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65화 (65/166)

제 5장. -사막의 도시- (9)

텔핀의 경비대는 곤혹스러운 전투를 벌여가야만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시내를 돌아다니며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게 살아가던 텔

핀의 무고한 시민들과 약간의 외지  여행객들이 저마다 흉흉한 살기를

띄우고는 자신들을 공격해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숫자는 대략

300명. 자신들의 숫자를 충분히 상회하는 것이었다. 물론 경비대는 무장

을 했고 시민들을 비무장 상태라서 싸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으나

텔핀의 경비대로써 텔핀의 시민들을 함부로 살상할 수 도 없는  노릇이

었고 게다가 더욱 문제는 공격해오는 그들의 힘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

고 엄청난 위력이었기 때문이었다. 60살을 가볍게  넘어 보이는 노인이

건장한 체격의 경비대원을 두 손으로 집어들어 내던질 정도였다.

'제길! 이걸 어쩌지?'

제 1경비대를 이끌고 있는 경비대장 게림쿠는 갑작스럽게 돌변한 상황

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히 자신은 사악한 마법사가 시내에 나

타나 마구잡이로 강력한 마법을 사용해  시민 여럿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수하에 있는 경비대를 이끌고 출동했던  것이었는데, 정작 도착

해보니 마법사는 저만치에서 가만히 있고 웬 광폭한 시민들이 무더기로

공격해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시민들이 이렇게나 우리 경비대를 싫어하고 있었나?  나는 별로 잘못

한일이 없는데... 부하들 단속도 잘했고....'

의아해하는 게림쿠는 결국 부하들 중 몇몇이 시민들의 동격을 받고 비

명을 지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공격해오는 시민들을 포박해라! 심하게 반항하면 어떠한 위해를 가한

다 해도 상관없다! 모든 책임은 텔핀의 제 1경비대장인 이 게림쿠가 지

겠다!"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경비대들은 약간의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도 어쩔 수 없이 검을 사용하여 시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격해오

는 시민들은 아무도 포박에 응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에 별수 없이 피 튀

기는 살육전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러나 막상  무기를 사용하여도 그

다지 우세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시민들의 몸놀림과  힘이 평범한 인간

답지 않게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몇 년간 잘 훈련된 경비대로써도 당해

내기 힘든 수준의 실력이었다.

'아니, 시민들이 또 언제 이렇게 강해졌을까.......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야 약간의 진상을 파악한 경비대장 게림쿠는 저 멀리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사악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검은 망토의 마법사에게로 시선

을 집중했다. 대체 이유를 알 수 없이  광분하여 거침없이 경비대를 살

상하고 있는 이 시민들은 아마도 저 마법사의 사악한 마법에 걸려서 자

아를 상실해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사람이 미치면 힘이

엄청나게 세 진다고 하지 않던가.

게림쿠는 그 마법사만 제거한다면 아마도 시민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기 어려운 것이 바

로 그 마법사에 마법에 걸려 미쳐버린 시민들이 길을 막고 비켜주지 않

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란의 위기였다.

-넌 안 된다. 이미 끝난 거다. 너의 인생에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가? 고통스럽고, 절망하고...... 그래,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에 아무도

너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 너는 버림받은 것이다.-

"시. 시끄러워....."

-넌 네 눈앞에서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들이 산산 조각나는 것을 보

고도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무능력한 인간. 쓸모  없는 인간. 네가

갈 곳은 오직 절망의 구렁텅이이다.-

"누구.... 맘대로...."

루디는 끊임없이 속삭여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최후의 이성만을 의지

하여 오기로 버티고 있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애초부터 있는 절망의 정

령이 속삭이는 것인지, 아니면  방금 전에 당한  다크위자드  헤릭사의

정신계 마법의 작용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리저리 회피하고는 있어도  절망이라는 이름의

끝없는 늪에 서서히 잠식 되가는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출 뿐  궁극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에 몸을 맡겨. 너 따위가 어찌 해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니야.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냥 주저 앉아

버려.-

"내가... 그럴.... 것 같냐....."

-기쁨? 희망? 아무 것도 없어. 아무  것도. 살아갈 빛조차 보이지 않는

데 무엇 하러 발버둥치지? -

"그.. 그만!!!!"

루디는 악이 섞인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 누가 보더라도 저 혼

자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누구도 지금 루디의 고통

을 알 수 는 없었다.

'견뎌야해. 견뎌야해.'

-무엇으로부터 견디지? 뭘 말이야. 다 너를 위한  거야. 힘드니까. 고통

스러우니까. 그냥 절망에 몸을 맡기는 편이 좋은 거야.-

-너는 무한한 편안함을 누릴 수 있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

아, 그저 절망에 파묻혀 몸부림치기만 하면 돼.-

루디는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이 절망으로 빠져드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

다.  더 이상 버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그를 절망으로

이끄는 달콤한 속삭임 사이로 무엇인가 또렷한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

다.

-무엇 하는 거냐! 정신계 마법이나 걸리고!  이렇게 되면 폭주하는 너

를 내가 지탱해 줄 수가 없지 않느냐!-

'누... 누구.....'

-난 최고의 마도사 '프레신저' 의 펠리치오!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

다!-

'어디.. 어디 계십니까..... 난 더 이상....'

루디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추스르며 가까스로 펠리치오의  부

름에 응답할 수 있었다.

-너를 지배하려고 온갖 잡소리들을 늘여놓은 바로 이 절망의 정령 안

에, 나 역시 봉인되어있다!-

'거기.. 거기에.......'

-시간이 없다! 어서 내게로 의식을 넘겨라!  지금 이대로 네가 절망의

정령에 잠식당하면 나로써도 막을 수 없다! 어서!-

펠리치오의 정신은 다급한 목소리로 루디를 재촉했으나 이미 루디에게

그런 행동을 할 여력은 없었다.

'이미... 난 늦었어.... 더 이상 나로 써는..... 이젠.....'

이젠 아무도 루디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절망의 정령이 지배하는

텅 비어버린 껍질만이 남아 있을 뿐.

"다.. 끝났어....."

"루디형! 거기구나! 무사한 거야!"

그러나 마지막 순간, 루디의 의식 속으로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익숙

한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생각하나 마나 당연히 킬츠였다.

"훗... 왔냐....."

루디는 얼굴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막 절망의 정령에게 그의 모든

마음이 점령당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순간 들려온 그 밝고 걱정에 가

득 찬 목소리가 그를 그 속에서 끄집어 내주었다. 물론 완전한 것은 아

니여서 또다시 절망의 정령의 유혹이 시작되었지만,  이번에는 그 절망

의 정령 속에 봉인된 대마도사 펠리치오의 정신으로 자신의 의식을  맡

길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은 부릴 수 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두 눈으로 걱정스런  얼굴로 달려오는, 그 마음

이 그대로 드러난 듯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킬츠의 모습이  들어왔

다. 이미 검까지 빼어들고......

"훗. 바보 같은 절망의 정령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웃기지 마라....."

루디는 자신을 유혹해 대는 절망의 정령을 마지막 힘을 다해 비웃으며

진실로 편안한 마음으로 펠리치오의 정신에게 자신의 의식을 맡기었다.

'그럼, 뒤를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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