면 확실히 받아 줄 것이다. 사실은 나이
트 길드가 북부 자치도시연합을 뒤에서 돕고 있다는 정보도 있으니 우
리가 활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지금 키사르가 하고 있는 말은 나이트 길드의 극비 정보들이었다. 길
드 내에서도 정보의 유출을 극히 제한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것을
알아낸 키사르의 능력은 실로 경탄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게 얼마나 중
요한 정보인지 알 수 없었던 나머지 네 사람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세렌의 구출은 내일 자정 넘어서 시작한다. 그때까지는 모든 준비를
마쳐놓아야 된다. 나머지는 그냥 빠져나가도 상관없지만, 다운크람은 미
리 가족들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신시켜 놓아라. 나중에 합
류할 수 있도록."
"알았다. 하지만 너는? 너의 아버지도 이 수도에 있지 않나."
키사르의 배려에 다운크람은 속으로 감탄하며 역시 키사르에게도 공통
으로 적용되는 문제를 말했다.
"내 아버지는 나와는 상관없다. 내가 그의 목숨을 책임질 필요도, 의무
도 없다. 그에게는 단지 자신의 쾌락과 유희만이 있을 뿐. 내가 패러딘
나이트가 되어 받은 재물로 그 동안 더욱 큰 사치를 누렸을 테니, 더
이상 관여할 필요는 없지."
무서울 정도로 매정한 키사르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오직
한 명뿐인 키사르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했는지 모두들 알고 있
었기 때문에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자초
한 결과이므로, 책임은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