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18화 (118/166)

제 9장. -무엇을 위하여- (1)

드라킬스와, 클라스라인, 이 두 국가의 군대는, 1선 지휘관의  실력, 병

사들의 장비수준, 보급물자, 병사들의 실력 면에서 약간의 상대적인  높

고 낮음은 있었지만, 평균적으로 보았을 땐, 거의 같은 레벨의 수준으로

보아도 상관없었다. 아무리 드라킬스의 사령부에 역대 최고라고 불리는

세 명의 장군이 버티고 있더라도, 클라스라인의 패러딘 나이트, 특히 91

회 선발전 출신들의 실력도 이에 크게 뒤지는  것이 아니었다. 실전 면

에선 드라킬스군이 앞섰고, 훈련 면에선 클라스라인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양 국가의 군대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군대의 총  작전

명령권이었다. 드라킬스는 군 최고의 지위인 총  참모장이 국왕에게 직

접 받은 임무를 토대로  기본적인 공격계획이 세워지면, 그  밖의 모든

작전 권은 야전 사령관의 몫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모든 사령관들이 모

여 어떤 방법으로 어디를 공략할 것인지를  결정했으므로, 전략에 조예

가 깊은 군사령관들의 의견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클라스라인의 대 전략은정치계통, 즉 재상이나 총관의 의견으

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만약 이 정치가들이 독단으로 막가는 생각 없는

인물이라면, 군사령관들의 의견 따위는 완전 무시해  버리고 오로지 자

신의 아집만을 내세워 뜻을 관철시켰다. 그만큼 야전사령관의 작전범위

가 좁아지는 것이었고, 전략적으로  무리한 싸움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카르트 토벌전에서는 두 배가 훨씬 넘는 적들을 상대해야  했으

며, 이번 네르담성의 공방전에서도 각지의 비정규 병사들과, 막  훈련을

마친 신규병력까지 모조리 동원하며 가치도 없으며,  무리한 타국 영토

를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전자는 아군의 유능과  적군의 무능으로 다행

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나, 후자는 아군의 무능과  적군의 유능으로

인해 참패를 면치 못했다. 애초에 계획부터 너무 어긋나 있었으므로 야

전사령관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결과를 좋게 만들지 못한 것이었다

네르담성 공방전에서 클라스라인의 패배는 곧바로 나이트 길드의 정보

원들에 의해 북부자치도시 연합으로 전달되었다. 애초에  이 전쟁의 원

인이 북부자치도시연합의 총 참모장인 마인슈의 머리에서부터 나온  것

이었으므로 그들로써는 변화하는 양상 하나  하나에 주의 깊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물론 결과를 보면 클라스라인의 참패지만, 애초에 구상이 형편없었음

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피해만 가지고 무사히 철수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곧 클라스라인의 야전 사령부가 생각만큼 무능력하

지 않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을 놓고 마인슈는  나이트길드의 중요 요원들과  사령관들을

불러 지금까지의 양상과 앞으로의 전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두

양 대국 사이에 끼인 처지이고 보니, 드라킬스의 기침에도,  클라스라인

의 뒤척임에도, 신경을 아니 쓸 수가 없었다.

"이것은 우리로써는 정말 환영할 일입니다. 드라킬스가 클라스라인 정

복전쟁을 벌일 때, 클라스라인으로써도 결코 만만히  내주지는 않을 것

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부패한 클라스라인의 권력층이 각성을

하는 계기가 마련 됐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정보에 따르면 클라스라인의 마지막 퇴각을  작전하고, 지휘했던 것은

올해 스무 살을 갓  넘은 신규 패러딘나이트인 세렌  마틴스라고 했다.

마틴스 가라면 클라스라인에서 이번에 후작으로 승격  됐으며, 명망 있

고 오래된 집안이었다. 가문의 주인인 마틴스 후작은, 클라스라인의  총

행정기관이자 법무기관인 법왕청의 최고 직분인 그랜드 저지의  자리를

맡고있었다. 물론 그 자리가 약간은 유명무실한 것이 사실이었고,  마틴

스 후작인 현재 병환으로 별장에서 요양 중이긴 하지만 말이다.

'역시 세렌이군.......'

그 자리에 참석 중인 사람 중에 킬츠만이 이 세렌이라는 패러딘나이트

의 이름에 많은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세렌 마틴스,  원래는

세렌 그란드라라는 이름을 가진 이 청년은 킬츠의 오랜 친구였기  때문

이었다. 가끔 티격태격했으며, 못 마땅하기도 했으나, 어린 시절, 생사의

위기를 함께 했던 가장 최초의 동료였다. 과연 얼마나 변했는지, 얼마나

강해졌는지, 킬츠는 상상의 나래를 펴며 즐거운 기분을 만끽했다.  확실

히 그의 실력으로 인해 클라스라인군의 피해가  상당히 적었다고 하니,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히 강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중순 사이에 드라킬스의 대대적인 공세

가 클라스라인을 향해 가해질 것입니다. 이번  전투로 드라킬스는 클라

스라인을 침공할 수 있는 확고한 명분을 얻은 셈이니까요. 그리고 우리

는 그것을 노려, 드라킬스의 주력 군을 완전 봉쇄시켜야만 합니다."

마인슈는 드디어 이제부터 북부자치도시연합이 나아가야 할 전략의 방

향을 세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번 기회는 빼앗

긴 영토를 회복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

었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생각대로 일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페이

오드가 남부자치도시연합을 침공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일단은,

이 잘 흘러온 물줄기를 앞으로도 계속 뜻대로 흐르게 해야합니다."

