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55화 (55/166)

제 4장. -안개의 숲- (10)

고대인의 종이라고 자처하며 수많은 시간을 안개의 숲을 지키며  살아

온 은빛의 거대한 늑대 쥬크는 과연 자신이 안개의 숲의  터줏대감이라

는 사실을 확인 시켜 주듯이 다  큰 인간 세 명을 등위에 태우고  한치

앞을 분간 못할 짙은 안개의 사이를 숨가쁘게  달려갔다. 그 달리는 속

도는 평지에서 달리는 말의 최대속력을 가볍게 넘는 것으로 가의  가공

하다고 할 만한 속력이었다. 게다가 평지와는 달리 빽빽하지는 않다 해

도 군데군데 커다란 나무들이 자리잡고  있어 말처럼 직선으로 달리는

것이 아닌 유연하게 좌우로 몸을 피해가며 달리는 것이라 그  민첩함과

기동력은 말의 능력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대단한 것은 숲의 군데군데 마다 산재하는 엄청난 크기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질퍽한,  그리고 한번 빠지면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늪들을 마치 맨 땅인 양 가볍게 지나가는 것이었다.

"대단한데! 어떻게 늪 위를 지나갈 수 있지?"

"인간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다."

늪의 위를 진흙하나 뭍이지 않고  가볍게 건너는 쥬크의 모습을  보고

킬츠가 신기해하자. 쥬크는 씨익하고 어금니를 내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킬츠, 너 역시  고대인으로는 이해 못할  멋진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상관없다. 이 쥬크를 감동시킨  그 동료를 위하는 마음  말이다.

게다가 옆에 무뚝뚝하고 성질 나쁜 여자까지 있으니까 너의 존재는  더

뛰어나 보인다."

"시끄럽다 개. 조용히 달려라."

"크악! 여자! 난 개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셀 수 없는  시간동안

안개의 숲의 그림자에 살아오며 세상을 지켜 봐온 이 '실리온' 늑대  족

의 수장이 바로 나 쥬크란 말이다!"

"난 한 번 부른 호칭은 절대 바꾸지 않는다."

"킬츠.... 이번에는 이 여자, 제정신으로 이러는 것 같은데"

"이해해라 쥬크. 뉴린젤은 원래 성격이 좀 그래."

은빛 찬란한 아름다운 털을 바람에 휘날리며 전설 속에 등장하는 바로

그 실리온의 늑대가, 게다가 그 늑대의 수장이  한 인간 여자에게 무시

당하며 인상을 확 구길 때, 킬츠는 쓴  웃음을  지으며 그런 쥬크의 목

을 쓰다듬어 주었고 그제야 쥬크는  기분이 좀 풀리는지 그르렁거리며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 솟아있는 입을 다물었다.

"여자, 네가 킬츠의 동료가 아니었다면  내 이빨에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그런가? 어디 해보시지 개. 내 검이 빠른지, 네 이빨이 빠른지......."

"그르르........"

쥬크는 이를 갈며 으르렁대었으나 자신의 등위에 타있는 뉴린젤의  기

세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쳇,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다. 내 등에 타고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겨야 할텐데..... 가운데 타고있는  남자가 비슷한 인간이 아

니라 다행이군."

"아, 저 말씀이십니까 쥬크 님?"

가만히 생각에 빠져서 딴 나라를 헤매고 있던 루디가 깜짝 놀라며  제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딴 생각을 하면서도 초고속으로 달리고 있는 늑

대의 등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도 붙어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 너 말이다 인간. 루디라고 했던가?"

"아, 네 그렇습니다. 쥬크 님."

"예의도 바르고 좋군. 그런데 왜 그렇게 경직돼 있지?"

자신의 등위에서 뻣뻣해져 있는 루디를 느낀 쥬크가 의아해 하며 물어

보자 루디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단하다는 듯 대답했다.

