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사막의 도시- (1)
킬츠 일행이 안개의 숲에 발을 들여놓은 지 정확히 9일째 되는 날 아
침, 드디어 주위의 숲에 서서히 안개가 겉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아가
서서히 정상 범위로 회복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안개의 숲을 지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다 온 건가?"
"제란스의 말로는 안개의 숲만 벗어나면 곧 남부자치도시의 도시 텔핀
이 보일 것이라고 했는데...."
킬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제는 더 이상 안개로 덮이지 않은 평
범한 숲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제란스가 준 지도로만 간다면 바로
텔핀을 볼 수가 있겠지만, 쥬크의 등에 타서 마구잡이로 지나온 이상,
과연 더 얼마나 가야 텔핀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계속 지나가자, 숲에 나무들이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마
시간이 더 지나자 이제는 완전히 나무들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
다. 바닥의 흙들은 점점 양분이라곤 조금도 함유되어 있지 않은 모래의
형태로 바뀌어져 갔고, 급기야 오후 늦은 시간이 되자 사방은 완전히
모래로 바뀌어 버렸다. 바로 사막의 땅인 것이었다.
킬츠가 뒤를 돌아보자 아주 멀리에 어렴풋이 자신들이 지나온 숲의 모
양이 보이고 있었다. 뒤는 초목이 우거진 숲, 앞은 열사의 사막. 조금은
특이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조금 멀리 앞을 보니 아주 멀리에 작은 성
이 하나 보였다. 물론 실제로는 상당히 커다란 도시를 지닌 성이겠지만
거리가 상당히 먼 관계로 인해 무척 작아 보였다.
"저기 성이 보인다. 아마 텔핀이겠지."
"과연 사막에 나오니까 바로 보이는군....."
킬츠의 말에 루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먼 곳의 성을 바라보았다. 적
어도 하루 한나절은 꼬박 걸어야 도착할 수 있을 듯 했다. 그러나 문제
는 그곳까지의 거리가 아니었다. 놀라운 태양의 뜨거움과 당장에 불타
오르는 사막의 열기가 바로 킬츠일행의 눈앞에 닥친 문제였다.
킬츠는 애초에 반 팔에 간소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 정도의 더
위에 그다지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으나 두꺼운 로브를 걸치고 있던
루디는 상황이 심각했다.
"허억...... 더워...... 킬츠, 물을......."
"물은 이미 다 떨어졌는걸. 텔핀에 도착할 때가지 참아. 쥬크의 등에
타고있으면서, 뉴린젤도 군말 없이 참고 있잖아?"
뉴린젤은 제대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회복되자 곧바로 쥬크의
등에서 내려 자신의 발로 걷기 시작했고 이미 안개의 숲도 지나온 터라
킬츠 역시 내려서 걷고 있었다. 오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루디만이 쥬
크의 등위에서 호위하고 있는 것이었다.
뉴린젤은 찌는 듯한 더위에 군말 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전신을
가리는 검은 색의 타이트한 연습 복에 흉갑까지 입고있는 터라 그 더위
는 루디에게 뒤쳐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나 그녀는 내색하나 하지 않
았다. 오히려 배낭에서 천을 하나 꺼내어 얼굴을 칭칭 둘러 메고 있었
다.
"피부가 따끔거려서.........."
뉴린젤은 아무래도 피부가 타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다지 외모
에 신경을 쓰지 않는 그녀였기 때문에 피부가 검게 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지금의 따가움을 피하기 위한 조치라고 킬츠는 해석했다.
물론 그것이 그녀의 심중을 정확히 읽은 것이라곤 장담할 수 없었지만.
결국 루디의 끈질긴 신음소리를 들으며, 킬츠일행은 해가 다 져갈 무
렵이 되서야 겨우 남부자치도시 연합의 수도 격이라 할 수 있는 도시
텔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재 클라스라인의 패러딘 나이트의 선발 수련에 남아있는 수련생 중
최고의 기마술을 자랑하는 펠린 넨버리아는 방년 19세의 혈기 넘치는
나이답지 않게 무척 온화한 마음으로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대해주는 성
격을 가지고 있었다.
