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안개의 숲- (4)
약간의 허기와 함께 심한 갈증을 느낀 뉴린젤은 완전히 날이 저문 한
밤중에 자신의 침대에서 깨어났다. 참으로 꿀 맛 같은 단 잠이었는데
아무래도 습관적으로 잠을 자던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오랫동안 잠들
수는 없었다.
1층으로 내려와 카운터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는 여관주인에게 물을
얻어 마셔 갈증을 풀고, 뉴린젤을 다시 잠을 청하러 자신의 방으로 올
라갔으나 한번 깨어난 잠이 좀처럼 다시 오지가 않았다.
'바람이나 쐬러갈까.'
나무로 된 복도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훈련된 발걸음으로 뉴린젤
은 여관의 옥상을 향해 올라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단순히 잠이
오지 않아서, 바람이나 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여관의 옥상으로 연결된 계단을 오른 뉴린젤은 옥상과 연결되는 커다
란 뚜껑을 발견했다. 저 뚜껑 너머 가 옥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뚜
껑은 이미 열려 있었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서?'
별다른 느낌 없이, 뉴린젤은 열려진 뚜껑 너머로 발을 내딛었다. 옥상
은 무척 넓고 탁 트인공간이었는데 뉴린젤의 허리정도 오는 난간으로
빙 둘러놓은 간단한 구조였다. 사막의 건조한 바람이 뉴린젤의 몸을 부
드럽게 스치고 지나갔고 뉴린젤은 그 옥상의 정 중앙 난간에 걸터앉아
있는 한 사람과 그 사람의 옆에 웅크리고 있는 커다란 동물 하나를 발
견했다.
"어, 뉴린젤 아니야?"
그들은 킬츠와 쥬크였다. 뉴린젤을 발견한 킬츠는 뜻밖이라는 듯 약간
당황하며 그녀를 반겼고 쥬크는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
는다는 듯 눈을 감으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성질 나쁜 최악의 여자가 왔군."
쥬크의 빈정거림에 뉴린젤은 아무런 반격 없이 묵묵히 킬츠가 서있는
난간의 옆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도발에 뉴린젤이 반응을 하지 않자 쥬
크는 고개를 획 돌리며 시큰둥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웬일이야 여긴?"
"잠이 오지 않아서 그냥 올라왔다. 너는 이곳에서 계속 있었던 건가?"
뉴린젤이 얼음같이 투명한 눈으로 불빛으로 반짝이는 텔핀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대꾸하자 킬츠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우리도 막 음식을 먹고 왔는데 왠지 잠이오지 않아서 방금 올
라 온 거야. 이곳에서 보면 도시 구경을 하기가 쉬울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
킬츠는 약간 횡설수설하며 얼버무렸다. 차마 너무 과식을 해서 울렁거
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올라왔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물론 특대
전갈 요리를 한 접시나 비우고서도 소시지와 빵, 그리고 맥주를 연식
먹어대었기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지
만.
"내일...... 함께 시내를 구경해보지 않겠어 뉴린젤? 여기서 이렇게 보기
만 하는 것보다는 함께 돌아다니며 직접 구경하는 것이 더 좋을 거 같
아서 그러는 데...."
사막의 건조한 바람에 검고 긴 머리카락을 날리며 말없이 도시를 바라
보고 있는 뉴린젤에게 킬츠가 먼저 말을 꺼내며 내일 할 일을 제안했
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킬츠로써는 무심코 던진 말이었는데 뉴
린젤에겐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나와 함께 시내를 구경하면 네가 창피하지 않나?"
"내가.... 왜?"
"아니,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어두운 여자와 함께 시내를 걸어다니면
그다지 좋을 것 없다는 말이다."
자신에 대해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는 뉴린젤의 말이 킬츠의 가슴 한
구석으로 날아와 날카롭게 박혔다. 그녀 자신은 별로 내색하지 않고 있
었지만, 듣고있는 킬츠가 오히려 가만있을 수 없다는 듯이 정색하며 소
리쳤다.
"그럴 리가! 아니 말도 안돼. 음.... 뉴린젤이 얼마나 멋진 여자인데."
"내가 말인가?"
"그래. 뉴린젤은 자신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어. 내가 생각하는 건데...
아마 옷만이라도 제대로 입으면 뉴린젤 본래의 모습이 확 드러날 꺼
야."
"옷... 말인가."
"그래. 좋았어. 내가 내일 뉴린젤에게 옷 한 벌 사주지. 이곳의 끔찍한
음식들을 먹는데 내 월급을 소비하느니 뉴린젤에게 멋진 옷 한 벌 사주
는 게 훨씬 나아."
