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영광의 기사- (1)
클라스라인 법국. 대륙의 동남부에 광대한 평야를 차지하고 있는 명실
상부한 대륙 최고의 농업 생산국이다.
1년 내내 얼음이 얼지 않는 따뜻한 기후,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태양
이 뙤약볕을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인간이 살기엔
무척 좋은 환경의 나라이다.
포도, 올리브, 오렌지 등 고 부가가치의 과일들이 대륙 최고의 품질과
높은 당도를 유지하며 동남쪽에 위치한 프로겐지방에 인접한 수심이 깊
지 않은 동쪽 바다에서는 다채로운 해산물이 매 절기마다 다르게 수확
되었다. 보리와 밀의 생산량 역시 대륙에서 가장 높아, 전 국민이 소비
하고도 언제나 대량으로 남아 영토에 산지가 많은 페이오드 왕국이나
드라킬스 공국으로 수출까지 할 정도였다. 물론 현재 드라킬스 공국은
북부자치도시연합을 점령하여 식량에 대한 걱정은 한숨 돌린 상황이어
서 더 이상 클라스라인 법국으로부터 식량을 수입하지는 않는 상황이었
다.
식량도 풍부하고, 인구도 대륙의 다섯 나라와 둘의 연합에서 가장 많
은, 그야말로 대륙 제일의 풍요로운 국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이 클라
스라인 법국은 군사력도 그에 만만치 않아 그 숫자만 따지고 보면 대륙
에서 드라킬스 공국 다음으로 두 번째의 위치에 서있었다.
일단 대륙에서 가장 명예로운 기사단이라고 할 수 있는 패러딘 나이트
를 손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클라스라인 법국에 속한 귀족가문의 자제
들만이 15년마다 한번씩 벌어지는 선발 수행에 참가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참가제한이 엄격했으며 약 5년간에 걸친 수행은 효율성과 관리, 그
리고 강도 면에서 오랜 전통과 완벽함을 갖추어 그야말로 최고의 기사
를 탄생시키는데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반드시 한번의 수행마
다 최종적으로 단 16명의 패러딘 나이트를 선발하기 때문에 대단히 명
예로운 직위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3년 이상 수행에서 버티다가 탈락
한 수련생들은 곧바로 화이트 나이트의 고급지휘로 들어갈 수 있는 특
전도 있었다.
이들, 패러딘 나이트는 정확히 다지고 보면 클라스라인의 기사단은 아
니었다. 바로 클라스라인의 국교인 생명의 빛의 여신인 라프나의 전속
신전기사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실상 클라스라인의 모든 군사적인
지휘는 이들 패러딘 나이트들이 맡게 되었다. 그 숫자는 언제나 40명에
서 60명 정도로 기사단치고는 무척 적은 숫자였으나, 일단 그들이 전쟁
에 참가한다면 대부분 사령관 급의 지휘로 참전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에 참가하는 클라스라인의 주력 기사단과 병사들은
바로 이들 화이트 나이트와 크루세이더였다. 화이트 나이트의 숫자는
대략 3만 전후로 3년간의 수행을 거쳐 선발되는 정예기사단이었다. 그
리고 크루세이더는 1년간의 훈련을 거친 뒤에야 실전으로 투입되는 정
예 보병들로 6만을 상회하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군 계통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둘 다 신분적인 자격조건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기 때문에 신분적으로는 약간의 의문점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실력만큼
은 동급의 적들과 싸운다면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우수했다.
그러나 이렇게 경제적, 군사적의로 뛰어난 클라스라인에도 몇 가지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가의 대부분의 권력을 소유
하고 있는 귀족들의 사치와 부패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미 천년 이상을
국가의 국력에 빌붙어 그 피를 빨며 살아온 기생충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 덩치는 대륙 어느 왕국의 귀족들보다도 거대했는데, 덩치뿐만 아니
라, 시기심도 아주 강해서,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할 지도 모르는 뛰어난
기사가 탄생했을 경우, 국가의 손실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벌떼처럼 뭉
쳐서 온갖 권모 술수를 동원, 살해하거나 국외로 쫓아내는 만행을 저지
르고 있었다.
이는 클라스라인의 심장부에 뿌리까지 자리잡고 있어 이미 누군가가
손을 대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도 방대했다. 게다가 클라스라인의 국왕
인 법왕들도 대체적으로 대부분 무능력하고 향락을 즐기는 데만 온 신
경을 쏟아 그야말로 무인지경, 고작해야 패러딘 나이트들의 약간의 제
지가 있을 뿐이었다.
"저기 세렌, 그 소식 알아?"
패러딘 나이트의 수행과정에서 식사시간을 제외한 가장 즐거운 시간이
라고 할 수 있는 저녁의 자유시간. 대련 실에서 세렌과 휴페리온을 주
고받던 카젯이 문득 생각이 난 듯 눈빛을 반짝였다.
"글세, 과연 네가 아는 정보를 아직까지 모를 사람이 있을까?"