날카롭고 매서운 느낌의 정보습득의 귀재이자 전략의 분석가인 키사르
와는 달리 펠린은 외모에서부터 무척 온순하고 어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함께 방을쓰는 동료이자 이제는 절친한 친구인 세렌이나 루벨,
카젯, 다운크람, 키사르와 비교했을 때 그중 가장 작은 체구의 소유자였
으며 단발로 자른 갈색머리카락을 가끔씩 뒤로 모아 묵기도 했다. 그리
고 부드러운 눈매와 언제나 살짝 웃음 짓고 있는 듯한 입가가 보기 좋
은 동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보면, 마치 귀족가문에 귀한 도련님으로 자라 세상물정 모르
는 순진하고 착한 미소년(혹은 미청년)으로 생각할 지도 모르나, 사실
그의 과거는 온갖 학대와 따돌림으로 얼룩져 있었다.
펠린의 어머니는 넨버리아 백작 저택의 하녀로 갈색의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보기 드문 미녀였는데, 평소에 그녀에게 욕심이 있던 넨버리
아 백작이 어느 날 침대를 정리하러 방으로 들어온 그녀를 반 강제로
몰아 붙여 관계를 맺어 버렸다. 그리고 약 일년 후, 백작인 아버지와 그
의 하녀인 어머니에게서 펠린이 태어났던 것이었다.
하녀를 첫 번째의 정실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었던 넨버리아 백작은
주위의 이목도 있고 해서, 나중에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면 그녀를 둘째
부인으로 맞아주겠다고 말한 뒤 약간의 돈을 주며 어린 펠린과 함께 저
택을 나가서 살라고 명령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세인트룸의 변
두리 시장근처에 그들 두 모자가 살아갈 집은 마련해 주었다.
덕분에 저택을 나와 시장의 근처에 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게된 펠린은
자신이 백작에게 버림받았다고 믿으며 점차 성격이 히스테릭해진 그의
어머니로부터의 심한 학대와 쫓겨난 하녀의 자식이라고 소문이나 동네
또래의 꼬마들의 따돌림까지 동시에 받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만 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어렸을 때부터 무척 참을성이 깊고 이해
심이 많았던 펠린은 그런 것들을 묵묵히 견뎌내며 자신의 괴로움을 한
탄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백작이 보내온 돈은 그의 어머니가 술값으로 거의 다
써버렸기 때문에 별수 없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펠린은 어느 마구간
의 잡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펠린은 태어나서 처음으
로 자신의 소중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말' 이었다. 부드럽고 매끈한 갈색의 짧고 부드러운 털이
감싸고 있는 피부에 온화하고 언제나 아무런 걱정 없어 보이는 새카맣
고 커다란 눈동자. 장거리를 빠른 속도로 달리기에 알맞은 균형적이고
섬세한 몸과 다리. 그밖에도 여러 가지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이 매력
적인 생물에게 펠린은 완전히 매료되고 만 것이었다. 당시 그에게 있어
서 말들은 유일한 친구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마구간에서 열심히 일하며 주인의 신망을 얻게된 펠린은 10살이 되던
해 말의 조련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고는 처음으로 말 위에 올라타게 되
었다. 곧 익숙하게 말을 탈수 있게 되었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어떤
종류의 말이라도 금새 친해지며 훌륭하게조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고통의 배경들을 말을 타며 승화시켜가던 펠린이 15세의
겨울을 거의 마치고 있을 때쯤 갑자기 넨버리아 백작이 그를 저택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유는 바로 이번에 열릴 제 91회 패러딘 나이트 선발
수련에 넨버리아 가문의 이름을 걸고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참가
를 하면 그의 어머니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 주겠노라 했다.
백작은 이미 다른 귀족 가문의 딸과 결혼을 한지 3년이 지나고 있었
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이번 기회가 지나면
앞으로 다시 15년이 지나야 하는데 백작 가문의 명예 상 선발전에 자식
을 보내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다른 몇몇의 귀족들처럼
양자를 들어서 수련에 내보낼 마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펠린은 순간 당연히 거절을 하려고 했다. 어머니를 버리고 자신이 이
런 환경에서 살아가게 만든 장본인이 하는 부탁 따위는 아무리 이해심
깊은 펠린이라도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펠린의 머릿속은, 이렇게
누군가의 운명을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는 그 '귀족' 이라는 신분에 대
하여 큰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혹시나 앞으로라도 자신의 운명이, 도
는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의 곁에 있어줄 인간의 운명이, 또 다른 귀족
의 손에 좌우될 것이라는 생각이 펠린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
었다.
펠린은 결국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넨버리아 가문의 이름으로 패러딘
나이트의 수련에 참가했다. 새로운 자신의 운명을 위하여, 결코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그 누군가의 의지에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운명을
위하여, 펠린은 그 고난과 고통의 수련에 참가했던 것이었다.
