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영광의 기사- (18)
"오, 크랭크아닌가, 회의는 어땠지?"
회의가 끝나자마자 세피로이스의 1층 주점으로 몸을 옮긴 크랭크에게
미리 와서 자리를 잡고선 주점의 점원 처녀와 언제 또 친해졌는지 웃으
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하인스가 손짓을 했다.
"나야 꿔다 논 보릿자루였지 뭘..... 킬츠대장 대신 간 건데 뭐, 그것보
다 자네는 언제 또 이런 미인을 꼬셨나?"
점원처녀가 자리를 비켜주며 본래의 활동으로 돌아가자, 하인스는 빙
그레 웃으며 과연 파울드 최고의 바람둥이다운 미소를 그녀에게 보내었
다.
"보이고, 느낌이 오면 바로 이야기를 나누고, 친해지는 것이 젊은 남녀
의 숙명이 아니겠는가."
"글세, 자네의 현란한 화술과 미소에 넘어간 것은 아니고?"
크랭크가 하인스의 말을 비꼬며 자신의 컵에 맥주를 따르자, 하인스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내가 워낙 뛰어난 걸 어쩌겠나.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붙
잡지 않는다. 이게 내 신조인데."
"뭐, 마음대로 하게. 그 일도 한철이니까. 자네도 이제 30대의 중반이
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해 두라구."
"그래서 이렇게 열성적으로 활동하지 않나.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을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허튼 소리....."
크랭크는 하인스의 술술 넘어가는 화려한 말투에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대장은 함께 오지 않은 모양이지?"
잠시 후, 하인스가 조금은 진지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내며 크랭크에게
말했다.
"그런가봐, 뭐, 별일은 없는 모양이네만."
"아름답고 날카로우며 차갑기로는 뒤따라올 자가 없는 우리의 뉴린젤
천인장께서 동행하셨는데 별일이야 있으려고."
"물론, 게다가 대장과 절친하다는 마법사 양반 하나도 함께 가지 않았
나. 걱정은 없지만....."
크랭크는 조금 불안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장은 너무 몸을 사릴 줄 몰라서 말이야. 어디 가서 또 무슨 큰 문
제에 휘말린 것은 아닌가 해서."
"그럴지도.... 하지만 그것도 재미있지 않겠나. 여기 이렇게 죽치고 않
아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는것보다야 훨씬 보람있겠지."
"물론... 할 일없이 여자나 꼬시고 있는 것보다도 말이야."
크랭크는 웃으며 또 한잔의 술잔을 단숨에 비워내었다. 한 명은 파울
드 제일 가는 주량을 가진 술고래이며, 나머지 한 명 역시 파울드 제일
가는 여자 후리기의 대가였다. 벌써 한쪽이 마셔댄 술통과, 또 한쪽이
거쳐갔던 여성들은,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했다. 물론
서로의 취미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언제나 옆에 있는 동료였고, 전쟁터
에서 밤을 새운 전우였다. 이미 그런 농담쯤은 서로에게 예삿일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첫날을 휴페리온 휘두르기 5천 회, 다음날은 5천 5백 회, 그 다음 날은
6천 회....... 마치 고리대금 업자에게 빌린 돈에 착실하게 이자가 늘어가
는 것과 같은 이 무서운 숫자의 증가에 경악하고있는 카젯이었다. 카젯
은 분명히 그날 갚아야 할 돈을 모두 갚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원금이
줄어들기는커녕 이자가 늘어가기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급기야
하루에 휘둘러야할 횟수가 1만 회를 돌파했고,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어
만 갔다.
"우웅.......... 하~암. 으윽........ 오늘은 1만 2천 500회.... 미치겠구만, 팔도
아직 뻐근한데......"
어제의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날이 찾아온 카젯은 정좌를
한 상태로 앉아있는 신관의 옆에 놓아진 모래시계를 원망스러운 눈빛으
로 바라보았다.
