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19화 (119/166)

제 9장. -무엇을 위하여- (2)

병사들 중에서 대장 급으로 보이는 덩치 좋은 한 남자가 예의 있는 목

소리로 믿지 못할 사실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세렌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그 말에 대한 해석을 요구했다.

"체포? 이유는?"

"항명죄입니다. 명령을 어기고 임무를 마치기도 전에 다른 사령관들을

유혹하여 병력을 철수시킨 것 때문입니다. 법왕청에서 결정된 사실입니

다."

세렌의 아버지 마틴스 후작이 현재 자리를 비우고 별장에서  요양중인

틈을 타서, 몰튼 후작이 노린 계략이라는 생각이  세렌의 머리 속에 재

빨리 연상되었다. 평소부터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결국은 이런  방

식으로 덜미를 잡아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이 어쨌든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병력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였기는 하지만, 일단 법왕의 명령서에는 성을 함락시키라고만 써

있었다. 병력을 철수시키던지 하는 일은 야전사령관의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대륙에서 오직 단 하나의 나라, 바로 클라

스라인만이 가진 말도 안 되는 규칙이었다.

세렌은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그들과 동행했다.  마음만 먹으면 망 한

편에 놓여있는 롱소드를 사용하여 이 병사들을 단숨에 끝장낼 수도  있

었지만, 그러면 정말로 클라스라인에서 범죄자로 낙인찍히게 되기 때문

에 그는 솟구치는 감정을  절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죄도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바로 모든 것을 뒤에서 조작하는 가증스런 몰튼 후작

일 뿐.

세렌이 항명죄로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의 동료들

에게 알려졌다. 카젯은 즉시 감옥으로 달려가  세렌을 만나게 해달라고

뻗대었으나 죄상이 크고 위험인물이라 면회가 안 된다는 간수장의 뻣뻣

한 대답만이 있을 뿐이었다.

네르담성 공방전 당시 세렌의 휘하에 있었던  카젯과 루벨, 펠린과 다

운크람도 처벌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무기한  자택 근신을 먹은 상태였

다. 그러나 그런 어처구니없는  판결에 네네 하고 따를  정도로 그들은

국가에 헌신적이지 못했다.

"말도 안돼....잘못이 뭐라고..... 세렌이 뭐라고...."

다운크람 소유의 자그마한 저택에 모인 네 사람은 일단 서로의 울분부

터 터뜨리기 시작했다. 먼저 카젯이  이를 갈며 말했다. 무언가  어법이

맞지 않는 어설픈 말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다운크람도  그것에 대해 뭐

라고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하여튼 정말 증오스런 놈들이다. 하는 짓이 정말 유치하군. 돈에 눈이

멀고 권력에 정신이 마비된 지체  부자유의 환자면서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다니,  너무 냄새가 심해서  갈아먹지도 못하겠

어."

다운크람은 딱딱한 표정에 한줄기 참지 못한 분노를 드러내며 살기 등

등한 눈초리를 번득였다. 이젠  도저히 그 만행을 눈뜨고  보아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웬만하면 참고 지내려 했지만, 세렌에게 직접적인  피해

를 입힌 이상, 이제는 그냥 있을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난 더 이상 이 나라에 못 있겠어. 하는 짓이 너무 심해.  아무리 나라

엔 잘못이 없다지만, 저런  재상 밑에 있다간 결국  이리저리 휘두르다

결국 끝나버리고 말 거야."

펠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었다. 이곳

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정말로 클라스라인이라는 나라에 대한

정나미가 뚝 덜어져서 애착이라곤 눈곱만치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서 계획을 세워야 할걸.  아마 저 후작의  머리라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감옥에 있는 세렌에게 어떤 방법으로라도 위해를 가할 꺼야. 그때

가면 이미 늦은 거야."

루벨이 어두운 목소리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확실히 재상이라면 암

살자라던 지, 독살이라던 지, 어떻게 해서든 세렌을 제거해 버릴 가능성

이 높았다.

