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영광의 기사- (26)
역대로, 패러딘나이트의 최종 선발전 중 마지막 관문은 언제나 지하미
로의 탈출이었다.
언제나 총 6개월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는 이 관문에서 가장 먼저 나오
는 16명에게 명예의 기사가 되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10여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역대의 패러
딘나이트들 사이에는 이 관문에 대한 악평이 자자했다. 아무 예고도 갑
자기 실전으로 몬스터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해나가야만 하기 때문에
부상자와 사상자가 다수 발생한 것이었다. 이때까지 잘 버텨온 수련생
들이, 이 마지막 관문에서 목숨을 잃는 다는 것은 정말로 아까운 일이
었다. 차라리 중도에 탈락하여 화이트나이트가 되는 편이 훨씬 좋은 일
이었다.
그러나 신전 측에서는 결코 이 관문의 폐지에 대하여 이야기조차 꺼내
지 않았다. 아무리 아까운 목숨들이 죽어나가도, 한낮 몬스터의 먹이가
되어서 덧없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신전은 이 관문을 지금까지 고수하
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협동을 하지 않으면 결코 통과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이유 때문인지, 현존하는 패러딘나이트들은 각자
서로간에 대단히 사이가 좋았고, 어느 전장에서나 믿고 서로에게 목숨
을 맡길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자신이 반드시 물리쳐야할 적을 상대할 때는, 자신
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패러딘 나이트가 반드시 명
심해야할 세 가지 기사도중에 하나였다.
세렌일행이 목숨을 걸고 이 미로를 헤 메이기 시작한지 약 4개월이 지
났다. 물론 본인들이 정확한 날짜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략 그
정도쯤 지났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초 키사르의 예상과는 달리 현재 일행이 위치한 곳은 미로
의 7층이었다. 일단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환자 두 명을 동행하기 때문
에 이동이 늦어진 것이기도 하였지만, 식량이나 등잔의 기름을 얻기 위
해서 알고있는 정상 통로가 아닌 부분을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환자 둘에 대식가 하나, 그리고 바보까지 하나 있으니 당연히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다운크람은 현 상황을 이렇게 평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마음씨 넓은
대식가는 그저 웃으며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흥분 잘하는 바보는
금새 발끈하며 대들었다.
"설마 바보가 나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글세, 반응을 하는걸 보니 자신에 대해서 알고는 있는 모양이군. 다행
이야."
카젯은 결코 말에서만큼은 다운크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덕분에 언
제나 놀림을 받으며 지내왔던 카젯이었는데, 금새 잊어버리는 성격이었
기 때문에 그 세세한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했다. 그저 '나만
보면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 난 다운크람' 이라는 인식만이 그의 머릿
속에 깔려있을 뿐이었다.
"결코 아니얏!"
"음,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을 나타내는 것이지."
잠시 후 다운크람의 말뜻을 이해한 카젯이 한층 더 발끈하며 소리쳤으
나 다운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런 게......."
카젯은 억울한 듯 다시 뭐라고 말하려다가, 결국 고개를 숙이며 포기
하고 말았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을 참지 못했기 때
문에 문제였다.
그러나 그렇게 악담까지 나누며 비교적 편하게 진행해온 일행이, 새로
운 계단을 찾아내고는 7층으로 올라가게 되면서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올라가자마자 즉시 알 수가 있었다.
"제길! 이곳은 나와 펠린, 다운크람이 맡고 있을 테니까 너희들은 먼저
출구를 찾아 달려가!"
세렌은 재빨리 소리치며 들고있던 녹슨 검을 바짝 세워들었다. 지금까
지는 많아야 열 마리 미만의 숫자로 뭉쳐 다녔던 카우렛사라고 불리는
강력한 몬스터들이, 8층에 올라가자마자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
도로 무더기가 나타난 것이었다. 일단 세렌과 펠린, 다운크람은 최대한
좁은통로에서 그들과 맞서 싸웠다.
"길은 알고있나!"
키사르가 소리치자, 세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 동안
키사르에게 많이 들었기 때문에, 미로의 통로로 가는 길은 세렌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쳇.... 마지막 대 반격이라는 건가...... 엄청난 숫자 군."
다운크람이 빈정거리며 들고 있던 롱소드로 달려드는 카우렛사의 복부
를 단숨에 관통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다시 뽑아들며 비틀거리
는 그놈을 발로 냅다 차버렸다. 한 놈 해치웠다고, 잠시 쉴 정도의 여유
가 주어지지 않았다.. 단지 길이 좁기 때문에 단번에 덤벼들지 못하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적의 잔여 숫자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왜 이렇게 떼로 몰려서 우리를 공격하는 거지? 우리는 아무 원한도
진 것 없는데!"
"배가 고픈가 보지. 우리는 저 녀석들을 몬스터로 보지만, 저 녀석들은
우리를 식량으로 보니까."
펠린의 푸념에 세렌이 또 하나의 카우렛사의 목을 날려버리며 가볍게
대답했다. 실로 섬짓한 일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곧
바로 저 괴물들의 먹이로 탈바꿈된다는 사실이.