처음 몇 일은 그런 대로 할만 했다. 애초에 횟수를 늘려가며 4년간 수
련에 임했던 과거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불과 10일이 지나고 나서부터
는 매일매일이 자신의 한계와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금씩 이 엄청난 숫자에적응되어 가는 막강한 자
신의 육체를 느끼며 감동하고 있기도 했다. 문제는 정신력이었다. 한번
잡으면 결코 끝날 때까지 놓지 않는 그 집중력. 그것이 이번 관문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만약 중간에 쉬고 한다고 생각했을 경우, 축적
된 피로가 휴식시간을 노리고 일순간에 두 팔을 점령해버리기 때문에,
차라리 끝날 때까지 버티며 나중에 한번에 휴식을 취하는 것이 훨씬 바
람직한 방법이었다.
"오늘은 1만 2천 5백 회입니다. 시작하시려고요?"
얄미운 신관인 빙긋 웃으며 막 눈을 비비며 일어난 카젯에게 묻자, 카
젯은 조금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하고 보는
것이 속 편했다. 중간 중간에 고통을 견디는 것은 그때 그때에 해야할
일이었고.....
"..............."
카젯은 평범한 속도로 휴페리온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거나,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이 가장 힘이 적게드는 경제속도를 지키지 못
할 경우, 중간에 자멸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처음 1만회에 도전했을
때도 이것을 지키지 못해 결국 잇몸에서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며
오기로 버틴 기억이 남아있었다.
신관은 카젯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휴페리온을
휘두르는 숫자는 속으로 계산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신관의 숫자세
기는 충분히 믿을 만 했기 때문에 카젯은 이 신관이 뭣 하러 숫자를 속
이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며 결코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
다.
카젯은 문득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모두 다 잘 버티고
있을까, 혹시 중간에 떨어진 사람은 없을까하는 그런 생각들이 카젯의
몸에 오히려 더 큰 힘을 넣어주고 있었다.
'세렌이야 걱정 없고...... 루벨, 그 녀석도 이런 버티기엔 도가 튼 녀석
이니까. 펠린은 힘이 딸린 텐데 잘하고 있으려나..... 키사르는 죽음을 각
오해서라도 통과하겠지....... 애인한테 목숨을 걸었으니까....... 음, 다운크
람 녀석, 확 떨어져나 버려라.'
역시 사사껀껀 트집을 잡고 나서는 다운크람에게 적지 않은 반감을 가
지고 있던 카젯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인 진심은 아니었지만,
'내가 이런 생각했다고 설마 진짜로 떨어지지는 않겠지.......'
카젯은 순진하게도 머릿속의 그 생각을 마구 지워버리며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며 불안해했다.
사실은 이런 잡생각들을 하면 집중력이 떨어져, 휴페리온은 놓일지도
몰랐지만, 이미 카젯의 육체는 여간해선 정신의 도움 없이도 버틸 수
있게 단련되어 있었다. 원래 그의 휴페리온의 속도는 최강이었고, 루벨
과의 대련으로 힘을 키웠으며 세렌과의 대련으로 타이밍을 연습했다.
이제는 속도뿐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이상적으로 균형이 잡혀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세렌에게 확실히 이긴다고 장담할 수가 없단 말이
야......'
카젯은 세렌의 특수한 검술인 흘리기에 대해서 생각했다. 지금은 처음
보다 흘리기에 잘 걸리지 않는 카젯이었으나, 어쨌든 한번 걸렸다 하면
반드시 허점을 보이게 되는 무서운 기술이었다. 세렌이 차분히 수비하
며 버티다가, 어느 순간 완벽하게 흘리기를 성공한 경우에는 어느새 카
젯의 몸에 연습용 휴페리온이 닿아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가 이겨. 물론 이기면 기쁘지... 하지만 난 이 검술
만에서는 누구보다 강할 수밖에 없는 거야.... 왜냐하면......'
카젯의 얼굴에 가볍게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난 머리 쓰는 일은 할 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