이미 카젯과의 대련을 마치고 파김치가 되어있던 다운크람이 벽에 몸
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카젯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카젯의 휴페리온을 다루는 실력은 경이적인 것 이여서 이제는
세렌조차 빠른 승부를 벌인다면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마음
먹고 천천히 페이스를 이끌어가며 장기전으로 가면 이야기는 달라질 지
도 모르지만,
덕분에 가쁜 숨을 몰아쉬던 세렌이 한숨 돌리며 카젯에게 되물어보았
다.
"무슨 소식을?"
"이제 앞으로 약 보름쯤 후에 최종 선발전이 시작된대. 약 1년간에 걸
쳐서 진행되는데..... 매번 그 수행방식이 달라지는......."
"그럼 그렇지."
다운크람이 과연 그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서 루벨과의 대련
을 마치고 큰 대자로 뻗어 있던 펠린도 쿡쿡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어.... 다 왜 그래?"
"그것은...... 이 수행에 참가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건데 말이야 카
젯."
세렌이 한숨을 내쉬며 킬츠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과연 이제서야 그
사실을 알아낸 카젯의 정보습득 능력에 속으로 경의를 표할 다름이었
다.
"그... 그랬던 거야?"
"난.... 이 수련에 참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모르는 사람도 있었군. 정말 예측을 못하게 한
다니까...."
다운크람이 대련에서의 패배를 보복하기라도 하듯 입가에 비웃음을 띄
우며 빈정거렸고 카젯은 멍청한 표정으로 '그, 그랬었나.....' 하며 중얼거
렸다.
킬츠일행이 사신으로 남부 자치도시 연합의 도시 텔핀에 도착한지 4일
만에 지원군으로 보낼 자유기사단 1만 7천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결
하여 북부자치도시연합으로 떠나는 대장정의 첫발을 내딛었다. 사막에
서도 강한 특별한 품종의 이 남부자치도시의 자유기사의 말들이 내는
수많은 말발굽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에 울렁이는 파문을 만들 정도로
웅장했다.
귀빈석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킬츠는 이제야 임무가 완전히 완
수된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킬츠와 루디, 뉴린젤
등 북부자치도시 연합의 사신일행 역시 지원군과 함께 북부자치도시 연
합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예상 밖의 사건으로 인해 그들과 동행하
지 못하게 되었다. 지식의 탑, 즉 매직길드로 가야할 일이 생겼기 때문
이었다.
루디의 동기들이 죽기 전에 남긴 고대어로 쓰여진 서적을 지식의 탑까
지 운반해야 되는 일이 생긴 것이었다. 루디는 지금 시간을 내어서 반
드시 해야 한다고 말했고 킬츠도 그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뉴린젤
도 특별히 대답은 없었으나 그다지 거부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뭐 생각해, 루디형?"
자신과 마찬가지로 귀빈석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골몰히 생각하며 고개
를 숙이고 있는 루디를 바라보며 킬츠가 가볍게 물어보았다. 사실 킬츠
로써도 대충은 짐작하고있어, 그다지 궁금한 기색은 아니었다.
"아, 아니. 5원소 마법, 5원소 마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원소의
조합력, 즉 운영력을 증폭시켜 상위마력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아
무래도 교환한 마력을 집중하여 응집시킨 것을 말하는 듯 한데..... 집중
점과 집중의 정도의 미세한 차이가 생겨도 도로 분해되어버리기 때문
에......"
"아니, 아니..... 어려워서 못 알아들으니까 됐어. 미안. 그냥 계속 생각
하고 있어. 이제 또 시장의 연설을 하려는 것 같으니까, 시간이 좀 더
걸릴 꺼야."
킬츠는 루디의 마법에 대한 이야기에 자신의 시식의 한계를 시인하며
루디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루디 역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약간 숙이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루디는 그의 동기들이 무참히 죽음을 당했던 그날 이후, 완전히 상위
마력을 운용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으로 푹 빠져버렸다. 친구의 죽음으
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에 허덕이는 것보다는 몇십 배 낳은 행동이었으
나, 킬츠는 그 행동의 근원이 바로 정신적이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것임
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씁쓸한 기분이었다.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
해 다른 일에 전념하는 것은 분명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나, 근본적인 해
결책은 되지 못했다. 물론 또다시 정신계의 마법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
라도 상위마력을 다루는 것은 루디에게 있어서 곡 필요한 것이기는 했
지만, 지금은 그런 목적보다는 단순히 집중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필요한 루디였다.
'아니야... 오히려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몰라. 나도 카름을 잃
었을 때, 더 이상의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내 몸을단련하는데
온 정신을 쏟았으니까. 하지만.......'
킬츠는 강단에 올라 자유가 어쩌고, 평화가 어쩌고 떠들어대는 텔핀
시장의 모습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 그렇지만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위해 살아
있는 사람만은 지켜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킬츠는 카름의 죽
음을 받아들였다. 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그녀가 희생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난, 과연 이것으로 다 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