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05화 (105/166)

제 7장. -토벌전쟁- (6)

"성 아래로 내려가 침입한  적군을 섬멸하라! 우리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

제크트는 기습당했다는, 혹은 적군의 작전에 넘어가 버렸다는  후회와,

공포의 마음을 억제하며 긴급히 명령을 내렸다. 곧 카르트군은 활을 던

지고는 허리에 메고있던 만도를 뽑아들고 성벽에서 내려와 성안에 침입

한 크루세이더들을 해치우기  위하여 달려들었다. 적군의  화살에 당한

아군의 피해가 1만을 상회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2만에 가까운 병력이

남아있었고, 성안에 침입해 들어온 클라스라인군은 1만이 안 되는 숫자

였다.

"반응이 느리군, 하지만, 이미 승패는 눈에 보이는 것 같은데."

루벨은 자신의 거대한 휴페리온은 세워들며 느긋한 웃음을 지었다. 아

무리 적군의 숫자가 아군의 두 배가 넘는 다 하더라도, 이 작전이 양동

작전인 이상, 아직 주력부대가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미리 대기 중이었던 카젯이 몇 명의 병사들은 이끌고 몇  겹으

로 막아놓은 성문의 받침대들을 재빨리 파괴했고,  곧바로 굳게 닫쳐있

던 프로겐성의 성문을 열어버렸다. 성문이 활짝 열리자 시간도 얼마 지

나지 않아서, 성밖에서  카르트군의 화살세례를 꿋꿋이  막아 내고있던

화이트나이트들이 드디어 환호성을 지르며 성안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성문이 열렸다!"

"다도해의 야만인들을 쓸어버리자!"

화살을 막아내며 적군에 대한 살의를 착실히 쌓고있었던 화이트나이트

들은 성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카르트군을 보이는 대로 미

친 듯이 공격해 들어갔다. 참아왔던 기병의  공격본능을 유감없이 폭발

시키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성문 뒤에 있는 넓은 광장은 카르트군의 시체로 가득 메워졌

다. 카르트군으로써는 앞뒤로 공격을 당하는 셈 이였고, 퇴로가  크루세

이더들에게 막혀있었으므로 꼼짝없이 포위되어 싸울 수밖에 없었다.

카르트군의 화살에 말을 잃은 화이트나이트가 자신의 검으로 카르트군

보병의 목을 날리며 한 것 화풀이를 했다.  반쯤 모습을 감추고있는 하

얀 달빛 속에서 반짝이는 것은 오직 화이트나이트의 흰 갑옷과  크루세

이더들의 흰 투구였다. 게다가 그 방어구에는  인간의 체내에서 뿜어져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붉은 피가 대량으로 묻어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색을 반사하며 사방에 빛을 뿌려대었다.

"항복하는 사람은 목숨을 살려준다!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루벨은 세렌의 부탁에 따라 이미 전의를 잃고 쓰러져 가는 카르트군에

게 항복을 권유하는 고함을 질렀고, 아군에게도  항복하는 적군은 죽이

지 말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그러자 얼마 후, 프로겐성의 광장에서 벌어

지던 달빛아래의 유혈의 축제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사령관인 제크

트가 전군에게 대항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명령한 것이었다.

"전군,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우리는 패배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고 목숨까지 버릴 것은 없다!"

확실히 현명한 판단이었다. 제크트는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마음을 감

당하면서도 끝까지 적절한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항구로.... 들어온 것이었구나...... 그런 전략이  있다는 것도 예상해 두

어야 했는데...... 나의 완패다.'

사령관의 명령에도, 몇몇 기운이 남아있던  소수의 카르트군은 명령에

불복하며 끝까지 전투를  감행했으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여섯

명의 패러딘나이트들이 직접 돌아다니며 그런 적군을 직접 가차없이 베

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성의력 669년 5월 17일  새벽. 세렌이 이끄는  클라스라인의 토벌군은

프로겐성을 재 함락하며 영토를 침범한  카르트군을 완전 섬멸해 버렸

다. 이 프로겐성 전투에서 카르트군은 2만  이상의 병력을 잃고 살아남

은 나머지 병사들은 클라스라인군에 항복하는 참패를 맞이했다.

3개월 이상을 억류되어있었던 프로겐성의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뛰쳐

나와 승리한 클라스라인군을 맞아주었고, 특히, 사령관인 세렌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아직 선발 된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번호조차 받지 않은  패러딘나이트

세렌은 프로겐성의 전투에서 아군을 둘로 나누어 해로를 통해 적의  후

방을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감행, 카르트군을 섬멸했고, 5천이 넘는 적군

포로를 잡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쏟아져 내리는 화살을 막아낼 때는  아찔했는데, 이렇게 승리하고 나

니까 다행이야."

"그래? 우리는 적군의 등뒤에서 화살을 쏘는데 상당히 편했지."

펠린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옆에  있던 루벨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

다. 이 커다란 덩치의 패러딘나이트는  카젯과 함께 적의 후방을  공격,

적군에 절대적인 피해를 입혔던 것이었다.

