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영광의 기사- (29)
세렌은 정중히 예를 갖추어 미네아공주를 에스코트하고는 파티장의 2
층으로 올라가 한쪽에 있는 발코니로 걸음을 옮겼다. 주위에 몰려있던
귀족들은 그저 넋을 놓고 구경만 할뿐이었다.
"이렇게 해두면 더 이상 귀찮은 사람들이 붙지 않을 거예요, 공주가
점찍어 놓았는데, 어느 누구라고 덤벼들겠어요?"
발코니로 나간 미네아는 상큼한 웃음을 지으며 난간에 몸을 기대며 아
름다운 클라스라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초저녁의어두움에 살짝 잠긴
그녀의 모습은 신비스러울 정도였다.
"확실히,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도움이 되었나 요?"
"물론입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혹시 주제넘게 나선 것은 아닌가 했는데."
미네아가 세렌을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뜨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전에 만났을 때보다, 많이 바뀌셨군요."
"그래요? 그거 정말 반가운 소리네요. 전.......... 그날 이후로 많이 노력
했으니까......"
미네아는 조금은 수줍은 듯 말끝을 흐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확실
히, 천방지축에 자기 멋 대로였던 예전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변한 모습이었다.
세렌은 그런 바뀐 미네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즐거운 웃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의 나쁜 점을 알게되면, 바로 그것을 고칠 수 있
는 그녀의 자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것은
비단 그런 그녀의 마음자세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그녀가 예전에는 없던 성숙한 아름다움을
갖추기는 했지만 세렌이 미네아공주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는 확실
히 눈에 확 들어오는 예사롭지 않은 미인이었다. 단지, 세렌은 외모보다
는 우선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성격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그녀의 나쁜
성격에 눌려서 그 아름다운 용모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그 선임조건이 만족된 이상, 세렌도 그녀의 모습에
조금은 녹아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공주인 미네아예요. 나에게 있어서 공주라는 이
름을 떼게되면, 난 보잘것없는 한 여자에 불과하지요."
그녀는 조금은 우울한 목소리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세렌 님. 인간은 인간
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안 그런가요?"
"물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공주로 태어났으니까. 공주가 해야할 일을 다하
며 진정한 나를 만들어가려고 생각해요. 공주로써의 나를."
과연 일 국의 공주다운 생각이었다. 굳이 자신을 싸고있는 모든 포장
을 벗겨서 자신을 보이려는 것보다는, 그 포장까지 진정한 자신으로 만
들어 버리겠다는 말이었다. 세렌은 어쩌면, 이 독특한 공주가 정말로 중
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저는 공주이기 전에 먼저 여자입니다. 그래서, 먼저 여자로써
의 저 자신에 충실하려 합니다. 그러니까......."
미네아 공주는 몸을 돌려 세렌을 바라보며 조금 얼굴을 붉혔다.
"저의..... 기사가 되어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세렌 님. 이건....... 예전
에 말했던 것 과 같은 귀부인에게 바치는 기사의 봉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미네아는 조금 말을 머뭇거리다가는 작은 목소리로 기어 들어가듯 말
했다.
"단지..... 제가 세렌 님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 사랑하기 때문에..... 평
생을 함께 있어달라는 것입니다."
'말했다!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며 두근거리는 그녀 자신의 마음을
진정하기 시작했다.
"공주 님은....... 전과는 많이 달라지셨지만, 그 적극적인 면은 그대로이
시군 요."
세렌은 빙그레 웃으며 미네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전과
는 달리 명령이 아닌 부탁이었다. 그리고 세렌은 그런 그녀가 싫지 않
았다. 아니, 오히려 무척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사랑스럽다' 라고
느끼는지는 의문이었지만.
"........................."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적극적인 면이 남아있어서 다행입니다. 그것은
공주 님의 멋진 장점이니까요."
그러자 미네아의 표정이 조금 환해지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꺼내
었다.
"그러면.........."
"하지만, 저는 공주 님의 기사가 될 수 없습니다."
순식간에 공주의 얼굴이 어둡게 변해가며 엄청난 실망감에 잠기어 갔
다.
"거절........ 이신가 요....."
"아니요. 거절은 아닙니다. 단지 그것이 보통 기사의 의무인 귀부인을
섬기는 것이 아닌 이상, 서로를 좀더 알고, 느껴야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조금은 멋 적게 웃으며 세렌은 말했고,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미
네아의 표정이 잠시 후에 거의 기적처럼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마
치 그 짧은 순간에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다녀온 듯한 기분과 표정의
변화였다.
"너무하세요, 세렌 님. 저는 잠시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구요."
미네아의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으나, 그음성과 표정에는 감추지 못할
커다란 기쁨이 가득 차있었다. 정말로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만약 제가 잠시 공주 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용서를 부탁
드립니다."
"벌써 용서했어요. 후훗......."
그녀는 방끗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또 봐요. 나의 예비기사 님. 그리고 저는 계속 노력해서
그에 어울리는 여자가 되어 있을 께요."
그리고 그녀는 인사하며 총총걸음으로 세렌을 남겨둔 체 발코니를 빠
져나갔다. 더없이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하아......나도 운이 좋은 남자군.......'
세렌은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
았다. 방금 전,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미네아공주는 저 하늘에서 무
엇을 보았을까.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다급하고, 용감하게 만들었을까.
"그게 사랑이라는 것이겠지...... 다른 사람을 무척 좋아하는 감정........."
그리고 세렌도 잠시 후 다시 파티 장으로 돌아왔다. 1층을 내려다보니,
그를 제외한 다섯 명의 패러딘 나이트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는 것이 그
의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