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23화 (123/166)

제 9장 -무엇을 위하여- (6)

세렌은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자신이 이  클라스라인으로 오게 된 이

유는 단지 여러 사람들과 만나, 인연을 맺기 위해서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결코 클라스라인에서 패러딘나이트로 평생을 살아갈 운명은 아

니라고 말이다.

현재 그를 구하기 위해 무엇인가 음양으로 힘을 쓰고있을 그 외의 다

섯 명의 친구들도, 세렌이  보기엔 결코 패러딘 나이트에  잘 어울리고

합당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법왕에게 충성하고, 생명의  빛

의 여신, 라프나의 교리를 따르는 성스러운 신전기사이자 클라스라인의

전속 기사단인 패러딘나이트, 일명 성기사. 하지만 세렌일행은 결코  법

왕에게 충성하지도, 라프나의 교리에 충실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

한 것은 오직 그들 자신과  동료들의 문제일 뿐, 설사  이 나라가 어찌

되건, 대 신전에 무슨 일이 생기건 간에  그것은 그들에겐 결코 특별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역시 어울리지 않아.... 나에게 이 순백의 갑옷은. 무거운 것은  아니지

만, 그렇다고 딱 맞는 것도 아니야.... 그 동안 어설프게나마 입어주었으

니, 의리는 지킨 셈이겠지. 이제는 벗을 때가 온 것인가.....'

일단 국외로 탈출한다면, 그들이 갈 곳은 이 대륙에 그다지 많지가 않

았다. 이미 한 나라에 속박되어 권력자들의 도구로 쓰여지는 것이 얼마

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설사 다른 나라들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체제의 왕국으로 망명하기엔  그의 마음이 꺼

림직 했다.

'좋은 곳이 한군데 있지.'

생각나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나이트 길드였다. 본국에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국외 추방되거나 부득이하게 나라를 등질 수밖에 없었던 슬프

고도 뛰어난 기사들이 모여 만든 집단. 대륙에서 가장 막강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실력은 대단히 잠재적으로 어느 순간 표면으로  전면

적 부상을 한다면, 어느 정도 위력을 보여줄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집단

이었다. 남부 자치도시에 있는 지식의 탑,  즉 매직길드, 그리고 드라킬

스에 있는 웨폰길드와 더불어 3대 길드조직으로 불리는 이 나이트 길드

만이 나라를 버리는 세렌 일행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것이다. 영

원히 대륙에서 떠돌며 부질없이 돌아다니는 방랑객이 되고픈 생각이 없

는 이상, 그 쪽으로 전향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일단 키사르의 의견을 들어보아야 했다. 그는 그들 중에서,  혹

은 이 클라스라인이라는 나라를 전부 통틀어서 가장 풍부한 지식을  가

지고 있으며, 또한 그 지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처리하여 판단할 수 있

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그의 생각이라면, 정말로 그들이 갈 수 있는 최

선의 길을 찾아 줄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프로겐성의 성주로 부임 중

이긴 하지만, 다른 동료들이 불렀으므로, 곧 비밀스럽게 이곳  세인트룸

에 도착하여 일을 진행시킬 것은 굳이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

다.

지금 세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침착하게 그의 동료들이 자신을

구해주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에서

난무하며 그를 괴롭히고 있지만, 결론은 단 한가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야 생각하던 모든 일들을 진행시

킬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철창 밖 저 멀리에서 희미한 불빛이 세렌의 눈으로 들어왔다. 혹

시 또 그를 찾아온 동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세렌은 반가운 마음

이 들어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 너는....."

그러나 세렌의 감옥으로 다가온 것은 그의 동료들 중 한 명이  아니었

다. 아름다운 얼굴에, 가는 몸 선, 긴 머리카락, 그러나 물론 그 역시 익

히 알고있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이런 곳에 갇혀있다니..... 환경이 매우 나쁘군요."

"미..... 미네아 공주?"

세렌은 갑작스런 등잔의 불빛에, 눈이 부신 것도 아량 곳 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눈을 크게 뜨며  이 예상 밖의 방문객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도무지 현실감이 나질 않는 것이었다.

"들어오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했다구요. 아버지에게  허락 받느라

시간 좀 걸렸어요."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 세렌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패러딘 나이트 선발 기념 파티에서, 앞으

로 서로를 좀더 잘 알아보자는 약속까지 했는데, 그 뒤로 각 전쟁에 참

가하며 정작 서로 만날 수 없었던 두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녀 역시 세렌이 보고싶었던 사람 중에 하나였다. 아니,  어쩌

면 사실은 그 누구보다 보고싶은 사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 모습... 바보 같지요? 명색이 패러딘 나이트인데, 이런 곳에서 감금

당해 있다니."

"자학하는 건가요?"

"그럴지도......."

"그건 세렌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

라 살던 세렌이 아니었나 요?"

미네아는 조금 책망하듯, 세렌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

녀도 세렌이 어찌하여 이 감옥에 갇혔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이

었다. 그리고 아무리 공주인 자신의  힘으로도, 세렌을 이 어둡고  습기

찬 지하의 공간에서 꺼내어 줄 수 없다는 안타까운 사실 역시 말이다.

"이럴 때야말로 공주의 이름을 유감없이  활용하려 했지만..... 몰튼 후

작이라는 사람의 힘은 너무나도 강대하더군요. 아버지를  거의 협박 조

로 눌러 놓았어요. 한 나라의 국왕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딸보다, 사악

하고 욕심 많은 한 신하의 말에 굴복하다니.... 이 나라도 이젠 갈  때까

지 갔나봐요."

오히려 자학하고 있는 쪽은 미네아인  듯 했다. 그녀는 그  얇고 가는

손가락으로 차가운 철창을 내리 쓸며 그곳에 철창의 녹이 묻어  나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런 곳에 있으면 당신도 이처럼 녹이 쓸고 말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곧 나가려고 준비중이지요."

"나간다고 요? 대체 어떻게?"

"제겐 과분할 정도로 좋은 친구들이 여러 명 있거든요."

세렌이 빙긋 웃으며 대답하자, 미네아의 얼굴에는 희미한 그림자가 생

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마치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탈옥하려는....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세렌은 미네아가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을 확신하듯, 확실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러면....... 이제 이 클라스라인과는 작별하게 되겠군요."

"물론입니다. 탈옥을 하면, 이곳에선  더 큰 대역 죄인이  될 테니, 이

나라의 거리를 대낮에 버젓이 돌아다니며 살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젠 저와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겠네 요."

미네아의 얼굴에 생긴 그림자는 바로 그것이었다. 세렌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도 있지요."

세렌은 가볍게 몇 발짝 걸어 철창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미네아

가 서있는 철창 반대편을 가까이 바라보며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는 양,

느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국가의 명령을 어기고........  지하감옥에 갇힌....... 어떤  한 젊은 기사

가..... 그의 동료들에 힘을 빌려...... 바로 그 동료들과 함께....... 감옥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때가 태양이  눈을 뜨는 이른 아침

이건...... 달도 침묵하는 늦은 밤중이건...... 곧바로 성에서 가장  빠른 말

을 한 마리 골라  타고....... 서쪽의 성문을 향해  달린다면........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린다면........ 우린 다시 만날 수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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