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영광의 기사- (30)
"와, 이제야 내려오네 세렌. 먼저 내려오신 공주 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서로 이야기가 잘 된 것 같은데?"
펠린이 먼저 다가오는 세렌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이제 세렌에게는 저 음흉한 날벌레들이 붙지 않겠군."
다운크람이 중얼거리며 자신이 씹고서 지나친 수많은 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엔 다운크람이 예의 없고 쌀쌀맞은 고지식한 청
년으로 보이겠지만, 정작 다운크람은 그래봤자 뭐 어쩔 거냐는 마음이
었다.
"그런데, 일단 패러딘 나이트가 되고 나니 또 피로가 쌓이는데, 난 키
사르나 다운크람처럼 매정하지 못해서, 도저히 저들을 물리치기가 힘들
것 같아. 오히려, 수련할 때보다 더 견디기가 힘들어."
카젯이 정말로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귀족들의 포박에서 벗어나 한숨
을 쉬었다. 일단 여섯 명의 패러딘나이트가 모여있으니, 그 박력이 엄청
나서 웬만한 사람들은 접근도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건 네가 너무 물렁해서 그렇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확 거절해 버
리면 되는 일을........"
다운크람이 한심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나 이 말은 루벨이나 펠린에
게도 해당되는 말이어서 루벨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펠린은 얼
굴을 붉히며 약간 몸을 돌아섰다.
"이익! 물렁한 것과 다정한 것은 다르다!"
"어디 어떻게? 너의 경우를 들어서 그 차이를 말해봐."
"그, 그것은....."
그러나 말재주가 없는 카젯은 쉽사리 설명하지 못했고 잠시 익익 거리
다가는 생각이 정리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바로 남을 무시하지 않는............"
"큰일입니다! 법왕폐하!"
그때 갑자기 파티 장으로 난입해 들어온 인물이 긴박하게 소리를 쳤
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리었다.
"으윽....... 저건 또 뭐야... 내가 말하려는데."
마침 1층 파티 홀 중앙에서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법왕 파우
킨저 3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연락병으로 보이는 남자를 자신의 앞으
로 데려왔다.
"그래, 무슨 일이기에 그러느냐?"
"남동쪽의 바다에 있는 다도해의 군사들이 처 들어와 프로겐 성을 함
락하고 곧바로, 이곳 세인트룸으로 행군해오고 있습니다!"
"아니, 그쪽은 수십 개의 부족으로 갈라져 있어서 언제나 전란을 벌이
고 있지 않았느냐. 어떻게 그런 일이...."
법왕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미 다도해
가 카르트라고 불리는 부족에게 통일되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지..... 그 시기가 조금 이르긴 하지만......'
그대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바로 국무총관 프레이어 공
작이었다. 사실, 국내의 대부분의 정무를 도맡아 한다고 할 수 있는 이
인물은, 충분히 가능한 위치에 서있으면서도 페이오드의 사시드총관처
럼 독재정치를 펴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능한 인물이 자신의 역할을 조
금이라도 덜어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무능한 귀족관료들에게 맡겼다
간 말아먹기 십상이었으므로, 별 수 없이 자신이 도맡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측, 이번에 선발된 패러딘 나이트들
을 중심으로 새로 차출한 신규병력을 동원하여 프로겐성의 수비병력을
크게 확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일이 조금 일
찍 터져 버린 것이었다. 프레이어 공작이 유능하고 미래의 사건을 예측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뛰어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 시기를
정확히 알아낼 정도로 전지전능하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파티는 갑자기 발생한 긴급상황에 의해 곧 막을 내리게 되었고 분위기
는 금새 혼란과 썰렁함이 동시에 교차하는 독특한 양상을 띄우기 시작
했다.
평소에는 자신의 재산축적과 귀족놀이에만 열을 올리며 나랏일에는 나
몰라하던 클라스라인의 재상 몰튼후작은 갑작스런 긴급 회의에 오랜만
에 그 늙은 몸을 내밀었다. 올해 나이 63세. 모든 일이 힘들어지고, 몸
이 피로해질 시기였으나, 아직도 그에게 자신의 가문에 재산을 모으는
것에는 어느 젊은이 못지 않은 정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가끔 위험시
에만 발동하는 능력 또한 있었으니, 바로 자신, 혹은 자신들, 명문귀족
가의 권력에 위험소지가 있다고 생각되는 새로운 인재들을 처치하는 것
이었다.
