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영광의 기사- (23)
짙은 황혼이 깔리며, 클라스라인의 수도, 세인트룸의 아름다운 도시에
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하나, 둘 자신의 집을 찾아 돌아가기
시작했고, 가게들도 하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물론 밤늦게까지, 혹은
하루 24크락동안 내내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도 있었지만, 그
런 가게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잠이..... 안 와....."
미네아 왕녀는 자신의 별궁 2층 방에서 발코니에 기대고는 멍하니 별궁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벌써 잠 못 이루던 날이 며칠 째이던가. 한 인간에게 푹 빠지
면 이렇게 되는 것인지, 새삼 깨 닳고 있는 미네아 왕녀였다.
자신의 옷 만드는 솜씨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그것을 세렌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속으로 애태우며 안타까워하기만 했다. 지금은 그가 최종
관문에 들어갔기 때문에 소식조차 알 수가 없었다. 공주의 권한으로 굳
이 알아보고 싶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녀는 세렌이 관문을 통과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믿어.....믿지.... 하지만..... 그래도 왠지 불안해... 혹시 실수라도 해서
떨어진 것은 아닐까...."
그러나 또 다른 자신의 마음은 한없이 걱정스러웠고, 불안했으며, 당장
이라도 달려가 확인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믿기 때문에 더욱 걱정
되는 것, 그것이 공주의 마음을 끈질기게 애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세렌이 패러딘 나이트가 되는 그날까지, 결코 만나거나 그에
대하여 알아보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녀였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그와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아무리 클라스라인 최고의 직조기법을 배우며 자신을 발전시키고 있는
그녀였지만, 어딘가 허전하고 모자라게 느껴졌다. 과연 자신은 그것을
채울 수 있을 것인가. 세렌이 당당하게 자신의 힘으로 패러딘나이트의
지휘를 얻게되었을 때, 자신은 과연 그에 뒤지지 않는 인간이 되어 있
을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보고... 싶어. 그의 얼굴이......"
지금 한번 만이라고, 저 먼발치에서라도 그의 얼굴을 볼 수 만 있다면
자신의 마음은 차분하게 진정될 것만 같았다. 만일 그럴 수만 있다
면......
"안돼. 그럴 수는 없어. 기운을 내야지...."
미네아 공주는 홀로 중얼거리다가는 갑자기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앞으로 6개월. 남은 시간이 마치 무한한 시간처
럼 느껴지는 그녀였다.
대신전 지하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미로.
원래는 국가 반역죄라던가 신성 모독 죄와 같은 중죄를 저리는 죄인들
에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었으
나, 너무 잔혹하다는 신관들의 항의에 의해 성의전쟁 약 200년 후에 폐
쇄된 비밀스런 장소였다.
그 규모는 가의 미로라고 불릴 만 할 정도로 거대했으며, 여러 갈래로
길이 어긋나있어 상당히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1크락 이상의 시간동안 계단을 내려간 세렌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신
이 벌써 미로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벌써 돌아가는 길
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며, 좁은 통로와, 넓은 통로가 번갈아 가며 나
오는 까닭에, 방향 감각을 상실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
차 자신이 미로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왔다.
'이건........ 만약 여기서 길을 잃고 결국 쓰러진다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이번 관문에는 포기란 용납되지 안나보군.......'
일단 문제는 식량이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식량을 마련하라는 것인
지, 세렌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그가 가고있던
기 저편에서 무엇인가 거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그리고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의 모습이 세렌의 눈에 들어오자,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네 개의 송곳니, 미쳐버린 황소를 생각
나게 하는 얼굴. 갈색의 털로 덮여있는 날렵한 몸, 민첩한 몸놀림. 바로
한때 대륙에서 번성했지만, 인간들의 협공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는 카우렛사라는 몬스터였다. 이들은 현재 깊은 산악지방이나 협곡에
만 소수가 서식한다고 전해져오는 포악한 몬스터였다.
물론 세렌이 카우렛사를 알아볼 리가 없었다. 웬 괴물이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긴장하며 노려볼 뿐이었다.