클라스라인군이 승리를 거둔 다음달. 패러딘나이트  여섯 명은 임시로

제공받은 프로겐성의 고급여관에 모여 앞으로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

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식량이 바닥나기 직전에  성을 함락했

다는 것이다. 다행이 적군이 쌓아놓은 보급물자가  산더미 같으니 이제

먹을 것 걱정은 없다."

"시민들에게 먹을걸 달라고 애걸하지 않아도 되겠군."

카르트군이 보급물자를 쌓아두었던 창고를 다녀온 다운크람이 밝은 얼

굴로 말하자 카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정말로 남아있던 식량

이 바듯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야."

세렌이 그들이 이곳에 모인 목적을 설명하며  입을 열었다. 연이은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빼앗긴 성까지 되찾아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골치 아픈 문제가 몇 가지 남아있었다.

우선 다도해에서 이쪽을 향하고있는 카르트군의 지원군을 어떻게 상대

할 것인 지였다. 키사르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그  지원군의 규모는

약 2만 여명. 만약 싸운다면 못 이길 것도 없었지만, 아무튼 문제였다.

"그리고 포로에 관한 것인데........"

세렌은 사실 이것이 더 큰 문제라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래

는 다섯 명씩 수용하게 되어있는 프로겐성 지하감옥의 방 하나마다  수

감되어있는 카르트군의 포로들은  30명 정도였다. 전부  바닥에 누우면

빈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턱없이 방이 모자라서  항구의 창고

같은 곳에 포박을 하여 집단으로 수용을 했다.

"저기, 이런 건 어떨까?"

그때, 펠린이 그 두 가지 문제를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의견을 내었

다. 지금 이쪽으로 오고있는 카르트군은 아직  그들이 완패했다는 사실

을 모른다. 그러니까 사신을 보내어 그 사실을 일깨워주고, 포로들을 돌

려보낼 테니까 더 이상의 공격을 감행하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카르트군으로써도 선발로 보낸 8만 여명 중 남은 것은 포로 5천명  정

도라는 사실을 알면 완전히 기가 죽어서 더 이상 덤비지 못할 것이라는

게 펠린의 생각이었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카르트군이 돌려보낸 5천

명의 병사와 합세하여 다시 클라스라인을 공격해 들어온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거 좋은 방법인데, 그럼 어서 추진을 해야지."

세렌의 여러 가지 장점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을 뽑자면 바로  동료들

의 의견을 소홀히 하지  않고 적절하다고 생각될 경우,  두말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일단 결정이 나면  그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결단력과 행동력이었다.

세렌은 바로 적군 사령관이었던 제크트의 설득에 들어갔다. 현재의 상

황을 카르트군에게 알리고, 더 이상 클라스라인군과  싸우는 것이 얼마

나 무익한 일인지를 설명해줄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포로들을 풀어주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제크트는 역시 유연한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 세렌의 부탁에  쾌

히 승낙했다. 그로써도 더 이상 카르트군의 피해를 늘릴 생각은 없었던

것이었다. 이번에는 지리적으로도 우세한 클라스라인군이 2만의 카르트

군과 싸우게 된다면 그 승패는 보지 않아도 제크트로써는 거의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 작은 범선 한 척에 호위하는 크루세이더 몇 명과 함께 지원군

을 향해 떠났다. 아마도 카르트의 지원군은  이미 클라스라인의 해안에

근접해 다가와 있을 테니 만나는 것은 금방 일 것이었다.

제크트는 세렌이 이런 부탁을 해오자 처음에는 혹시 함정이  아닐까하

는 생각도 해보았다. 바로 이 사람이 대답하고 획기적인 전술을 구사했

던 클라스라인군의 사령관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카르트의 지원군을

효과적으로 쓰러뜨리기 위한 술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

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세렌의 모습은 결코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인간의 그것이 아

니었다. 제크트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전신에서 나오는 강한  기운과

사람을 묘하게 끌어당기는  느낌이, 제크트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진실했기 때문이었다.

"저런 기사를 거느린 클라스라인을 상대하려했다니....... 우리가 미련했

군."

작은 범선에 타고, 지원군을 싫고 오고있을 카르트의 배를 향해  가며,

제크트는 혼자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클라스라인군은 확실

히 강했다. 지휘계통의 작전구사능력과 통솔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었으며 병사들의 힘도 막강했다. 특히 화이트나이트라고 불리는 기병의

능력은 제크트로써는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할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우리도 기사를 육성하는 것이 좋겠군.......'

그는 품속에 넣어둔 몇 권의 기사와 관련된 서적들을 바라보며 미래의

재기를 생각했다. 지금부터라도 기사단을 육성하고, 다도해의  사람들에

게 여러 가지 지식들을 전수한다면, 훗날에는 강한 병사들과, 유능한 용

병가들이 탄생할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갑판 위에 서있던  제크트의 눈에 카르트의 대형선박

들의 당당한 모습이 들어왔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훗날을, 먼 훗날을 기약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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