서로간의 논의 끝에 결론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클라스라인과

는 작별을 고하며 지하감옥으로 난입, 세렌을  구해내어 해외로 도피하

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문제의 원흉인 몰튼 후작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었다.

"더 이상 클라스라인에게 미련은 없어.  몰튼 후작을 죽인다면 클라스

라인으로썬 둘도 없는 행운이겠지만, 우리에게 그럴 의무는 없겠지.  위

험성도 더욱 크고, 대체 얼마나 호위병들을 두고 있을지 몰라."

펠린의 말에 다운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결국 방법은 세렌을 구해내는 것인데......."

"그렇다면 당장 구해내면 될 것 아니야!"

기운차게 카젯이 소리쳤으나 다운크람은 곤란하다는 눈빛으로 다음 말

을 이어나갔다.

"키사르가 문제야. 그 녀석을 이  썩은 나라에 혼자 두고  갈 수는 없

다."

다운크람의 말은 모두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현재 프로겐성의 성

주로 재임중인 키사르. 그 없이 이 나라를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렌이 소중하듯이, 키사르 역시 그  누구보

다 소중한 존재였다.

일단 그들은 몰래 프로겐으로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정보에 능통한

키사르이니, 벌써 이 사건을 눈치채어, 만반의 대책을 마련해 두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키사르와 합류해서, 그 녀석의 지혜를 빌려야해.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여 중도에 잡힐지도 몰라."

키사르의 번득이는 작전의 진가를 그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있는  그들

이었다. 그 머릿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지식과 그것들을 토대로 한 완벽

한 문제해결 능력, 키사르는 그 능력이 보통 범인이라면 근접조차 하지

못할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결국 일단 키사르와 연락이 될 때까지 서로 흩어져 마치 근신 중인 것

처럼 자중하고 있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그리고 일단 뇌물을 사용해서

라도 몰래 지하감옥으로 들어가 그들의 뜻을 세렌에게 알려야 했다. 그

래서 가장 인상이 좋고 덩치가 작은 펠린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어두운 한 밤중에 수도 변두리에 있는 특수 감옥을 찾아간 펠린은  다

운크람이 마련한 수백 바클(바키라고도 함)을  호가하는 현금과 금품으

로 간수 장에게 딱 5분만 만나겠다고  간청했다. 전쟁시엔 그 누구보다

빠르게 전장을 헤치며 패러딘나이트의  위광을 퍼트리던 펠린이었으나,

일단 평소의 모습은 지극히 여성스런 외모에,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

리를 가진 미청년이었다. 그리하여  미인계(?)와 뇌물계에 넘어간 간수

장은 딱 5분만이라고 재차 강조하며 비밀로 몰래 그를 지하감옥으로 들

여보내 주었다.

이 비밀 면회는 일단 지하감옥의 구조를 파악해 두기 위해서도 꼭  필

요한 것이었다. 세렌이 있는 곳은 지하감옥 중에서도 가장 아래층인 지

하 5층이었다. 등불을 켜지 않으면 그야말로 암흑의 세상이었다. 습기도

많았으며 온도도 낮아서 병에 걸리기 딱 십상인 그런 환경이었다.

"세렌? 나 펠린이야. 이쪽으로 와봐."

펠린은 지하 5층의 감옥 중에서도 가장 안쪽의 독방으로 찾아가  어둡

고 좁은 그 감옥 안을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

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한 사람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존재하고 있었

다.

세렌이 이 감옥에 수감된지도 이미 보름 가까이 지난 상태였다. 그 동

안 과연 식사는 제대로 했는지, 잠은 제대로  잤는지 걱정이 앞서는 펠

린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은  감옥 안의 그 사람은  빠르고 날렵한

걸음으로 철창을 향해 다가왔다.

"펠린!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지?"

바로 세렌이었다. 약간은 마른듯한 얼굴에 피로감이 쌓여있었지만, 그

두 눈만은 여전히 예전의  그 강렬한 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결코 이런 악조건의 지하감옥 따위가 세렌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짓누를

수는 없었다. 펠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간 관계상 곧바로 중요한

요점을 꺼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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