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54화 (54/166)

제 4장. -안개의 숲- (9)

조금씩 정신이 드는 것을 느끼며, 뉴린젤은  자신이 매우 푹신한 물건

위에 머리를 베고 누워있음을 깨달았다.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남아있

지 않았다. 마치 수만 세션을 전력 질주한  뒤의 탈진증상과도 같은 느

낌이었다. 여전히 주위는 안개로  가득 찬 침묵의 공간이었고  잠시 후

자신의 옆에 루디 역시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신이 들어?"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니 검은머리 가락에 건장한 몸을 가지고 있

는 젊은 청년, 킬츠가 불을 피워서 무엇인가를 굽고 있었다. 한동안  아

무 것도 먹지 못한 뉴린젤은 무척 허기가  졌지만, 독의 영향인지 속이

울렁거리고 있어서 그다지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여긴..... 안개의 숲인가?"

"물론, 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어떻게....."

킬츠가 정신을 잃은 자신을 데리고  안개의 숲을 지나온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뉴린젤은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분명한

호기심을 나타내었다.

"뉴린젤이 베고있는 것을 봐.  그 녀석이 우리를  태워서 이곳가지 온

거니까."

뉴린젤은 힘없이 고개를 돌려  자신이 베고있는 정체불명의  부드러운

털을 가진 물체의 정체를 확인했다. 대략 그  덩치가 말의 그것을 능가

하는 거대한 늑대. 은색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털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

글서글하며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강인한 얼굴로 재미있다는 듯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뉴린젤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냐 이 개는."

"개? 이거 참, 당돌한 인간 여자군. 셀 수 없는 긴  시간동안 고대인들

의 성지를 지키며 안개의 그림자 속에살아온 나 쥬크를 '개' 라고 부르

다니."

"개가 말을 하는군."

전설이나 신화, 혹은 비 상식이라는 개념을 전혀 알지도, 배우지도  못

한 뉴린젤은 쥬크를 단순히 '개' 라고 부르고 있었다. 만약 정신이 맑은

상태라면 지금 그 '개' 가 마음만  먹으며 단숨에 자신을 절단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먼저 깨 닳아 신중하게 말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저 중

후한 음성과 고풍스러운 말투로 말하는 거대하고 부드러운 '개'가  있다

는 사실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쥬크가 해독초를 구해와서 뉴린젤이 살아난 거야."

"개가 재주도... 좋군."

"킬츠, 이 여자 확 물어버리고 싶은데."

쥬크가 긴 입가를 조금 치켜올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자  킬츠

는 큭큭대고 웃으며 그를 제지했다.

"참아. 정신이 없어서 그렇지 뉴린젤은 원래 이런 말은 하지 않으니까.

아니, 제정신이라도 크게 다른 말은 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미소짓는 킬츠를 바라보며 뉴린젤은 오락가락 하는 자신의 정신을  주

체하기 힘들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잠시 후, 평소라면 절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겠지만, 지금 겨우 해독되어 체력이 급 저하되고 정신

이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말 할 수 있었다.

"킬츠.... 난 이상한 여자지? 보기 괴로울 꺼야. 남자 같은 차림새에 굳

은 얼굴로 생활하는  이상한 여자......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대하지만,

모두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겠지?"

뉴린젤의 말에 킬츠는 그녀가 지금 약간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성격상 절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

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전에 파티에서 한번 경험한 일도 있었고 해서

킬츠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전부터 꼭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

를 그녀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수많은 여자들이 있지만..... 다들 똑같은 모습이라면 재미없지.

그러니까.... 뉴린젤 같은 여자가 하나쯤 세상에 있는 것도 문제 될 것은

없는 거야. 나는........ 나는 오히려 이런 모습의, 그리고 이런  성격의 뉴

린젤이 마음에 드는걸."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은  킬츠는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멍한

표정을 하고있는 뉴린젤을 바라보았다. 비록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지

만, 그녀는 킬츠의 말에 적지 않게 놀라있었다. 표정도, 성격도 오랜 반

복의 생활로 굳어져버린 자신을, 세상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을, 킬츠는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든다고 말해준  것이었다.

그녀는 사람들과 많이 접해보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하는 말이 진실인

지, 아니면 머릿속으로 꾸며낸 거짓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킬츠는 꾸밈없이 자신이 하고싶은 말은 다 하는 성격이

라는 것을 그 동안의 생활로 느끼고있었다.

