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선제공격- (5)
"이런 곳에서 뭐하고 있어? 적군이 오나 감시라도 건가?"
그때 회의를 마친 세렌이 성벽위로 올라와 자신의 동료들에게 소리쳤
다. 그러나 농담 섞인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어두웠
다.
"아니, 우리 클라스라인의 대군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말이야. 입체적으로 보기위해서 이곳에 올라왔지."
루벨이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세렌을 반겨주었다. 실제로 출전을
앞두고 있는 클라스라인군의 모습은 장관 이여서, 10만에 가까운 군대
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규모인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작전은 어떻게 됐지?"
"글세 다운크람. 나도 잘 모르겠는걸."
세렌은 카젯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오며 마음에 내키지 않는 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군을 지휘할 때 구구한 작전은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
다."
세렌은 기어코 한숨을 내쉬었다. 총 사령관 제레딘을 필두로, 열린 다
섯 사령관들의 이번 작전회의는, 결국 군대의 숫자가 워낙 많은 관계로
각 부대간의 연계를 기본으로 하며 실전에서 사령관들의 역량에 맡긴다
는 것이었다.
워낙 숫자가 많다보니, 세세한 작전이나 전술의 변화를 결정하고, 실행
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사령관이라면 그 정
도의 고생은 감수하고, 조금이라도 아군에게 유리한 작전을 구사하려는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었다. 제레딘은 강하고 통솔력 있는 사령관이기는
했으나, 용병가로써의 자질을 갖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가장 나중에 선발되었고, 나이 어린 세렌이 전군을
이끌고 펼칠 작전을 내세운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차라리 카르트군
을 토벌할 때처럼, 소수라도 전군을 자신이 지휘하여 작전을 펼쳤을 때
와는 상황이 다른 것이었다. 중뿔나게 혼자 떠들어도 총 사령관이 아닌
이상, 자신의 의견을 고집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런걸 보고 엎친 데 덮쳤다고 하는 것인가 봐. 과연 어떻게 될는
지......"
세렌은 앞으로 벌어질 전쟁을 예상하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
다. 분명히 적군의 지휘계통에는 드라킬스의 3장군이라 불리는 명 사령
관들이 굳건히 버티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의 작전구사능력은 이미 북
부자치도시 연합과의 전쟁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다른 패러딘나이트들
은 그들이 왜 그렇게 막강한 능력을 발휘하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세렌
만은 정확하게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들은 확실한 개성을 가지고 자
신만의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나이트 파리퀸은 드라킬스 기갑보병의 강력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한
지구전을 기본으로 작전을 구사했다. 넓게 퍼져서 적군을 포위하여 천
천히 좁혀가기도 했으며 수비에 치중하며 시간을 끌다가 갑자기 공세로
반전하는 기교를 보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완숙
함으로, 그의 전술에는 견고함이 배여 있었다.
그와 반면에, 현재 네르담성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나이트 디
트마리스는 붉은 질풍의 기사단이라는 드라킬스 제 1기사단의 사령관이
라는 이름에 걸 맞는 강렬한 빠른 속공을 주로 사용했다. 중앙돌파후
배후반전은 그의 특기였으며 그 돌파하는 속도가 거의 쏜 화살이 날아
가는 듯 했다. 언제나 쉴새없이 맹공을 펼쳐서 단시간 내에 적군을 섬
멸하는 뛰어난 맹장이었으며, 무서운 것은 가끔씩 전장에 비룡을 타고
나와서는 종횡무진 적진을 뒤흔드는 기동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마
직접 해치운 적군 병사의 숫자가 어느 나라이건 간에 사령관 중에서 제
일 많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세렌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은 바로 나이트 미카드론이었다.
물론 그는 나머지 두 명의 사령관과 비교할 때 전쟁에서 세운 공적은
떨어졌으나, 언제나 전투가 끝나고 났을 때는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아
군을 남기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 상황에 알 맞는 적절한 전술을
구사하여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했으며 적군의 피해를 최대한으로 늘렸
다. 물론 그 덕분에 적군을 전멸시키는 일은 드물었지만, 반면에 아군에
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지도 않았다. 언제나 아군의 피해는 적었으며, 적
군의 피해는 많았다.
키사르와 함께 드라킬스 사령관들의 공적을 살펴보며, 둘은 공통적으
로 이 유연한 전략가를 최대의 위험인물로 뽑았다. 전 대륙에 이름을
날리는 대단한 미남인 그는 외모뿐만 아니라, 머리 안쪽에 들어있는 내
용물도 대단히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파리퀸처럼 풍부한 경험에 의존
하지도않았으며 그렇다고 디트마리스처럼 타고난 패기로 승부하지도
않았다.
"이번 전투엔, 제발 드라킬스군에 나이트 미카드론이 이끄는 군대가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야. 만약 그가 있다면, 아군의 무모한 공격을 금새
알아채고 획기적인 전략으로 우리 클라스라인군을 위기로 몰아 넣을 테
니."
"미카드론? 드라킬스 3장군 중 한 명 말인가?"
세렌의 말에 다운크람이 그렇게 되물었으나, 다운크람도 미카드론의
진정한 무서움을 파악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펠린이나 루벨도 고개를
끄덕거리기는 했으나 실적 면에서 3장군 중 가장 떨어지는 미카드론이
그렇게 강적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는 듯 했다.
