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80화 (80/166)

제 6장. -영광의 기사- (12)

이트라이는 어두운 얼굴로 사태의 심각성을  말하고있었다. 예전에 몇

번 루디가 절망의 정령에게 잠식당할 뻔하다가 펠리치오의 도움으로 그

위기를 벗어난 적이 있었는데, 사실은 그때마다 이 대륙 전체가 파멸의

위험해 처했었던 것이었다. 실로 소름끼치는 이야기였다.

"그거 섬뜩하군요."

"예. 정말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가능성이  있기에 더

공포...... 스러운 일이지요."

약간 주저하며 이트라이가 말했고 그들은  잠시동안 말이 없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자칫하다간 대륙  전체가 멸망한다는 생각이  그들을 침묵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한참동안의 침묵을 깬 건은 다름 아닌  쥬크였다. 그는 엎드려있는 그

자세 그대로 이트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인간여자 마법사."

"이트라이입니다, 고귀한 실리온 족의 수장, 쥬크 님."

"음, 그래. 이트라이. 그런데 말이지. 난 그 동안 쭈욱 안개의  숲에 있

는 고대인의 성지에서 살고 있었거든. 물론  그곳에 남아있는 고대인은

없지만, 그들의 의지, 그리고 남긴 것들에서 나는 독특한 기운을 알고있

어. 꽤 친숙하거든. 그런데......"

이트라이를 바라보는 쥬크의 얼굴에 기이한 호기심의 빛이 떠올랐다.

"너의 몸에선 바로 그 고대인의 기운이 느껴진다.  내 말을 듣고 뭔가

느껴지는 게 있겠지?"

은근한 쥬크의 말투에 이트라이는 조금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쥬크

를 응시했다. 그들 가운데에 있던 킬츠는 그런  둘의 모습을 의아해 하

며 바라보았다.

"역시 쥬크 님..... 대단하시군 요."

"그럼. 난 대단하지. 그럼, 말해주지 않겠나?"

쥬크가 입가에 씨익 웃음을 지었고, 이트라이의 얼굴에도 쓴웃음이 떠

올랐다.

"그렇다면,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사실......."

이트라이의 표정에 약간의 망설임이 떠올랐다.  아마도 말을 꺼내기에

무척 힘든 내용인 듯 했다.

"저는..... 대륙 남쪽 바다의 최남단에 위치한 섬,  베니키오에서 태어났

습니다. 그곳엔, 비밀스럽게 숨겨진  고대인의 마을이 있지요.  저는 그

마을의 출신입니다."

"아니, 뭐라구요!"

이트라이의 말에 듣고있던 킬츠가 깜짝 놀라며 몸을 들썩였다. 전설로

만 전해지는 종족. 인간이  이 세상에 번성하기도 전에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높은 문명을 이룩하며 살아오다가 신들의 노여움을 사 멸망했다

는 종족이 바로 고대인이었다. 그 고대인의  생존자가 아직까지 살아서

마을을 이루고 있다니, 그야말로 경악 할 일이었다.

"물론 수천, 수만의 시간이 흘러오면서, 우리는 중간  중간마다 인간의

피와 섞였기 때문에 순수한 고대인의  후예는 아닙니다. 기껏해야 30%

미만의 피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이트라이는 웃음을 지으며 놀라고있는 킬츠를  바라보았다. 사실 바로

뒤에 있는 실리온의 늑대도 만만치 않은 존재였으나, 그것은 너무 희미

한 전설로 이미 대륙각지의 유적에서 발견된 수많은 서적을 통해 잘 알

려진 것이 바로 고대인이었다. 보통 원소마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

을 가진 고대마법의 창시자들로 그 마법을 사용자가 최소한 5원소 이상

의 조합을 이 가능하며 엄청난 알마스를 가지고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막강한 마법이었다.

"저는 그곳에서 태어나, 20세가 되었을 때 좋아하던 마을의 오빠와 결

혼을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1년 뒤, 아들을 하나 낳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귀엽고 건강했습니다. 무

척 행복한 나날이었지요."

이트라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웃음엔 깊이 감

추어 두었던 슬픔이 짙게 배어져 있었다.

"그런데, 저는 그 아이를  낳으면서, 약간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아니,

많이 무서웠지요. 처음 아이를 낳는 것이라...... 그런데 저는 그때 제 정

신에서 무엇인가가 저를 유혹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공포에... 몸

을 맡기라는......."

이트라이의 몸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

을 바라보고 있던 킬츠도 자연스레 발동한  소울아이에 의하여, 조금씩

그녀의 진정한 슬픔을 깨 닳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마계의 3대 정령 중 하나로 불리는 '공포의 정령' 이었습

니다. 루디 님에게 있는 절망의 정령과 비슷한 것이지요......... 저는 오래

전에 대륙에서 건너온 어떤 서적을 통해 그 정령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

니다..... 그리고 그 위력도 말이지요."

이트라이는 방긋 웃으며 눈을 감았다. 복받쳐  오르는 가슴속 깊은 곳

의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감추기 위한 그런 웃음이었다.

"그래서... 저는 제 남편과..... 막 태어난 아이를 위해. 어느 날 몰래 마

을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베니키오의 항구도시에서  배를 타고 대

륙으로 건너와 이곳 지식의 탑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혹시나 이 정령

을 제거할 수 있을까  해서..... 하지만, 안 되더라군  요. 이곳의 고명한

마도사 님들에게도 그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쌓

고 높은 등급의 마법을  익혀 제 자신을 단련시켰지요. 공포의 정령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모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녀의

고향이자 가정을 이룬 그  고대인의 마을을 나온 것이었다.  막 태어난

귀여운 아이의 성장하는 모습도 지켜보지 못하고, 이렇게 긴 시간을 타

지에서 보내며........

"제가 이렇게 보여도 사실을 벌써  나이가 30이 넘었답니다. 고대인은

오래 사는 종족이라서, 그 피가 섞인 우리들도 조금은 오래 살지요."

가까이 에서 보니, 처음  볼 때보다 더 젊게  보이는 이트라이는 보통

20대 정도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30대 중반을 넘기

고 있었으며 아이까지 있는 어머니였다. 그녀가  타고난 동안이라서 그

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에게 고대인의 피가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저도 더 이상 공포의 정렬에게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마을로 돌아가시지 않지요?"

킬츠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이트라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저는 남편을,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제 아이를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어찌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만....... 저는 그들

을 볼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행여나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줄 수

는 없습니다."

이트라이의 웃는 얼굴이 조금씩 무너지더니 결국은 고개를 숙이며  천

천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동안의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깊은 한스러

움이. 지금 그 결정을 모아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고 있었다.

킬츠는 그런 이트라이를 보며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고향을 떠나, 먼 이곳에서 말할 수 없는 고

통을 참아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사랑

하는 이들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었다.

루디에게 이 사실을 전부 알려준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킬츠는  두려

움에 빠져들었다. 행여나, 이 이트라이처럼 킬츠의 안전을 위해  어디론

가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할

까. 만약 자신이 그런 상황이었다 해도 그렇게 했을 것을, 떠나지  말라

고 과연 말릴 수 있을까.

그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굳은 얼굴을 하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밤색머리카락에 로브를 걸친, 언제나 킬츠와 함께 위험 속을 헤쳐 나왔

던, 바로 루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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