긴 행군 끝에 꿈에도(?)그리던 클라스라인의 수도, 세인트룸에 돌아온

세렌은 그가 지휘했던 모든 잔여  병력의 인수인계를 마치고는 곧바로

피곤에 지친 몸을 비틀거리며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원래 클라스라인은 병력을 특정 사령관의 휘하에 전속으로 두지 않고,

전투 시에만 배속하였기 때문에 전투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이  인수인

계의 과정이 필요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사령

관의 개성을 병사들에게 관철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한 사령

관 밑에 오래 머물다 보면, 자연스럽게 병사들은  그 사령관의 작전 패

턴이나 성격에 익숙하게 되어서 다음 전투에도 한결 원활하게 일을  수

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클라스라인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클라스라인에서 유일하게 그 원칙에서 제외되었던 섬광의 기사단도  이

번 전투로 인해 거의 전멸 당해서 본이 아니게 해체되었기 때문에이제

는 더 이상의 예외조차 없었다.

소식을 들은 몰튼 후작은 펄펄뛰며 난리를  부렸다. 적보다 많은 수의

병력을 가지고도 패배했으니, 사령관들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무능력

자라는 단어와 겁쟁이라는 단어가 그의  더러운 입에서 마구 난무했었

다.

세렌은 옛날부터 사용하는 저택 3층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간단한

목욕을 마친 후 한숨을 내쉬며 침대로 몸을  던졌다. 기운이 쭉 빠지며

기분 나쁜 허탈감이 전신에 배어들었다.

'과연 이 나라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세렌은 이 모순투성이인 클라스라인의 현실에 예전보다 더욱 강한  증

오심을 느꼈다. 대체 귀족들의 횡포 한번에 나라의 전 군대가 동원되어

공공연하게 죽음을 강요받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후작이 임시

로 자스칼성에 남은 나이트 파리퀴스를  제외한 네 명의 사령관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나의 작위와 영지가 날아가 버렸으니 이를 어떻게  책

임질 거냐는 말에 세렌은 그의 얼굴에 주먹으로 한방 먹일 힘조차 나지

않았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이번 전쟁의 목적이 고작 저

증오스러운 재상의 작위와 영지를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세렌은 몰려드는 회의와 후회에 맞설 기력이 남아있지 않는 자신을 발

견했다. 패러딘 나이트만  되면 모든 것이  밝게 빛나 보일  줄 알았는

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너무도 참담했던 것이었다, 그의 꿈은 이

런 곳에서 결코 빛 날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의 꿈은? 나의 꿈은 뭐지?'

세렌은 생각했다. 이미 처음 그의 목표였던 훌륭한 인물이 되어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것은 어느 정도 만족되어  있었다. 최소한 클라스라인의

국내에서만큼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

다. 그는 젊은 영웅이었으며 언제나 시민들에게 칭송과 환영을 받는 명

사였다.

그러나 그밖에 생각했던 목표, 이 클라스라인을 자신의 손으로 바꾸어

보겠다는 생각은 지금 현실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너무나도 그 어두

운 뿌리가 깊게 박혀있었다. 세렌이 반역이라도 일으키지 않는 한, 그것

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문제가 아니었다.

믿을만한 사람들도 하나씩 그  빛을 잃고 있었다.  진정한 실력자이며

애국자인 프레이어공작도 쇼크로 쓰러져  의식불명의 상태였고, 노령의

패러딘 나이트이자 다른 모든 나이트들의 정신적 지주인 나이트 퀴트린

조차 원정에서 돌아와  보니 심신쇠약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신세였다.

그는 원래라면 앞으로 10년 이상 펄펄 나며 노익장을 과시할  인물이었

는데, 아마도 몰튼이라는 성을 가진 어떤 재상  때문에 10년 이상 일찍

늙어버렸다.

이제 자신들의 영토를 침범했다는 핑계를 대며 드라킬스가 전군을  이

끌고 쳐들어온다면, 대체 어쩔 것이란 말인가. 귀족의 횡포는 날로 더해

가 시민들의 불만은 거의  극에 달했으며, 군대를 줄어서  겨우 정원을

유지할 정도였다. 정치, 군사, 시민이라는 국가의  필수 조건인 이 삼중

주의 화음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는 연주가 엉망이 되

어 비참한 마지막을 맞이할 뿐이었다.

'천년의 역사를  가진 클라스라인법국도  이제 그  마지막을 바라보는

가......'

자신의 노력이, 무너지는 모래성을 무너지지 않게 붙잡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퍼뜩 세렌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세렌의 중얼거림은 아무도 듣는 이 없이 혼자만의 독백으로  끝나버리

고 말았다. 하지만, 어떨 결단을 촉구하는 세렌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너 자신을 위해, 그리고 너를 진정으로 생각해주는 그 다른 이들을 위

해.'

결론을 떨어졌다. 자신을 따르고 진정으로 위해주는 다섯 명의 친구들

은 진실로 유능한 인재들이었다. 언제라도 믿을 수 있는 동료였으며 서

로를 신뢰하는 소중한 재산이었다. 그들에게 이  비참한 나라에서 부질

없는 고생과 노력을 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무언가 결과가 있는, 비전이

있는, 그리고 희망이 있는 일을 위해 살아가도  더없이 짧은 것이 바로

인간의 인생인 것이다. 쓸데없이 허비할 시간은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

았다.

그대,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시녀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세

렌의 방문이 힘차게 열리며 수십 명의 무장 병사들이 방안으로  난입했

다.

"무슨 일이지? 이 저택은 마틴스 후작 님의 것이다. 아무나 무단 침입

할 수 없는 곳이란 말이다."

살기 등등한 병사들의 시선을 보고 세렌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

으로 양부의 이름을 들먹였다.

"나이트 세렌.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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