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53화 (53/166)

제 4장. -안개의 숲- (8)

"아니, 쿠슬리 씨 아닙니까....... 왼 묘령의 아리따운  아가씨입니까? 20

살 이상 차이나면 불륜이라구요."

에리나와 함께, 고급여관  세피로이스로 돌아온 쿠슬리는  여관 1층에

있는 주점에서 대낮부터 술독에 빠져있는 크랭크와 하인스, 이 두 명의

자치도시 연합의 천인장과 만나게 되었다.

크랭크는 자신의 머리통 만한 맥주 잔을 들이키다가 '대화' 라는  순수

한 목적을 위해 들어온 쿠슬리와 에리나를 바라보고는 의외라는 듯  큭

큭거리며 말했다.

"사랑만 있다면 20년이 대순가. 난 16살 때  40대의 미망인과 정렬 적

인 사랑을 나누었었는걸."

"그건 자네 이야기고, 하인스."

"아니, 나뿐만이 아니지, 인생에 맛있는 음식과  술, 그리고 여자가 없

다면 남자들은 뭔 재미로 살겠나?"

하인스가 과연 호색가다운 말로  크랭크에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자

크랭크는 고개를 저으며 맥주 잔에 남아있는 나머지 액체를 단숨에  들

이켰다.

"난 술만 있으면 나머진 상관없어."

"그러니까 자네가 이제까지 애인하나 없는 거지."

"그런가? 하지만 내가 여자들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파울드의 처녀들이

남아나질 않을걸? 하하하......."

"오, 절제하고 있다는 건가?"

이미 반쯤 취해서 남 듣기 민망한 소리를 마음대로 지껄이고 있는, 성

격과 인성에 있어서  인간사회에 거의 부적격 내지 판단불가로 사료되

는 이 두 천인장들에게 쿠슬리는 한숨을 쉬며 에리나를 소개시켜  주며

합석했다.

"그렇다면 킬츠대장의 불........ 아니 소꿉친구란 말입니까? 여기  이 아

가씨가? 나 참, 알고 보니 우리 대장도  인맥이 넓은걸?정령사 친구까

지 있고 말이야."

그제서야 에리나의 정령사 복장이 눈에 들어오는 듯 크랭크가  휘둥그

레진 눈으로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스피리스트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저는 에리나 그란드라, 스피리스

트의 정령사입니다. 그리고 킬츠 오빠의 마을 친구이기도 하지요."

"난 크랭크 뤼펜. 맥주 한잔에 목숨을 거는 멋진 용병이지."

"난 하인스. 당신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성으로 불

려도 상관없습니다."

크랭크는 과연 파울드 최대의 주량을 가지고 있는 애주가다운  설명을

하며 맥주 잔을 들었다 놓았고 하인스 역시 파울드에서 날리는  바람둥

이(?)답게 여자에게만은 멋진 음성과 기교로 자신을 소개했다.

"과연 하인스, 술을 마실 때도 쉬지 않는군."

"그게 미남자의 철칙아닌가. 난 벌써 32살이라구. 1분 1초가 아깝지."

"크하하! 그거 멋진 말인데. 나도 1분 1초를 아껴서 마셔야 되겠군. 난

자네보다 한 살 더 먹었으니."

"술은 등이 꾸부러져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지만, 여자는 그러면 곤란

하지."

"그런가?"

아주 죽이 잘 맞추며 자신들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는 두 사람은  일단

내버려두고, 쿠슬리는 에리나와 그  동안의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세렌이 클라스라인의 마틴스 백작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는 말에서  에

리나는 세렌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

덕였다. 사실 에리나도 그녀의 오빠가 언덕마을 같은 그런 작은 곳에서

평생 안주하며 지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분명히 언젠가

는 마을을 떠날 것이 분명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와서  다행이었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쿠슬리는 마을 주위의 일대를 뒤덮은 문제의 결계에 대하여 설

명을 하기 시작했다. 나이트 길드에서 알아낸  정보인 다크휴먼의 간부

들이 그것을 발동 시켰다는 것과 결계의 이름이 다크 핵사곤이라는 것,

그리고 그 결계의 능력은 결계 내 공간을 마계와 흡사하게 만들어 압축

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장시간에 걸친 설명이  끝나고, 킬츠와 루디가 그  결계를 3년

동안 죽음의 고생을 겪으며 결국 빠져 나왔다는  말을 하였을 때, 에리

나는 그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킬츠오빠와... 루디오빠가  살아있었군요. 아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

데..."