그러나 그 불안한 마음을 더욱 증폭이라도 시키듯, 카우렛사들은 끊임
없이 몰려들었다. 벌써 10여 마리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지만, 눈에 보이
는 적의 숫자만 해도 그 두 배가 넘었다. 분명 보이지 않는 그 뒤쪽엔
더욱 많은 숫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숫자적인 열세 때문에, 그들은 점점 뒤로 밀리고 있었다.
키사르의 신속한 지시에 따라, 카젯과 루벨은 출구를 향해 착실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곧 또 하나의 카우렛사들의 무리와 만나면서
부터 일이 틀어졌다.
"제길! 무기도 없고 등에는 환자까지 업혀있는데 이대로 싸울 수는 없
어!"
카젯은 계속되는 불운에 한숨을 내쉬며 별수 없이 적들을 피해 출구가
아닌, 다른 쪽을 향해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어쩌지 키사르?"
"일단은 도망가는 수밖에."
카젯의 다급한 질문에 일단은 무책임한 대답을 하며 키사르는 머릿속
으로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출구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쪽으로 가는 길을 적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무기만 있다면 막강한 실력을 가진 루벨과 카젯이 실력으로 뚫
고 갈 수도 있었지만, 현재 무기는 전부 자신들과 떨어진 다른 동료들
이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엄청난 민폐를 끼치고 있는 쓸모 없는 환자
가 무려 두 명이나 딸려있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생각이 깊은 키사르
라 할지라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한다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
'8층은 규모가 작아서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더 심각한 문제
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 층들과는 달리 8층은 미로가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았으며 실제
크기도 매우 작아서 올라오는 계단에서부터 약 한시간만 달리면 출구에
도착한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한시간의 거리가,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제길! 막다른 곳이야!"
카젯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바로 고개를 돌려보니, 저쪽 통로에서는 한
무리의 카우렛사들이 떼거지로 달려들고 있었다. 절대 절명의 위기였다.
"쳇....... 맨손으로 싸워야 하나......."
카젯과 루벨은 업고있던 파울프와 마일젠을 구석에다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모르며 세상 모르고 기절해 있었
다.
"아아.... 나도 기절하고 싶다....."
카젯이 막 달려드는 적들을 주먹으로 상대한 생각을 하며 아찔한 현기
증을 느꼈다. 현재 기절해 있는 저 두 명도 맨몸으로 카우렛사들을 상
대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심각한 상처정도로 끝
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다른 통로에서 무엇인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더니
선두에 있던 카우렛사들을 단숨에 베어버렸다. 모두 세 명 . 그리고는
태세를 갖추어 바로 막다른 골목을 막아서서 적들을 상대할 체제를 갖
추었다.
"세렌! 그리고 그밖에...."
카젯은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믿음직한 동료 세 명을 바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밖에 가 뭐야. 이젠 설마 이름마저도 잊어버린 건가?"
"아니...... 그런데 아까 상대하던 적들은 모두 해치운 거야?"
카젯이 미안한 듯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세렌이 피곤에 지친 얼굴을
찡그리며 대신 대답했다.
"너무 많아서 도망쳐왔어."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렌들이 달려왔던 통로에서 또 엄청난
숫자의 카우렛사들이 쇄도해 왔다.
"엑! 그럼 더 늘어났잖아!"
"출구는 어떻게 된 거야!"
다운크람이 경악하는 카젯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 몬스터들의 건너편에 있다."
대답을 한 것은 키사르였다.
"이런!"
"다운크람! 검을 건네줘. 이번엔 내가 대신 싸울 테니......"
카젯이 이를 갈며 지쳐있는 다운크람에게 검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키
사르도 펠린에게 검을 건네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루벨은 전열에 서지
않고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세렌도 지쳤어! 네가 대신 싸워주라구."
"그건 아는데, 그보다 먼저 좀 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펠린의 말에 루벨은 갑자기 그 거대한 덩치로 점프를 하며 천장을 주
먹으로 가격했다. 루벨의 주먹이 천장에 부딪치자, 천장을 돌 부스러기
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작은 진동음을 내었다.
"뭐 하는 짓이야!"
"역시 감이 오는데, 좀 더 두고보라고."
루벨은 빙그레 웃으며 두세 번 더 뛰어올라 천장을 가격했다. 그리고
네 번째의 충돌이 끝나자, 낮은 천장은 빠직거리는 파열음을 내며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모두 머리 위를 조심해!"
루벨의 외침에 모두들 상황을 파악하고는 몸을 숙여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막 전투를 벌이고 있던 카우렛사들은 갑작스런 세렌들의 행동
에, 영문을 모르고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곧바로 엄청난 굉음과 함
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카우렛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떨어지는 돌
덩어리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빛이다!"
카젯은 천장에 난 커다란 구멍에서부터 들어오는 엄청난 빛에 놀라며
소리쳤다. 너무도 오랜만에보는 태양의 빛이라, 눈이 부셔서 제대로 바
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카우렛사들은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한 듯 했다. 아무래도 야행
성인 듯, 햇빛이 미로 안으로 들어오자,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 도
망가기 시작했다.
"멋져 루벨! 그 주먹으로 저 엄청난 몬스터들을 쫓아버린 거야!"
펠린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태양이,
그들을 축복해줄 뿐만 아니라, 적들까지 퇴치해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약 4개월에 걸친 마지막 7차관문의 끝을 알림과 동시
에,장장 10개월 동안 진행되었던 최종관문의 막이 내리는 것이기도 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