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영광의 기사- (20)
"............. 2만! .......... 끝이군."
다운크람은 냅다 소리치며 휴페리온을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곧바로
뒤로 쓰러져버렸다. 드디어, 4차관문의 마지막날이 끝난 것이었다.
그를 지켜보던 신관도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어 보였다. 물론 신관
이 숫자를 세어주기는 하지만, 꼼꼼한 다운크람은 행여나 하나의 실수
라도 있을까봐, 자신이 횟수를 일일이 세면서 휴페리온을 휘둘렀다.
모래시계도 거의 안 남아있었다. 그야말로 오늘하루는 시작부터 끝까
지 일정한 속도로 계속하여 검을 휘두른 셈이었는데, 팔의 근육은 이루
말할 것도 없고, 가슴, 허리, 다리, 할 것 없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픔
이 느껴졌다. 격렬한 근육통. 4년간 단련된 그의 몸으로써도 견디기 어
려운 극심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번 한 달간의 집중수련으로 인하여
회복시간이 무척 짧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가문을....'
관문을 통과하는 도중,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면 언제나 몰
락한 귀족 가문의 가장으로써의 책임을 되 뇌이며 이를 악물었다. 그가
목표를 이룩하기 위한 열망은 육신의 고통정도는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열망으로도 견디기 힘들 때가 오면,
행운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언제나 머릿속에 생각나는 모습이 그의 정
신력을 바짝 몰아세웠다.
'카젯녀석에게 질 수는 없어! 그 녀석도 분명히 지금까지 남아있을 텐
데!'
자신의 생각으로는 무척 떨어지는 두뇌에서 나오는 기억력, 연산력, 추
리력, 판단력을 가지고 있으며 오직 믿을 것이라곤 육체뿐인 가련한 동
료인 카젯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면, 막 포기하고 싶어졌던 마음도 금
새 하고자 하는 욕망이 열정적으로 불타오르는 것이었다.
평소에 독설과 비난으로 끈끈하게 뭉쳐졌던 둘의 사이가, 이럴 때 정
말로 도움이 되고 있었다. 물론 '서로 힘을 내야지!' 가 아니라 '저 녀석
에게만은 질 수 없어!' 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정말 졸렬하고 무식한 관문들이다. 이런 것은 몸밖에 믿을 수 없는 카
젯에게나 딱 어울리는 일인데.'
이런저런 이유로부터 힘을 얻으며 어쨌든 4차 관문까지 무사히 통과한
다운크람의 지금까지 관문들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오직 무한한 체
력과, 인내가 필요한 이 관문들은, 적어도 육체의 힘보다, 정신적인 힘
을 더 강조하는 다운크람에게 있어서는 살인적인 지옥을 맛볼 수 있었
던 절호의 기회였다. 억지로 통과하기는 했지만, 불만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체력과 끈기만 있으면 패러딘나이트가 될 수 있다는 건가? 말도 안
된다. 적어도 군 계통의 상위에 위치한 직분이라면 힘뿐만 아니라 아군
을 지휘하는 냉철한 판단력과 계산력, 그리고 작전구사능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다운크람은, 적어도 클라스라인의 전 부대의 사령관을 맡고있는 패러
딘나이트가 되려면, 여러 가지 필요한 요소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고 생
각했다. 물론 그는 전략이나 전술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적
어도 전쟁이라는 것이 체력과 끈기, 다르게 말하면 노력과 근성, 패기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다. 만약 머리
는 돌인데 힘만 엄청 세고 근성이 뛰어난 사람들만 무더기로 패러딘나
이트가 된다면, 과연 그들이 벌이는 전쟁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오
직 아군, 적군의 숫자는 상관없이 '전군 돌격! 우리의 힘을 보여줘라!'라
고 외치는 꼴사나운 모습이 될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아무튼 문제가 있어...... 규정에 의하면 패러딘 나이트가 한 부대의 사
령관이 되면 부관 역시 패러딘나이트로 임명해야 하는데..... 전부 머리
가 그게 그건데 작전이고 자시고가 있겠어? 정말 한심한 제도야.......'
그래도 다운크람의 앞날이 밝은 것은, 그래도 이번 동기들 가운데 머
리가 뛰어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키사르와 세렌으로 키사
르는 모든 상황을 통찰하고, 뛰어난 지식과 정보력을 통하여 아군이 펼
칠 수 있는 최선의 작전을 구사하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아직 실전을
거치지는 않아서, 과연 정확한 그 능력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
쪽 방면에서 무능력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세렌은 뛰어난
판단력으로 순간순간마다 위기를 대처하는 능력을 보여줄 것이 틀림없
었다. 그리고 그는 주위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묘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어서, 군대의 통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 틀림없었다.일반 병
사들뿐만 아니라 화이트나이트들에게서도 절대적인 믿음을 얻고있는 패
러딘나이트였는데, 거기에다가 선발전에서 벌점 0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세렌이 군대를 지휘한다면, 아군의 사기는 극도로 상승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판단들은 대부분 다운크람의 통찰력과 그 동안의 행동, 그리고
대화를 통하여 종합한 가정이었는데, 냉철한 시선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다운크람의 능력은 거의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으므로 그 가정이
현실로 나타날 확률은 아주 높았다.
그리고 다운크람자신은 숫자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지
고 있었다. 얘를 들면 아군의 숫자에 따른 보급물자계산, 목표지점까지
의 행군예상 날자. 그리고 물론 시켜줄 리가 없겠지만 행정과 관련된
금전적인 문제는 그의 앞에서면 간단한 숫자계산으로 전락해 버릴 뿐이
었다. 그만큼 그의 숫자에 대한 감각은 선천적이었다.
