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토벌전쟁- (8)
"비상 경계태세.... 어차피 드라킬스의 군사들은 이 파울드를 공격하지
않는 것 아니였나? 그런데 왜 비상이 걸려야 하는 거지?"
파울드의 수비를 담당하고있는 용병대의 사령관인 킬츠가 성벽 위에서
용병들을 대기시키고는 멍하니 성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으로는 킬츠
의 부관이 된 루디와 용병대의 야전 특수 보조 관을 맡고있는 에리나,
그리고 은빛의 아름다운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 쥬크가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대기하고 있으란 거겠지. 어쨌든 드라킬스가 집결한
전군을 이끌고 잠깐동안만 이 성을 공격한다면, 버틸 것도 없이 단숨에
끝장날 테니까."
"맞아. 언제나 준비하는 자세는 좋은 거야. 그렇지요 쥬크 님?"
루디의 말에 에리나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옆에 있는 쥬크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물론이지, 모든 생물은 각각 자신의 앞날을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무한의 시간을 가진 나는 예외지만 말이야."
쥬크는 에리나의 손길이 기분 좋은 듯 그르릉 거리며 자신 있게 대답
했다. 참고로 쥬크는 그야말로 무한이라 할 수 있는 수명을 가지고 있
었기 때문에 늙어 죽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맞아 죽는 것
이라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쥬크는 실리온의 늑대는 원래 아주 옛날에는 자멘이라고 불리는 정령
이었다고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정령을 다루는 에리나가 무척 마음에
든다고 했다.
"밝고, 착하며 싹싹한 인간 여자이다. 정말 마음에 들어, 특히 그 괴물
같은 키다리 여자에 비교한다면."
쥬크는 드디어 제대로 된 인간여자를 만났다는 듯 길게 찢어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흐뭇하게 말했다. 물론 에리나도 쥬크가 마음에 드는 모
양이었다.
"여, 안녕 킬츠 방위사령관. 수고하는구나."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킬츠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균형 잡힌 단
단한 몸과 힘있는 검은 눈동자가 있는 서글서글한 얼굴을 가진 청년이
었다. 물론 킬츠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스와인 씨!"
"소문으로 듣자하니 멋진 늑대와 동행을 하고 돌아왔다고 해서, 총 참
모장에게 다녀오는 길에 잠시 들렸다. 인사도 할 겸 말이야. 그런
데........."
스와인은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말하다가 어디서 보아도 금새 눈에 띄
는 바로 그 늑대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멋진 늑대인걸! 보고만 있어도 절로 역동 감이 느껴지는데?"
"너도 인간치고는 무척 쓸만한 몸을 가지고 있군."
"오오! 말까지? 소문이 사실이었군. 이름이 쥬크라고 했지?"
"얻다 대고 반말이냐 인간아."
쥬크가 가만히 스와인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하자 스와인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왜, 반말하면 안 되는가?"
"뭐, 상관은 없지. 이미 볼 장 다 봤으니까."
"뉴린젤 씨에겐 개라고 까지 불리지요?""
"........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라."
에리나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쥬크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
다.
"아니! 개라니! 이렇게 멋진 늑대에게 감히 개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되는 것인가? 최고의 늑대, 혹은 늑대의 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텐데."
"오,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인간 남자여. 이름이 스와인이라고? 나
도 한때는 모든 인간들에게 그렇게 불리며 잘 나갔었는데......"
스와인의 호들갑덕분에 그와 쥬크와의사이가 급속도로 친밀해 졌다.
쥬크의 모습에 감탄하는 스와인과, 칭찬 들으면 금새 기분이 좋아지는
쥬크는 서로 강력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화기 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
다.
"아, 그런데 말이야 킬츠, 좀 전에 크라다겜을 만났는데 말이야,"
스와인이 잠깐 킬츠를 바라보며 원래 이 성벽 위를 찾아온 목적을 털
어놓기 시작했다.
"크라다겜이요?"
"그래. 그런데 그 사람...... 인간이 아니지?"
스와인은 마치 지나가는 듯한 말투였으나 듣는 이는 결코 그냥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킬츠는 금새 심각하게 반응하며 스와인을 바라
보았다.
"왜, 그런 생각을....."
"아니, 만나서 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말이야, 물론 내가 저 웨폰길드
에서 최강의 검사를 나타내는 증표인 성의를 받은 샤블 공처럼 소울아
이를 가진 것은 아니어서 사람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
만....... 아무래도 그의 몸에서 나오는 기운은 인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강력했어. 장난이 아니더라 구."