수련에 참가한 펠린은 처음 휴페리온을 휘두르는 수련에 무척 고생을
했다. 전에 단 한번도 검이라고는 들어본 적도 없었던 그였기에 더욱
힘들었던 것이었는데 마구간에서 온갖 힘든 일을 하며 키워온 끈기와
인내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버텨내어 결국은 수행에 익숙해 질 수 있었
다. 그리고 말 조련으로 익힌 능숙한 기마술을 바탕으로 패러딘 나이트
의 기마전용 무기인 세인랜스를 다루는 솜씨는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났다.
"오늘. 또 한 명이 탈락했어. 끈기도 없는 놈들......"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는 도중 다운크람이 신경 쓰이는지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패러딘 나이트 수련관에 남아
있는 수련생의 숫자는 14명. 이는 이미 최종 선발전에 정식 패러딘 나
이트로 선발하는 정원 16명에 못 미치는 숫자였다.
지금까지는 귀족의 자제들치고는 무척 잘 버텨왔다고 할 수 있는 수련
생들이, 과정은 동일하지만 총 무게가 40kg이 넘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상태로 하는 수련에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혹은 벌점으로
인해 탈락하고 마는 것이었다.
패러딘 나이트의 갑옷은 실전성을 위한 강도와 외관상을 위한 아름다
움을 겸비함과 동시에 엄선한 소재를 사용하여 총 중량을 보통 갑옷에
비해 크게 낮춘 대단히 종합적으로 기능적인 예술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완벽함을 자랑했다. 약간의 빛에도 은은한 은색 섬광을 반사하
며 빛나는 금속의 아름다움과 클라스라인 최고의 세공사들이 새겨 넣은
흉갑의 양쪽 가슴에 있는 클라스라인 법국과 라프나 여신의 신전 문양
은 보는 이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견고함 역시 클라스라인최고의 장인의 솜씨를 모아 만들어 역시 최
강의 방어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하며 가벼운 갑옷이라 하더라도 일단 중무장하면
자신의 몸무게에 절반을 넘어서는(혹은 그와 비슷한) 그것을 입고 역시
보통 검보다는 그 무게가 월등히 무거운 휴페리온을 5천 번씩 휘두른다
는 것은 인간으로썬 견디기 어려운 무척 고달픈 것이었다. 게다가 갑옷
의 무게 때문에 저녁의 기마 수련 시간에 균형을 잡지 못한 수련생들이
낙마하여 크게 다치는 사건도 번번이 일어났다.
"다 근성이 부족해서 그래, 근성이."
루벨이 호탕하게 웃으며 그 정도의 갑옷 수련으로는 끄떡없는 자신의
근성과 덩치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의 평가를 역으로 생각해 본다면 남
아있는 14명의 수련생들은 근성이 있다는 것인데 그 중엔 수련 초반,
세렌 일행들을 '가짜귀족' 이라고 매도하며 숙청(?) 하려다가 이미 수련
관에 전설로 남은 세렌의 6인 베기 사건으로 인해 체면이 말이 아니게
깎여버린 파울프 일당들도 속해 있어 아이러니 했다.
"그 녀석들, 성질은 더러워도 실력만큼은 있는 것 같아. 그날 이후로
기가 죽어서 수행에 전념하던데, 의외로군."
카젯이 그 사건 이후 언제나 묵묵하게 수련관에서 수련에 전념하던 파
울프 일당의 모습을 떠올리며 썩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
다. 결과적으론 세렌의 아래에 모두들 뭉치게 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지
만 일단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라도 있었기
에 망정이지 잘못 했다간 사상 최초로 91회 패러딘 선발전은 열 명 이
하의 패러딘 나이트를 선발하는 최악의 상황을 연출할지도 모르는 일이
었다.
물론 그와 비슷한 지금 상황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의 기분은 그다지 나
쁘지는 않겠지만, 한때는 수련생들로 가득 차서 수행시간마다 뜨거운
열기를 내뿜던 수련 실에서 이제는 군데군데 띄엄띄엄 서서 한가히 휴
페리온을 휘두르고 있다보면 약간 허무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
다. 그리고 그것은 클라스라인의 국가차원으로 보았을 때도 큰 손실이
요, 인재부족의 상황을 알리는 불길한 악 신호였다.
"뭐 얼마나 패러딘나이트에 뽑히는 거야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고, 우
리만이라도 선발된다면 상관없잖아? 경쟁자는 적을수록 좋은 거야. 그
럼 그럼."
카젯이 무책임한 발언을 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작년 같
았으면 경쟁자를 견제해야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올해는 그럴 필요
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정원을 미달하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