제 90회 패러딘 나이트 선발전에서 가장 높은 성적으로 선발되었으며
국내에 엄청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나이트 로니온을 누명을 씌워 국
외로 추방시켜 버린 것도 전부 그의 작품이었다.
"현재, 카르트 부족이 이끄는 다도해의 침략군은 그 규모가 대략 7만
에 가깝다고 합니다. 과연 그중 얼마가 이 수도로 공격해 들어오고 있
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최대한의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군을 보내야
합니다."
프레이어 공작은 위기감을 고조시키며 회의에 참석한 고위 관료층의
귀족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워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
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북부자치도시연합, 지금은 거의 드라킬스와의 경
계라고 할 수 있는 북서쪽의 국경지방을 지키고 있는 패러딘 나이트
NO7 제레딘이 이끄는 섬광의 기사단을 동원하기엔 시간이 걸리므로,
일단 수도에 있는 새로 선발된 화이트나이트 8천과 크루세이더 1만. 그
리고 수도방위 군에 속해있는 화이트나이트 1만 5천과 크루세이더 2만,
그리고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예비병력이 화이트나이트 4천 정도
를 모조리 합세하여 토벌군을 형성. 카르트 군을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령관으로는 이번에 새로 선발된 실력 있고 유망한 인재인 세
렌을 추천했다. 그리고 야전 사령관은 패러딘 나이트 다섯을 휘하로 함
께 동행할 수 있으므로 모자라는 실전경험은 다름 선배 패러딘 나이트
에게 보충시키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이트 세렌이 유능한 인재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를 이번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추천하는 것에 대해서도 찬성입니다."
프레이어 공작의 의견에, 재상, 몰튼 후작은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강력한 반대의견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프레
이어공작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하지만, 수도방위군을동원하는 것은 결사 반대입니다. 만약 나이트
세렌이 지휘하는 군대가 패배할 경우, 우리는 병력도 하나 없이 맨몸으
로 그들을 상대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뒤로 나온 강경한 반응에, 프레이어 공작은 어쩐지......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의도가 훤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역대 최
초로 벌점 0점을 기록하며 패러딘나이트에 선발되어 국내에 엄청난 인
기와 명망을 얻고있는 나이트 세렌을 이번 기회에 제거해 버리겠다는
음흉하고 지저분한 그들의 생각을, 현명한 프레이어로써는 단번에 짚어
낼 수 있었다. 불과 15년쯤 전에도 이와 비슷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그렇다면 불과 2만 2천의 병력으로 7만에 육박한다는 카르트 군을 상
대하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말도 안됩니다."
"호, 또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려 하시는 구만, 저번에 남부자치도시
연합군이 국경을 통과하는 건도 우리와는 아무 상의도 없이 혼자서 처
리해 버리시더니, 이번에도 그러시려고 하십니까, 프레이어 국무총관
님? 하지만 이번에는 안됩니다."
몰튼 후작이 갈라져 듣기 싫은 목소리로 빈정거리며 프레이어 공작의
아픈 곳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번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까!"
"어쨌든 이번 문제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다수결로 처리하도록 합시
다. 국무총관 님의 독단으로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프레이어는 그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총 21명이 참석한
이번 회의에서 벌어진 수도방위군의 동원 결정건안 은 찬성 3, 반대 17,
기권 하나로 인해 기각되어 버렸다. 아무리 프레이어가 국내의 대부분
의 일들을 처리하기는 하지만, 일단 다른 귀족들이 똘똘 뭉쳐 일을 시
작했기 때문에, 법왕이 아닌 이상, 아니 법왕이라고 해도 자신의 뜻을
실행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최종 회의에서 세렌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토벌군에는 화
이트나이트 1만 2천, 그리고 보병인 크루세이더 1만에 보급 수레부대 4
천이 합친 총 2만 6천의 부대로 결성되었다. 그중 다행인 것은 프레이
어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야전지휘관의 결정권과 교전장소 근처의 성과
도시들의 물자를 마음대로 사용할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 정도였다.
'이젠 별수 없군....... 나이트 세렌이 어떻게든 적의 병력에 큰 손해를
입혀주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회의장을 나오는 프레이어 공작의 표정에 어두운 먹구름이 자리잡았
다. 마치 인간의 몸에 붙어 피를 빠는 빈대 같은 이 귀족들은, 언젠 간
분명히 숙주를 사망시켜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공작의 머릿속에 공
포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