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82화 (82/166)

제 6장. -영광의 기사- (14)

"이제 두 번째 관문이 끝났습니다. 펠린 님."

신관 하나가 동굴 안의 가장 깊은 곳의 벽에 웅크리고선 거의  초죽음

이 되어있는 펠린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펠린은  멍한 표정으로는 반응

을 하지 않았고, 신관은 조금 더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펠린 님!"

"........ 네, 넷?"

그제서야 펠린은 고개를 들어 힘없는 눈동자로 신관을 바라보았다. 그

의 옷은 거의 넝마로 바뀌어있었고 온 몸이  멍 투성이 에다가 자신과,

박쥐의 것이 섞였다고 추정되는 검게 굳은 핏자국으로 범벅이 되어있었

다.

"관문에 잘 통과하셨습니다. 여기, 이것은 새 옷입니다."

신관은 손에 들고있던 연습 복을 펠린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펠린에

겐 이미 그것을 입을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 자신에게 날아드는 박쥐들을 피해 더 깊은 동굴  안쪽으

로 달려들어갔었다. 도저히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안

타깝게도 동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 많은 박쥐들이 그의 피를  발기

위해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펠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동굴의 가장 안쪽까지 들어오긴 했으나, 그곳에 준비된 것이라곤

텅, 빈 넓은 공간과 한 달간 먹을 식량, 물이 가득 고여있는 작은  호수

같은 웅덩이. 그리고 막혀있는 벽이었다.

그리하여 펠린은 몸에 붙은 박쥐들을 떼어내다, 떼어내다 지쳐 결국엔

땅을 뒹굴며 피를 빨기에 정신이 없는 박쥐들을 압사시켰고, 하루가 멀

다하고 습격해오는 그들 때문에  한달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마 그 동안 빨린 피만 해도 통으로 하나 가득은 될 것이라고 펠린은

생각했다.

"저기... 샤워하고 싶어요.... 이대로 새 옷을 입을 수는....."

펠린이 피로에 가득 찬 멀쑥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마치 소녀의 그

것을 연상시키는 그의 뛰어난 동안은 이미 피로와 피에 얼룩져 빛을 잃

고 있었다.

"아, 이제 3차 관문이 시작되는데, 그러면 마음 것 몸을 씻을  수 있으

실 것입니다."

신관은 빙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여러 명의 다른 신관들

이 낑낑대며 무엇인가 거대한 상자를 끌어오고 있었다. 그 상자의 크기

는 가로, 세로가 100세션(약 8m)정도이고 높이가 30세션은  될 듯한 거

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 상자 안에 이번 관문을 거치는 동안 먹을 식량이 준비되어 있습니

다."

"식량...을 운반하는 상자치고는 너무 큰데요."

"그렇게 생각하시죠? 물론입니다."

그러더니 신관은 곧바로 세 번째 관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여기서 바로 세 번째 관문은 시작됩니다. 앞으로 한달 동안 이 상

자에 저쪽 물웅덩이 밑에 가라 앉아있는 모래를 퍼내서 가득  담으시면

됩니다."

"예?"

펠린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다시 한번 되물었으나 신관의 대답은 마

찬가지였다.

"그럼 저는 한달 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이번엔 단지 버티는 것이

아니므로 정신을 바짝 차리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

지 올라왔던 펠린이었으나, 굳이 그 말을 할  필요성을 못 느끼며 고개

를 푹 숙여버렸다. 그리고 곧 신관들은 동굴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말.... 마음 것 몸을 씻을 수는 있겠군....."

펠린은 물구덩이를 힐끔 들여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고난의 연속이었다.

동굴 안에 이미 박쥐는 남아있지 않았다. 더 이상 박쥐에 대한 위험은

없어진 것이었는데, 이번엔 엄청난 크기의 상자가  펠린의 앞을 가로막

고 있었다.

