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22화 (122/166)

제 9장 -무엇을 위하여- (5)

"난 네가 너의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증오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 아

니, 증오를 가져야만 해."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 이유는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지만,

뉴린젤은 킬츠의 생각에 이유를 듣고 싶어했다. 아무 변화 없는 표정으

로, 하지만 지금 보이지 않는 그녀 내부의  마음이 얼마나 흔들리고 있

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킬츠밖에 없었다.

"방금 전, 원래 보통 여자라면 소리를 지르는 게 원칙이거든."

"내가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다."

"아니, 내가 말하는 목적은 뉴린젤이 보통 여자와 다르다는 사실을 일

깨워주려는 것이 아니야. 단지........."

킬츠는 눈을 감으며 과연 자신이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고민에 빠

졌다. 자신만의 이기주의가 아닐까. 나만 좋을 수 있는 편견이 아닐까.

하지만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이, 킬츠는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만 하는 성격이었다. 그가  소울아이를 얻은 그날 이

후로, 그 철칙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 자신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알 수

있으니, 그 다른 사람도 자신의 마음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었다. 그래야만 공평한 것이라고.

"단지?"

"지금의 너의 모습도 나는 정말 마음에 든다는 것이야."

순간 뉴린젤의 눈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버렸다. 예전에도 그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지금 킬츠가 한 말은 그때의 말과는 그 성격

이 매우 다른 것이었다.

"이런 내가? 감정도 없고, 표정도 없고, 이 뻣뻣한 내가?"

"그래, 하지만 너는 감정이 없거나 표정이 없는 것이 아니야.  너의 감

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고, 표정은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

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야."

"하지만, 감정이 없는 것과,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  다르

지?"

"감정이 있으면 인간. 아니면 인형이라고 할까. 너는 자신의 감정을 나

타내지 못하는 슬픈 인간이지, 애초부터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인형

이 아니야."

그러나 지금 뉴린젤의 표정은  마치 인형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깨지기 일보 직전인 석고상처럼.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굳어있었다.

"나는 그런 뉴린젤이 좋아. 그래서 네가 그렇게 증오해 마지않는 너의

아버지를 만약 너의 손으로 죽음을 내리게 된다면, 네가 얼마나 속으로

슬퍼하게 될지. 그것도 알고 있어."

"내, 내가 왜. 나의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지? 그럴 이유는  없

다."

단호한 뉴린젤의 대답이었으나. 이미 그녀의  표정은 조금씩 두려움으

로 떨려오고 있었다. 정말로,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면, 그 순간

의 복수의 쾌감보다, 그  후에 영원히 커다란 허무가  밀러올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도 느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사는 목적은 그것 뿐. 나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아

버지에게 복수하는 것. 자신의 이기심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버린 그 인간의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것, 바로 그것이다."

"파멸은 또 다른 파멸을 불러오지. 내가 누군가를 죽여버리면, 내 마음

속의 그도 함께 죽어버리게 되는 거야."

"난, 내 마음속의 아버지를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의  마음의 일부가 죽어버리는  걸.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을 의식하고 죽이는 것. 결코 전쟁에서 적군을 살해하는 것과

는 다른 일이야. 그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클

수록. 자신의 마음은 더욱 크게 죽어버리지."

"내 마음이 죽어버린 다 해도..... 난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어."

"나이트 파리퀸은 네가 너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억제했지. 없애

버린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는 너의  마음을 죽여버리는

것인데. 그러면 파리퀸보다 너의 잘못이 더 큰 거야."

"나보고 어쩌라고! 난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날 이후로 아

버지에게 이 원한을 갚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왔어. 그

것을 포기하면 그때야말로 나는 죽어버리는 거다!"

뉴린젤은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녀는  지금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진 듯,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눈은

불안감에 푹 젖어있었고, 입술을 파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네겐 그것밖에는 없어?"

