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24화 (124/166)

제 9장 -무엇을 위하여- (7)

세렌의 말이 끝나자, 미네아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잠시 세렌의 말에

담겨있는 진실을 파악하는데 온 정신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

해봐도, 세렌이 말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정말...... 그런 방법이 있군요. 좀 파격적이긴 하지만."

"모두 공주 님의 판단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강요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강요라니, 어떤 쪽을 위해서 강요한다는 말이지요?"

세렌의 절묘한 말솜씨를 지켜보며, 미네아 공주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잘.... 알았어요. 생각 해보지요."

"전 단지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드린 것입니다."

"물론 이예요. 잘 알겠어요. 그럼..... 부디  당신의 뜻이 이뤄지는 날까

지, 몸 건강히 지내시길 바라겠습니다."

"공주 님도, 성에 더러운 기생충들이 우글거린다고 청결을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어머, 세렌 님도 그런 말씀을 하기도 하시는 군요."

"좀..... 심하게 당했을 때는 저도 입으로 독기를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봐야 설마 다운크람만 할까  생각하며, 세렌은 공주를  향해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공주의 표정에도 같은 웃음이 떠오르며, 가

벼운 목 인사와 함께 곧 그곳에서부터 불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부디..... 그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기를, 미네아 공주 님.... 하지만,

이건 정말 유감인데...."

세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철창 건너편에 서서히 어두워져 가는 그 불빛

을 바라보았다.

"먹을 거라도... 하나 가져왔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을...."

"킬츠? 자꾸 신경 쓰여서 그러는데....."

나이트 길드의 사람들에게, 빼앗긴 자치도시의  영토에 남아있는 드라

킬스의 군대는 오직  스게른성에 남아있는 나이트 파리퀸이 이끄는 철

벽의 기갑단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루디는 아무래도 뉴린젤의 문제가 걱

정이 된 나머지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  저녁 늦은 시간, 세피로이스

3층에 있는 킬츠의 방을 찾아 왔다.  그러나 방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고, 루디가 문을 살짝  열어보자, 불이 꺼진 방안에는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요즘 기분이 안 좋다며 킬츠의 방안에서만 납

작 엎드려 있던 쥬크마저도 없는 것이었다.

"함께..... 나간 건가?"

루디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 밤중에 그들이 나갔을 만한 곳을 생각해

보았다. 식사도 이미 여관에서 제공해주는 것으로 끝마쳤을 테고,  그렇

다고 한 밤중에 몰래 주점으로 가서 술을 마시는 용병대의 크랭크나 하

인스 같은 취미는 킬츠에겐 없었으므로, 갈만한 곳이 언뜻 떠오르지 않

았다.

"글세..... 그곳 말고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곳이  없는데, 뭐....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가보기로 할까...."

파울드 성의 높은 성벽 위의 난간에 극히 불안해 보이는 모습으로  앉

아있던 킬츠는 사실 그가 나오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

것은 쥬크가 하도 방안에서 죽치고  있다보니 뱃가죽이 방바닥에 붙을

것 같다며 산책 겸해서 함께 나온다는 것이 결국 이곳까지 도착한 것이

었다.

"무얼 생각하나 킬츠. 그런 곳에 앉아서 멍하니 있다가 아래로 떨어지

면 보기 안 좋은 모양으로 세상과 작별하게 될 것이다."

킬츠가 앉아있는 난간 옆에 가만히 서있던 쥬크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

표정으로 상당히 걱정되는 듯 킬츠를 향해 중얼거렸다.

"아니... 밤바람이 시원한 것 같아서....."

킬츠는 어중간하게 중얼거리며 성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한

달빛은 킬츠의 생각에 잠긴 얼굴을 희미하게 비쳐주고 있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

"글세....... 걱정이라기 보다는 좀 아쉬운 것이 있어서."

"무엇 때문에?"

"............. 뉴린젤."

킬츠의 입에서 장신에, 결 좋은 흑발과  무표정한 아름다운 인형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용병대의 천인장의 이름이  나오자, 쥬크는 얼굴을

찌푸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 여자 말인가. 쳇. 그 여자가 뭘 어쨌기에?"

"드라킬스... 알지?"

"지금 이 도시와 전쟁중인 나라 말인가. 최근  한 동안은 싸우지 않았

다고 들었는데."

"그 나라의 높은 사령관중 한 명이 바로 뉴린젤의 아버지야."

"음.... 그건 루디라는 예의바른 인간 마법사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 복

수를 한다고 벼르고 있지 않나?"

"그래. 바로 그것 때문에 그래. 좀  아쉽거든, 여러 가지로...... 일단 그

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인지 모르고 있어. 물론 뉴

린젤의 아버지 파리퀸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특히 뉴린젤이  말이야.

그리고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그녀는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어. 내가 그렇게 암시를 주었건만....."

킬츠는 조금 슬퍼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쥬크를 바라보았다. 그도 정

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자신을 염두에  두

고있지 않다는 것은 상상보다 훨씬 슬픈 일이었다. 마치 짝사랑하는 처

녀의 안타까운 기분과 같다고 할까.

쥬크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어두운 곳에선 마치 보석같

이 아름답게 빛나는 자신의 눈으로 킬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그 여자를 마음속에 두고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얼마나

그 인간을 네가 생각하며,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번  문제는

그녀에게 전적으로 맡겨두는 것이 좋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인

간 자신의 힘을 풀어 가야지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종족으로써의 인간

은 전 세대가 얻은 지식과 경험을 다음 세대로 전달해 주는 것으로 끝

나지만, 각각의 개체로써의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직접 극

복함으로써 그 진정한 의미를 지닐 수 있지. 인간의 수명은 짧지만,  그

만큼 강렬하게 인생을 살다가 가는 게 아니겠는가.  기뻐도 세상 그 누

구도 부러울 것 없을 정도로 기쁘고, 슬프면  이 세상 전부가 허물어지

듯 슬픈 것이 바로 인간의 단점이자 장점이라고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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