펠린은 일단 기운이 없는 데로 웅덩이에서  몸을 씻었다. 웅덩이의 깊

이는 대략 100세션으로 펠린의  허리에도 못 미치는 깊이였다.  그러나,

웅덩이는 단순히 물이 고여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선가 물이 계속 흘러

들고, 또 흘러 나가는 곳이 있었기 때문에  바닥에 고인 모래들을 계속

퍼내 간다면, 얼마나 더 깊어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일단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약 하루동안 휴식을 취

한 펠린은 상자 안에 있다는  식량을 꺼내기 위해 자신의 키보다  더욱

높은 상자 안으로 힘겹게 들어가야만 했다.  아무래도 모래를 퍼내는데

필요한 것은 자신의 손밖에 없을 것인데, 모래를 퍼낸다 하더라도 그것

을 상자 안으로 집어넣기 위해서는 모래를 손에 집고는 점프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상자 안을 모래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대체 어쩌나...... 시간이 지날수록 모래를 퍼내기는 더욱 힘들어 질 테

고.......'

펠린은 이 세 번째 관문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곧이곧대로 퍼서

담다간 실패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옆에다 모래를 다 퍼놓고 나중에  한번에 담는다면 시간과 힘을

덜 들이고 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한다해도 장난이 아닐  꺼

야. 루벨이라면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할텐데......'

펠린은 자신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루벨의 커다란  덩치를 떠올렸다.

그의 키는 22세션이 조금 안 되는 정도로같은 방을 쓰던 여섯 명중에

서 가장 작은 키였다.  체격이 작은 키사르조차 키만큼은  펠린보다 큰

것이었다. 아마도 지금쯤 루벨은 그 큰 리치와  손 크기를 이용하여 성

큼성큼 모래를 퍼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리치는 물론이

고 손바닥조차 루벨이 한번에 풀 수 있는 것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상자를 바라보았다. 절로  한숨이 나오게 할 정도로

거대한 상자. 게다가 그 상자는 이 관문을  위해 특별히 오래 사용하기

위해서인지, 바위를 깎아서 만들어져 있었다.

'아까도 신관 열댓 명이 서 엄청 고생하며 끌고 오던데.... 그냥 애초부

터 이곳에 놔두던지 할  것이지..... 무거워서 누가  훔쳐가지도 않을 텐

데.'

펠린은 신관들이 약간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 무거운 것을.....

'잠깐. 무거우니까?'

펠린은 갑자기 무엇인가가 생각난 듯  탁! 하며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그리고는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웅덩이는 그 넓이가  상자의 세배는 될

정도로 넓었다. 상자를 그 안에다 넣어도  충분히 여유공간이 남아있는

셈이었다.

'상자 안에다 모래를 채우라고 했을 뿐. 상자를 옮기거나 조금  부시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어. 그렇다면......'

펠린은 일단 상자 한쪽의 약간 위 부분을 가볍고 빠른 주먹으로  가격

했다. 그러자 상자엔 그 동안 단련된 펠린의 팔 힘에 의해 머리통 만한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뒤에서 힘겹게 상자를 밀어 천천히 상자를 웅덩이의 안으

로 밀어 넣었다. 웅덩이의 바닥은 모래도 되어있기  때문에 돌로 된 상

자가 깨질 염려는 없었다.

한참에 걸친 노력 끝에 결국은 상자를 웅덩이 안으로 넣어버린 펠린은

기쁨의 웃음을 지으며 웅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제  그는 상자에

낸 구멍으로 웅덩이 안에서 손쉽게 모래를 퍼 담을 수 있게 된 것이었

다.

"하하하...... 이거 정말 다행이다. 이렇게 하면 훨씬 편할 테니까......"

펠린은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차가운 물의 상쾌한 느낌을 만끽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믐날 밤처럼  어둡게만 보이던 3차 관문의  길이

이제는 그야말로 빛나는 태양의 대낮처럼 환하게 빛나는 듯 했다.

'역시 인간은 머리를 써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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