'몬스터.... 무기도 없는데. 맨손으로 상대해야 하나?'
세렌은 재빨리 바닥에다 등잔을 내려놓으며 순간을 노려 몬스터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기가 없는 한, 일격으로 급소를 공격하지 않으면
상대를 죽이기가 어려웠다.
세렌의 주먹은 카우렛사의 명치부근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서로의 힘
이 동시에 실려있었기 때문에, 카우렛사는 그 충격에 주위의 늑골이 부
러지는 소리를 내며 뒤로 20세션쯤 날아갔다. 검과 창으로 단련된 세렌
의 팔은, 아무 무기도 없이 그냥 주먹을 휘두른다 하더라도 충분히 살
인적인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카우렛사는 꿈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그 정도의 충격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모습이었다. 거친 숨소리와, 부릅뜬 눈동자, 그리고 엄청
난 살기는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이런...... 어쩌지? 육탄전으로는 안 된다는 것인가? 보통 몬스터가 아
니다.........'
세렌이 긴장하며 다시 달려드는 적을 노려보고 있을 때, 순간적으로
멈칫하더니 갑자기 달려오던 카우렛사의 몸이 정지해 버렸다.
"엥?"
갑작스런 상황에 의아해하던 세렌이었으나, 곧 멈춰있던 카우렛사가
앞으로 쿵, 하며 쓰러지자, 쉽게 방금 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쓰러진 카우렛사의 등뒤로 익숙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뒤로 또 다른 사람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펠린! ............. 키사르까지?"
펠린은 빙긋 웃으며 쓰러진 카우렛사의 뒷머리에 박힌 작은 단검 하나
를 뽑아 들었다.
"세렌이구나. 정말 오래간만이야."
"정말이야. 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그것은 내가 설명해 주겠다."
뒤에서 키사르가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이곳은 예전부터 이곳에 지어져 있었던 죄인들의 처리하기 위한 미로
야. 예전에 오래된 책에서 읽은 적이 있지."
키사르는 이 미로의 원래 목적을 설명하며 사실은 이 미로의 입구는
한군데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였다. 입구는 여러 개인데, 출구는 하나
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리고 그 다음의 말은 이곳에서 희망 없이 헤 메이고 있던 세렌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이곳의 지도를 봤단 말이지?"
"그렇다."
"설마 잊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오래 전에 본 것이긴 하지만. 대부분 기억은 난다."
키사르의 말에 따르면, 이 미로는 총 8층의 구조로 되어있는데, 그 규
모가 지상에 있는 패러딘나이트의 수련관의 몇 배를 상회하는 엄청난
것 이여서 길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대략 3개월은 걸린다고 하였다.
"3개월! 길을 알고있어도 그 정도란 말이야?"
펠린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키사르는 예의 그 표정 없는 냉담한 얼
굴로 대답했다."
"그래. 길이 너무 꼬여있어서."
"음..... 그렇다면 3개월 치의 식량을 준비해야 된다는 소리이군."
세렌이 쓰러져서 숨을 거둔 카우렛사의 거대한 덩치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라도 먹어야 하나?"
"그래야 할지도, 하지만, 군데군데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떨어져 있어,
이 단검도 주운 것이고, 아무래도 신관 님들이 여러 가지로 배려를 해
놓은 것 같은데."
펠린은 그밖에도 약간의 기름이 들어있는 가죽주머니와 말린 고기 몇
조각을 꺼내들었다.
"먹는 것은 인간답게 하라는 것인가..........."
세렌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체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이 몬스터를 잡아와 이곳에 풀어놓았으며 도 언제 이 미로의
군데군데마다 여러 가지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을 놓아두었단 말인가.
그야말로 엄청나게 치밀한 준비였다.
"신관 님들이 고생 꽤나 했겠군. 미로를 해쳐나가며, 땅에 있는 아이템
들을 주스며, 몬스터까지 해치우라는 것인가?"
그때, 세렌의 뒤에서 넉살 좋으며 느긋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
이 고개를 돌려서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정겨운 목소리였다.
"루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