"킬츠.. 이런 나라도..... 마음에 들어하다니. 세상에 아무도.... 그런 생각

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누구도, 누구도 나를 이상하다고 생

각하리라 여겼는데... 넌 아니었구나. 세상에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

이 있었구나. 정말... 고마워."

뉴린젤은 굳어져버린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녹아 내리는 것을  느끼며

쥬크의 은빛 찬란한  털보다도 더욱 부드러운 기분을  감싸 안았다. 기

운이 없어 다시 의식이 깊은 자신의 속으로  빠져 들어갔지만, 비록 나

중에 제정신을 차려 개어난다  하더라도, 지금의 이 기분을  결코 놓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뉴린젤이었다. 지금 그녀에겐 원한도, 증오도, 복수

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마음을  아릿하게 녹여준

다른 한 사람의 마음만이 느껴질 뿐.

자치도시 연합에 의외의 역습을 당한 드라킬스에서는 곧 있을 제 2차

출병 건을 놓고 드라킬스 본토에 있는 사령관 급 이상 간부들이 대부분

모여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회의를 이끌고 있는 인물은 드라킬스의 총

참모장이자 국왕의 친척인  세렌탈이었다. 화려하고 비중  있는 배경에

비해 의외로 출중한 실력을 갖춘 인물로 약간의 음험한 성격과  독단적

인 점을 제외한다면 그야말로 훌륭한 일 국의 재상 감이었다.

그리고 드라킬스의 3장군 역시  자리에 참석하고 있었다.  전략, 전술,

용병 면에서 국내는 물론 대륙  전체에 견줄 인물이 거의 없다는  평을

듣고있는 불세출의 장군들로 그들 대부분 자치도시 연합과의  전쟁에서

막강한 실력을 과시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밖에 전선 방위

사령관인 드래곤 나이트 라린스와 외교  담당관인 함센 같은 인물들도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일단, 펠류즈공의 패배로 인해 우리 드라킬스의 군 전략은 약간의 수

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차분하고 약간은 매정한 듯한 세렌탈의  목소리로 회의는 시작되었다.

이미 자치도시 연합과의 전쟁은 끝난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드라킬스의

사람들에게 이번 파울드 평원 전쟁의 완패는 그들의 자존심에 금이  가

는 불명예였다. 아무리 사령관으로써의 재질이 의심스런 나이트 펠류즈

를 원정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 동안 자치도시 연합에서 보여

준 지휘계통의 무능력은 펠류즈의 어리석음을 능가하고도 남을  위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펠류즈에게 대군을 맡겨  최후의 승리를 얻고자

했던 것이었는데 의외의 짜임새 있는 전략과 군 지휘관들의 탁월한  전

술과 용병으로 인해 전쟁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참히 짓밟혀서 패

배한 것이었다. 그나마 체면을 차릴 수 있던  것은 완전 전멸되기 직전

의 병사들을 부사령관이었던 나이트 임멜이 통솔하여 탈출에 성공한 것

이었다. 그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는데, 비록 4천이 조금 넘는  비참한

탈출이었으나 그래도 전멸을 피했다는 것이 큰  성과였다. 그것은 드라

킬스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그다지 가치 없는 병력이었으나 전멸한 것과

전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병사들의 사기에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큰공을 세웠다 할 수 있었다.

"차라리 신분인사를 초월해서라도 나이트 임멜 같은 인재를  사령관으

로 임명했어야 했습니다. 만약 사령관이 그였다면 적어도 병력을 네 개

로 나누는 미련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강인한 성격과 초고속의 속전속결로 인해 병사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가 높은 3장군중 한 명인 나이트 디트마리스가  아쉽다는 듯 인상을 찌

푸리며 중얼거렸다. 나이트 펠류즈 같은 사람을  사령관으로 임명한 세

렌탈을 비난하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는 언행이었는데  정명정대하고

모든 일에 정직히 최선을 다하는 디트마리스와 무척 음습한 성격에  음

으로 여러 가지 모략을 꾸미는데  능숙한 세렌탈과는 처음부터 마음이

잘 맡지 않았다. 세렌탈이  디트마리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디트마리스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그것도 독단으로 계획하여 비밀스

럽게 처리하는 세렌탈을 극히 혐오했다.