'이 전쟁, 확실히 승산이 없다. 아무리 아군의 숫자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 숫자의 우세함을 적절하게 이용하지 못하는 이상, 피해의 규모가 커
지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세렌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였다. 과연 어느 정도 당하는 시점에서, 아
군을 후퇴시켜야 적절할 지였다. 그 말고는 아군의 위기 시에 최전선을
맡아 전군의 후퇴를 맡은 인물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번 전쟁에 동원되
는 클라스라인의 군대는 곧 클라스라인의 전 병력이라는 말과 마찬가지
였으므로 전멸된다는 것은 바로 클라스라인의 전 병력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대한의 병력을 남기어 후퇴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클라스라인의 존립이 위기에 처할 것이었다.
'이번 전쟁이 패배하면 몰튼 후작도 조금은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제발 그래야만 할텐데, 아니면 이 나라는 정말로 위험해 진다.'
만약 이 전쟁에서 지고서도 몰튼의 횡포가 가시지 않는다면 그의 존재
는 인간을 넘어, 국가전체를 뒤덮을 무서운 재앙으로 변해, 그야말로
클라스라인을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드라킬스군을 맞아, 수비를 하는 것도 어려운 참에 먼저 공격
을 하고 나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이트 퀵셀트
같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 사령관이 되어야지, 몸은 뛰어난데, 머리가 그
몸을 받쳐주지 못하는 다른 이들에게 그 자리를 맡겨서는 승산이 없었
다. 패러딘 나이트의 훈련은 애초에 전략 전술 면의 분야에 시간적인
투자를 훨씬 높여야만 했다. 고달픈 육체적인 훈련이개개인으로써는
강한 인간에 도달시킬지는 몰랐으나, 대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써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키사르가 있었으면 정말 좋으련만......"
다음날, 자스칼성에 있던 클라스라인군은 전쟁의 깃발을 높이 올리며
원래는 북부 자치도시연합의 도시였으나 드라킬스의 영도가 되어버린
네르담성을 향해 출격해 들어갔다. 자스칼성에서부터 네르담성까지는
대략 직선거리로 400만 세션정도, 하루에 20만 세션씩 이동한다 해도
거의 20일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다.
열흘정도 행군이 계속되었으나, 드라킬스 군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그저 추수가 끝난 평원의 한적한 모습만이 눈에 들어올 뿐.
"아무래도, 드라킬스군은 농성을 하려는 것 같은데?"
세렌은 한가로이 주변 풍경들을 바라보며 클라스라인군의 가장 후미에
서 보급부대를 호위하고 있던 세렌의 부대는 그야말로 편안하게 앞에
가는 부대들의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세렌의 머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추수가 끝
났다는 것은 곧 드라킬스의 식량이 풍부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언제나
식량문제 때문에 보유하고 있던 대군을 전부 움직이지 못하던 드라킬스
에게 북부자치도시에서 빼앗은 평야에서 수확되는 곡물들은 군대의 식
량문제에 대단한 도움을 주고 있었다. 자치도시연합에게서 빼앗은 영토
에서 나는 곡식이 오히려 드라킬스 전역에서 거우어지는 곡식의 량보다
많았던 것이었다. 평야가 적은 드라킬스로써는 언제나 식량의 부족함을
겪어야만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게 되었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군. 이젠 우리가 수비에 치중하여 장기
전으로 나온다 해도 드라킬스의 보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보급문제가 떠오르자, 세렌은 드라킬스와의 마지막 전면전을 용케 피
해간 북부자치도시연합을 생각했다. 비록 전 영토의 70% 이상을 빼앗
긴 그들이었지만, 만약 훗날 드라킬스가 클라스라인을 공격해 올 때, 협
력하면 빼앗긴 영토를 함께 되찾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북부자치도시연
합과 손을 잡는다면 확실한 승산이 있었다. 드라킬스군이 클라스라인영
토 내로 진격해 들어온 다음에 자치도시연합군이 그 퇴로를 차단하여
보급선을 끊어버린다면 드라킬스로써는 심각한 궁지에 몰리는 것이었
다. 그리고 앞뒤에서 두 나라의 협공을 받는다면 이미 승패가 갈라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물론 드라킬스로써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적절한 부대를 후방에 두어 북부자치도시연합을 견제할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수비엔 정평이 난 철벽의 기갑단이 그 역할을
맡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그러나 북부자치도시연합에 새로 부임된 총 참모장이 지금까지 보여준
능력은 세렌이 보기에도 예사롭지가 않았으므로, 동맹만 체결된다면 어
떻게든 드라킬스군의 후방을 공략할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남부의
지원군까지 받았으므로 더욱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것이 분명했다.
세렌은 그런 매력적인 상황을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예전에 남부의 지
원군을 통과시켜준 일도 있었으므로 잘만하면 북부자치도시연합과 동맹
을 맺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프레이어공작에게 직접 찾아가서라도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제는 프레이어공작이 현재 의식을 잃고
자택의 침실에서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다는 점이었다. 정말 무엇하나
의지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대체 이 나라가 어찌되려고 이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