킬츠의 말에 뉴린젤은 약간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을 바라보는 킬츠의
시선을 말없이 외면했다. 시간이 지나고 그들이 다시 여관 안으로 들어
갈 때까지 끝끝내 뉴린젤은 킬츠의 제안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절의 말 또한 하지 않았다. 그리고 킬츠는 미소를 지으며 그것이 뉴
린젤의 승낙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킬츠는 일찍부터 일어나 여관주인에게 이번에는 텔핀에
서 가장 솜씨 좋은 맞춤옷 전문점의 위치를 알아내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옷들 중엔 뉴린젤에게 맞는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뉴린젤이 제대로 된 옷을 입으려면 맞추는 길밖에 없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었다.
뉴린젤은 킬츠의 제의에 혼란해진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기 위해 밤새
잠을 설치며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끝내 가라않지 않은 들
뜬 마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문
을 활짝 열며 기세 좋게 킬츠가 방으로 들어왔다.
"뉴린젤! 옷 사러 가자. 어제 약속했지?"
"아, 그. 그렇지."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수줍어하는 것 같기도 한 뉴린젤을 바라보며
킬츠는 즐거운 웃음과 함께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나가자. 좋은 가게를 알아 놨어."
그리고 막 뉴린젤과 함께 방을 나가는 순간 옆방을 쓰고있던 루디가
장장 14시간이 넘는 긴 수면을 마치고 아직도 잠에서 덜 깬 표정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아, 잘 잤냐. 킬츠, 뉴린젤 씨도 그런데 그렇게 같이 어딜 급하게 나
가는 거지....."
"아, 잘 잤어 킬츠형. 뉴린젤하고 옷 사러 나가."
"뭐, 옷을....."
의아해한 루디가 뭐라고 되묻기도 전에 킬츠는 뉴린젤을 이끌고 횅하
니 달려가 계단을 내려가 벼렸다.
"나원 참, 대체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난데없이 옷이라니....."
텔핀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옷 맞춤집에 아침 일찍 가장 먼저 발을 들
여놓은 킬츠가 30대 중반의 여유 있는 표정의 여성인 가게 주인에게 이
윽고 들어온 뉴린젤의 옷을 맞추고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주인은 뉴린
젤을 위아래 자세히 훑어보고는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했
다.
"이렇게 큰 키에 완벽한 몸매를 가진 분의 옷을 지어드릴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음,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심미적이지 못한 옷을 입고 다
니는 것은 범죄예요. 어서 빨리 만들어 입게 해드리고 싶군요. 어떤 옷
으로 만들어 드릴까요?"
"....... 어떤 옷이라니."
"보아하니 외국에서 오신 것 같은데, 이곳 남부 사막의 고유 전통 복
장도 어울리겠지만, 아무래도 손님은 세련된 여성복이 잘 어울릴 것 같
아서요."
"뉴린젤이 골라."
"다, 당신 마음대로 해 주시길."
선택의 무한의 재량권을 얻은 주인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뉴
린젤과 함께 다른 방으로 들어가 그녀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킬츠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기 시작했다.
"오후는 넘어야 옷이 완성 될 테니 남자분 께서는 느긋하게 기다려 주
세요."
"물론."
다시 방에서 나와 가게에 진열되어 있은 옷감을 고르는 주인이 킬츠에
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킬츠와 뉴린젤을 연인사이로 생각
하는 모양이었다.
같은 시간. 남부자치도시의 수도 격인 도시 텔핀의 시장은 시의 의원
들과 함께 긴급 회의에 들어갔다. 남부자치도시 연합의 자유기사단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텔핀의 시장과 그 의원들이었는데 어제 찾아
온 사신들이 가져온 지원군을 요청하는 북부자치도시 연합의 문서에 관
한 일 때문에 모인 것이었다.
어제, 킬츠일행에게 말은 믿음직하게 말은 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지원
계획은 하나도 짜여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예전부터 북부자
치도시 연합이 점령된다면 남부 역시 위험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
문에 지원군을 보내는 것에 대해 반대의견은 없었다. 그러나 서쪽의 페
이오드왕국의 총관이 사시드로 바뀐 뒤로부터 서쪽 국경에 대한 불안감
이 증폭되었기 때문에 지원 병력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생각 없이
있는 병력 없는 병력 모조리 동원하여 지원군을 보냈다가 때마침 페이
오드의 대대적인 침략이 이어진다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하지만 그렇
다고 군대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미약한 병력을 지원군으로 보낸다면 그
것 도한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회의는 여러 의견과 토의를 거치며 점심때를 지나, 오후까지 이어졌고
결국 시장이 직접 제안한 자유기사단 1만 7천과 그 밖의 보급품들을 지
원해주기로 결정 났다. 아무래도 보병은 북부자치도시 연합의 도시, 파
울드까지 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테고 또한 국내의 치안 유지와 비
상시를 대비하여 약 1만 정도의 자유기사단은 주둔해 두어야 한다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일단 지원할 병력이 결정되자 식량과 보급품들에 대한 세세한 규모는
손쉽게 결정되었다. 그리고 문서에 적혀있는 대로 되도록 빠른 시간 내
에 지원병력을 보내기 위해 곧바로 군 계통에 준비작업을 명령하기 시
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