그러므로 이번 패러딘나이트 선발전은 진정한 인재를 뽑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운크람은 신관의 지시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워있던
것이 겨우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모래시계의 위층에 있던 모래들이
전부 아래층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4차관문
의 마지막날이었다.
신관은 다운크람을 5차 관문의 장소로 데리고 갔다. 산 아래로 내려가
자 바로 말이 대기되어 있었는데, 결국 말을 타고 신관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대신전이었다.
"또 여깁니까? 난 이번에는 어디 사막에라도 데려가는 줄 알았지."
다운크람이 빈정거리며 신관에게 말하자 신관은 전혀 동요되는 기색
없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하지만 그와 비슷할 것입니다."
약간 묘한 대답을 들은 다운크람은 의아해 하며 머릿속으로 방금 전에
신관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와 비슷하다? 사막과?'
신관은 다시 예전에 1차 관문을 했었던 그 비밀 지하통로로 내려갔다.
애초에 통로의 문이 열려있는 것으로 보아선 누군가 다른 수련생들이
먼저 내려간 듯 했다. 수련생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교묘히 시간대
를 조종한 주최측의 능력이 새삼 감탄스럽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이윽고 다운크람과 신관은 길고 긴 계단을 전부 내려갔고 예전에 다운
크람이 사용했던 그 방 앞에 도착했다.
"5차 관문은 이곳에서 진행됩니다."
"음...... 또 선배님들의 장난이 시작되는 것입니까?"
다운크람은 전에 통과한 1차 관문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때 다운
크람은 특이한 방법으로 식량을 빼앗아 가는 패러딘나이트를 제압했는
데, 어떻게 했느냐하면, 일단 첫 번째 식량이 사라졌을 때, 옷의 실을
약간 풀어서 나머지 식량에다가 묶어놓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 끝을 자신의 옷에다 묶어두었는데, 자다가 미세한 떨림을 느낀 다
운크람은 다짜고짜 달려들어 그 신경 쓰이던 식량도둑을 잡아버린 것이
었다.
자신의 중얼거림에 오로지 미소로만 대답을 한 신관은 방의 문을 열어
주었고, 들어가는 다운크람에게 역시 한달 간 버텨야하며 시간이 되면
자신이 문을 열어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포기하고 싶으면 문을 두드리
라고 말과 함께.
"또 버티기인가......"
다운크람은 중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의 모습은 전과 동일했
다. 여전히 문이 닫치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식량, 식수, 세면대의
위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내용물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식량과..... 물이 전에 있었던 량의 절반정도이다. 그리고 세면대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 씻지 말라는 것인가?'
무언가 석연치 않은 사실이었다. 물론 전에 것보다 절반의 식량으로도
한 달간 버틴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이외에 벌
어질 사건이었다.
'또 빈틈을 보이면 식량을 가져가려나....... 무슨 속셈이지? 이제 두 번
통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텐데.....'
다운크람은 호기심을 느끼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물론 이제 시간이지
나고 보면 전부 풀리게 되어있는 호기심이었지만, 사전에 미리 예측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운크람은 이번 관문의 공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전번의 1차 관문에서의 두려움을 능가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괴로움을 시험한다는 것을
"더워....... 지는데."
방의 온도가 점점 오르고 있었다. 처음엔 서늘했던 방의 기온이 점차
오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한여름의 땡볕 아래서 느끼는 무더위를 능
가하는 엄청난 열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금새 땀이 비오듯 솟아나기 시
작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분이군........"
다운크람은 이 관문의 계획했던 그 누군가에게 감탄하며 웃옷을 벗어
버렸다. 조금이라도 더위를 피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해결되기는 곤란한 잔인한 상황이었다. 이런 엄청난 더위
속에서 한 달을 버티는 것. 솔직히 하루나 제대로 버틸 수 있을까 걱정
이 앞서는 다운크람이었다.
'식량이 절반 주어진 것은 상관없지만.... 물의 량이 절반이 된 것은 치
명적이군....... 그런데......'
잠깐상식적인 문제가 떠오른 다운크람은 고개를 저으며 물통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물통은 위가 열려져있었다. 이 열기에 이대로 냅두면
다 먹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상당량이 증발해 버릴 것이 틀림없었
다.
'가뜩 양도 적은데..... 그나마 있는 것을 줄일 수는 없지.'
그는 반대편 상자에 있는 식량이 담겨진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꺼내어
안에 있는 식량들을 전부 바닥으로 쏟아놓았다. 그리고는 그 가죽주머
니로 물통의 위를 덮어놓았다. 최소한 증발된 물들이 그 가죽주머니에
다시 모이게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무료한 버티기가 시작되었다. 엄청난 더위, 끈적거리는
땀. 타 들어가는 목. 거의 신경이 마비될 지경의 고통이었다.
'제길....... 힘들다. 장난이 아니군. 사막과 비슷하다는 말이 사실이었
군......'
다운크람은 조금 전에 신관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이런 끔직한 고통을 참아내며 한달 이라는 길고도 긴 시간을 버텨
낼 수 있을까. 자못 궁금해져왔다.
'지금까지가....... 아까워서라도 절대 포기 못한다. 여기서 포기하면 우
리 가문을 일으키는 것은 절망적이 된다. 게다가.............'
다운크람은 눈을 감으며 자신의 인내심을 증폭시키는 매개체를 떠올리
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