그때, 킬츠의 슬픈 목소리가 뉴린젤의 귓가에 연기처럼 흘러들었다. 정

말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우울한 어조. 그것은  킬츠의 목소리뿐만 아니

라 그의 눈빛, 표정, 그리고 그의 전신에서 퍼져 나오는 분위기까지  동

일한 것이었다.

"무슨.... 말이지?"

"너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은 없는 거야? 정말로? 아무도?"

킬츠는 당황한 듯한 뉴린젤의 표정을 바라보며 투명해진 눈을  가만히

옆으로 돌렸다.

"나는 언제나 소중한 사람을..... 마음속에 생각하며 살아.  그렇기 때문

에 결코 누군가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해도 상관없어.  나 혼자서

그 고통을 이기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내  마음속의 그 소중한 사람

과 그 고통을 함께 이겨내니까.........."

킬츠의 말은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고는 했다.

"물론 그 소중한 사람이 반드시 나도 그렇게 생각해 줄 것이라고는 생

각하지 않아. 하지만 믿고는 있어. 반드시. 나의 마음은 그 사람에게 전

달될 것이라고. 비록 그것이 나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킬츠. 난......"

"판단은 너의 자유야. 아무리 내가 이래도 결국 결정하는 것은 너니까.

내게 그 결정을 막을 권리는 없어.  하지만, 난 네가 결코 단  한가지의

이유로 세상을 산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  동안 그렇게 함께 시

간을 보내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

아....... 난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날 소중히 여기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그래도 난 그 사람을 지켜줄 테니까. 하지만..............."

천천히 흘러나오는 킬츠의 목소리엔 어느새 새벽의 엷은 습기가  배여

있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운 표정과 함께.

"그렇다면, 난 너무 슬플 꺼야. 어쩔 수 없다해도."

킬츠는 몸을 돌려 방 문 손잡이를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 삐그덕 하는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그의 목소리 보다 더  큰 듯 했지만, 뉴린젤을

킬츠의 목소리를 놓이지 않았다.

"만약,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다면, 반드시 네가 그 역할을 맡을  수 있

도록 할게. 난 억지로 네가 아버지와 만날 기회를 빼앗지는 않겠어.  하

지만 그 전에 생각해 줘. 너는 네 마음엔  다른 사람이 들어 있지 않는

다 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속엔 네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깊은 어둠, 가끔 가다 뭉쳐진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하지

만 그렇다고 지금 세렌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였다. 생각만 하면, 생생하게 그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으며, 그

들의 친근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게 바로 그리움이라고 말하는 걸까..... 아니면 외로움? 예전에 최

종 관문에서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는데......'

세렌은 힘없이 웃으며 옐브린 열매를 살짝 깨물었다. 그것은 나무에서

딴 지 무척 오래된 것이기는 했으나, 결코  그 특유의 시큼하고 상쾌한

맛과 향이 줄어들어 있지는 않았다. 변함없는 맛과 향. 혀가 얼얼할  정

도였으나, 이 열매가 정말로 맛있다고 느껴지는 세렌이었다.

'나는 변한 걸까? 예전의 나의 목표들이 조금씩 다른 형태로 변해가고

있으니.....'

시간이 흐르고, 수십 번의 계절이 바뀌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들

도 있었다. 세렌의 생각으로는  아마 킬츠나 카름 같은  사람들이 그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중간에 카름은 목숨을  잃고 말아서 확

인 할 수는 없지만, 현재 살아있는  킬츠를 만날 수 있다면,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세렌 자신이 얼

마나 변했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람의 눈으로 보아

야만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키사르도, 다운크람도, 펠린도, 카젯도, 루벨도, 미네아  공주도........ 다

보고싶지만, 지금은 킬츠가 가장  보고싶다..... 만나고 싶어. 킬츠.  나는

어떻게 변한 거니?'

혼자서 몇 날 몇 일을 가만히  앉아 생각만 하다보니  그런 생각에만

집중이 되는 세렌이었다. 확인을 해보고 싶다는 충동. 하지만 그것은 지

금으로썬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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