"쥬크 님은 대륙에 전설로 내려오는 실리온 늑대의 수장, 살아있는 전

설이지 않습니까? 그 수명은 흐르는 강물과  같이 무한하고, 모든 종족

의 언어를 구사하며 불멸의 지혜와 지식을 갖춘 고고하고 기품 있는 바

로 실리온의 늑대. 정말 책에서만 보아왔고  전설인줄로만 알고 있었던

그 존재를 이렇게 직접 대하고 있으니까..... 너무 감격해서 그렇습니다."

"루디형은 이제 보니 전설 매니아였네? 난 이번에 처음 들어보는데...."

"흠, 나에 대해 조금 아는 인간도 있었군. 아주 마음에 들어. 하하하."

루디의 말에 쥬크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가를 치켜올려 즐거운  표정

을 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웃고있는 늑대, 그것은 무척 기이한 모습이

었다.

"흐르는 강물도 가뭄이 계속되면 언젠가 마르게 되지."

"크악! 이 건방진 여자가 사사껀껀! 나한테 원한이라도 있나!"

아무래도 뉴린젤은 늑대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사실에 대해  상

당히 못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사실 그녀는 태어나

서 지금가지 대륙에 전해오는 전설이나  신화들을 한번도 접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어떤 기형 늑대 나부랭이가 잘난 척 하고 있는 것

이 눈에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죽여라 살려라 잠시 난동을 부리던 쥬크와 뉴린젤이 잠잠해지자, 킬츠

는 쥬크의 빛나는 은색의 털의 결을 만져보며 그 기분 좋은 감촉을 음

미했다.

"쥬크는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지?"

쥬크는 킬츠의 손길에 뉴린젤로 인하여 굳어버린 마음이 조금은  풀어

졌는지 평온하고 중후한 원래의 목소리로 킬츠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다 킬츠. 수 천년, 아니 수 만년만에 마음에 드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너는, 따라다니면 재미있을 것 같아."

"내가 죽을 때까지?"

"그래봤자 인간이 고작해야 100년밖에 더 사느냐? 네가 키퍼라도 되지

않는 한 말이지."

키퍼는 성의 전쟁 때  대륙의 각지에 퍼져있던 인간  이외의 종족, 즉

엘프나 드워프, 켄타로스나 인어, 혹은 드래곤 같은 종족을 타락천사 나

타스의 마계의 군대에서 보호하기 위해 계약을  맺은 인간들을 말한다.

그들은 자신과 계약을 맺은 종족들이 전원 멸망하기 전 까지는  무한의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종족들이 거주하는 일정한 영

역 안에서는 목이 잘리거나 산산 조각나도 금새 다시 재생되는  불사의

능력까지 갖추고 있는 막강한 능력의 인간을 칭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

면 이미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버린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현

재 그 행방이 묘연하여 대부분 그 소재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쥬크 같은 강한 녀석이 내 옆에 있어준다면 나는  한결 마음

이 편해질 거야."

"녀석? 음..... 뭐 상관없지.  좋을 대로 불러라.  마음이 편하다면 나도

좋고. 오랜만에 대륙으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너 같은 멋진 동료  하나

없으면 어찌 돌아다닐 맛이 나겠느냐."

"넌 따뜻해....... 마음이 놓인다."

"털이? 물론 내가 또 한 털 하지."

"................"

안개의 숲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빠른  속도로

숲을 벗어 나게된 킬츠일행은 동료로 들어온 늑대의 몸에 몸을  누이고

숲에서의 여덟 번째의 밤을 맞이했다. 더 이상 기이한 모양의 몬스터들

이 킬츠들을 공격해오는 일은 없었다. 빠지면  어쩔까 두려워하던 깊은

늪들도 이제는 두렵지가 않았다. 그리고 점점, 사람의 마음을  불안함으

로 이끌어가던 이 한치 앞을 가리지 못할 공포의 숲이. 더 이상 공포와,

두려움의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다. 미지의 두려움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결코 영원한 두려움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4장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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