스와인은 도 하나의 소울아이를 가진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다
는 사실을 모르고는 적절한 예까지 들어가며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
다.
".......... 퍼트리고 다니면 곤란한데......"
"설마! 난 궁금하면 참지를 못하긴 하지만, 입 하나는 무거운 남자라
구."
"뭐, 이제 와서 스와인 씨에게 숨길 것도 없으니까, 크라다겜은 마족이
에요."
킬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
고 놀란 것은 스와인이 아니었다.
"무엇! 마족!"
킬츠의 말을 듣자마자 쥬크가 정신이 번쩍 나는지 소리치며 으르렁거
렸다.
"왜 그래 쥬크?"
"마족이란 말이냐! 그 사악하고 파괴의 본능에만 충실하며 살아가는
공포스런 저주의 존재들....."
쥬크는 치가 떨린다는 듯 부들거리며 이까지 갈았다.
"너의 인간들이 말하는 소위 '성의전쟁'때 신물나게 붙어보았다. 물론
내가 이기기는 하였지만....."
쥬크는 당시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그때 나타스의 어둠의 군대, 즉 마
족들이 떼거지로 안개의 숲에 쳐들어 왔는데, 고대인이 예전에 만들었
던 키메라들도, 가고일들도 그 상대가 되지 못해서, 결국 그 자신이 직
접 맞서 싸웠다는 것이었다.
"데스나이트라고 하는 녀석들이었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그거 유감인데, 바로 크라다겜이 데스나이트의 마스터였어."
킬츠는 특히 '였어' 라는 과거형에 힘을 주며 말하였으나 쥬크는 그 말
에 더욱 흥분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아니! 지금가지 내가 마족과 같은 도시 안에서 살고 있었단 말인가!
크악! 그것도 그 저주스런 데스나이트의 마스터와!"
"자, 자, 진정해요 쥬크 님, 제가 설명해 드릴 테니까."
루디가 흥분한 쥬크를 말리며 그와 킬츠가 다크핵사곤의 결계 안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루디의 말을 들으면서도 으르렁거리던
쥬크였으나, 모든 설명이 끝나자, 그제서야 조금 진정하며 상황을 파악
했다.
"음...... 그러면 마족 특유의 감정과 본능들을 상실했다 이거지?"
"바로 그거예요. 제 정신에 존재하는 어떤 대 마도사께서 고위 정신마
법을 사용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음...... 우리 혼의 용병에서도 대대로 마족의 잔학성과 강력함이 전해
져 내려오고 있는데, 정말 다행이군. 아까는 정말 깜짝 놀랐어."
스와인이 과연 그렇게 된 것이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대화도중에 가까이 다가오더니 식사시간이라는 거야. 정말 잡
아먹히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식사시간이라, 크라다겜도 안 보는 사이에 많이 인간다워 진 것 같
네."
킬츠는 더 듣지 않아도 스와인이 겪었을 기묘한 상황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인간의 감정을 에너지로 살아가는 마족이었기 때문에,
계약을 맺은 마신이 인간의 감정을 공급해 주지 않는 한, 직접 접근하
여 얻어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결계안에서 거의 사흘에 한번 꼴
로 그 일을 경험했던 킬츠였다.
"그래? 음...... 그렇다고 해서 내 감정이 메 마른다던가..... 하는 건 아
니겠지."
"그런 건 걱정 마시길. 전 3년 동안 크라다겜에게 식사를 제공했으니
까요."
스와인이 꺼림직 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킬츠는 쓴웃음을
지으며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오히려 언제나 남아도는 쓸데
없는 감정들이, 한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에 자부심
까지 느꼈던 킬츠였다.
크라다겜 역시 킬츠에게는 루디와 마찬가지로 두 번 다시없을 소중한
사람이었으나, 결코 그는 자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결코 문제될 일이 없
을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크라다겜과 오랜만에 만나봐야겠어. 변한 모습을 보고
싶은데? 그렇지 않아 루디형?"
킬츠는 그 강인한 몸과 힘을 가지고 있는, 인간같이 되고 싶어하는, 그
리고 인간이 없이는 살 수 없는 마족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루디
를 바라보았다. 루디 역시 킬츠와 마찬가지의 마음인 듯 했다.
"그래, 한번 만나보러 가자. 그리고 오랜만에 식사도 대접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