"일단 끝난 일이니 별 수 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건  다음인데, 지금은

그것에 대해 토의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미카드론이 조금씩 험악해져 가고있는 회의장의 분위기를 원래의 취지

로 돌려놓으며 침착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드라킬스의 3대장

군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소박한 성격을 가진 청년으로 디트마리

스와는 드래곤 나이트 수련의 동기로 오래된  친구사이였다. 가장 아군

의 피해를 적게 하고 적군에게 효과적인 피해를 주는 대표적인  지장의

대표적인  사령관으로 그간 언제나 적은 피해를 입으며 상대를 쓰러뜨

리는 까닭에 언제나 최전선에서 약간의  예비병력을 보충 받으며 가장

많은 전쟁에 참전한 화려하고 섬세한 전술을  사용하는 장군이었다. 뭇

여성들의 마음을 쏙 빼놓는 푸른 눈동자와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미청

년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일단은 다시 한번 잔여병력을 통합해  약 2만 정도의 기병과  보병의

혼합 부대를 편성하여 2차로 파울드를 공략하려 계획중입니다. 3장군들

의 휘하부대는 이후의 전쟁에서 귀중히  사용될 전력이기 때문에 지금

운용하여 쓸데없는 피로와 피해를 가중시키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 2만의 병력마저 자치도시 군에게 패배한다면?"

개중 총 참모장을 제외하고 전략적인 식견에 가장 뛰어난  미카드론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자치도시 연합군의  전

술이 이전가지의 천편일률적이던 정면공격,  혹은 농성이라는 패턴에서

벗어나 유연한 병력 운용과 보급선 차단과 같은 고도의 전술을  사용했

다는 점이 미카드론의 마음에 크게 걸리고 있었다.

"이것은 저의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자치도시 연합에  모종의 뛰어난

참모가 편입된 것 같습니다. 일단 파울드 평원의 전쟁을 봐서, 그의  전

술적인 식견은 매우 뛰어난 것입니다. 물론 그가 전략적인 재능을 얼마

나 갖추고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미카드론은 정확한 정보와 판단을 통해 내려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

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었지만, 본래의 취지에 벗어난 전

쟁이라는 것은 정말로 쓸모 없는  것으로써 만약 그 전쟁의 피해  량이

크면 클수록, 빨리 포기해야할 무가치한 일이었다.

"아마도 어떻게든 병력을 더 보강하여  우리를 상대하려 할 것입니다.

이번 전쟁의 승리로 용병도 더 모여들 테고,  남부 자치도시 연합의 지

원군을 받아올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군사력과 비길 세력이  아니지

않소?"

외교 담당관 함센이 그 정도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목에 힘을 주어 말

하자 조용히 앉아있던 나이트 퀵셀트가  헛기침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

다.

"미카드론 사령관의 말뜻은 그게 아닙니다. 외교담당관. 우리는 페하의

명을 받들어, 궁극적으론  클라스라인과 페이오드와 전쟁을  치러야 할

텐데, 단지 병력의 이동 통로와 보급유지를 위해 시작한 자치도시 연합

과의 전쟁에서 대량의 피해가 난다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정곡을 찌른 퀵셀트의 발언에 함센은 머쓱해져서는 조용히 고개를  돌

렸다. 그리고 미카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미 식량과 이동로를  확보한 이상 굳이 자치도시

연합의 잔존 병력과 자웅을 겨루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쪽이 먼저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공격해 오

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한참 클라스라인 법국이나 페이오드 왕국과 전

쟁을 치르고 있을 때 말입니다."

세렌탈이 긍정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기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황

을 염려하자, 미카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나타내었다.

"물론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전쟁을  그만둔다면 자치도시 연합으로써

는 다행이겠지만, 일단 힘을 회복하고 나면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먼

저 공격해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타  국가와의 전쟁시 대부분

속도가 빠른 기사단을 이용할 테니, 후방 전선을 지키고 있을 보병부대

들을 파울드 성  쪽으로 배치하면 되는 것입니다.  농성을 통해 시간을

벌면 충분한 일이지요."

"맞는 말인 것 같군."

디트마리스도 미카드론의 의견에 동의의 듯을  나타내었다. 물론 그의

말이 성공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었지만, 일단은 총 참모장에 대한

반발의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디트마리스였다.

회의는 점차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된  사항들은.

곧 대륙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칠 중대한 전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대륙 최대의 군사 강국인 드라킬스의 공격을 받는다면, 아무리 유서 깊

고 전통 있는 타 국가라 하더라도, 결코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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