에리나는 기뻐하는 얼굴을 잠시 접어두고 슬픈 목소리로 쿠슬리를  바

라보았다.

"나머지 마을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지요? 장로님은? 카름 언니는?"

물어보면서도 대충 사실을 예측하고 있던  에리나였다. 그리고 침울한

얼굴의 쿠슬리에게서 예상대로의 대답이 나오자 에리나의 밝은 얼굴 역

시 심하게 어두워졌다.

"그랬군요..... 대체 왜 이런 일이....."

에리나가 슬퍼하며 침울해 지자 이미 카름의 죽음에 대한 충격에서 벗

어난 쿠슬리는 담담하게 말하며 에리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도 너희 남매와 킬츠, 그리고 루디가 이렇게 살아있지 않니. 마을

의 희망이었던 젊은이 넷이 모두 건재하니까 앞으로 희망이 있는 거다.

언젠가 결계가 소멸되면..... 너희가 그곳에 다시 마을을 세우면 되는 거

란다."

"..... 맞아요. 다시 오빠들과.... 로케스트 언덕에 올라서  바다를 바라보

고 싶어요. 그 향긋한 꽃 내음을 맡으며.... 말이에요."

에리나는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밝은 목소리로 쿠슬리를 바

라보았다. 과거에 대한 아픈 슬픔도, 현재 내가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

었다. 그러므로 미래는 얼마든지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어

떤 순간이라도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한, 절망의 끝이란 찾아오지 않는

다는 그 사실을, 에리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킬츠 오빠와 루디오빠는 어디에 있죠? 세렌오빠는  클라

스라인에 있을 테고..."

에리나가 어서 만나고싶은 마음에 쿠슬리에게 물어보자 쿠슬리는 약간

의 쓴웃음이 섞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말이야, 그 둘은  지금 나이트길드의 특명을  받고 안개의 숲을

건너고 있지. 늦어도 4, 5개월 뒤에는 돌아올 꺼야."

"예? 안개의 숲이요!"

에리나는 경악하며 쿠슬리를 바라보았다.

클라스라인의 국무총관 프레이어는 지금 엄청난 판단에 대한 고민 속

에 빠져있었다. 조금전가지 그의 관사에는 자치도시연합의 외교관이 와

있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드라킬스와의 전쟁을 도와줄 남부자치도시

연합의 지원군이 클라스라인의 영토를 지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북부자치도시 연합과 이어지던 서쪽의 통로는 이미 드라킬스

에 의해 점령당했기 때문에 안개의 숲을 지날  수는 없고, 그렇기 때문

에 클라스라인의 동쪽 통로를 지나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클라스라인 측에서는 당연히 허락해야할 중요한 일이었다. 드라킬스가

자치도시연합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이 되어버

린 일이었기 때문에, 넓은 평야를 가시고  있는 클라스라인이 드라킬스

공국의 다음 표적이 될 확률이 가장 높았다. 그러므로 북부자치도시 연

합이 이번 파울드평원 전쟁의 승리의 기세로 남부자치도시 연합의 지원

병력까지 얻어 드라킬스의 군사력을 최대한 줄여만  준다면, 혹은 실현

가능성이 아주 적기는 하지만 만약 이겨 라도 준다면 클라스라인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국내의 외골수에 보수적인 귀족세력들이 들고일어나 반

대하고 나설 것이 분명했다. 외국의 군대를  영광스런 클라스라인의 영

토에 지나가게 하는 것은 말도 안될 일이라며 말이다. 클라스라인의 대

부분의 실권을 잡고있는 국무총관이었으나 일단 다수의 세력인 그들 귀

족의 강경한 반대가 일어나면 법왕을 설득하기가 어려워 질 것도 불 보

듯 뻔한 사실이었다.

'어차피 이번 일은 우리 클라스라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 어물거리다

가 성사시키지 못하게 되면 나라의 큰 손해가 오게된다.'

프레이어 공작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리고 있었다. 외무부 관직

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돌 머리 귀족들의 동의 없이 일단 자신의

능력으로 법왕께 말해 통과시키는 것을 말이다.  그로써는 그것이 최선

의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 결정이  미래에 얼마나 큰 폭

풍을 불고 올 런 지,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일단 클라스라인의 외무부에 찾아가지 않고,  국무총관 프레이어 공작

을 찾아가 서신을 전달한 나이트길드의 대외담당관 키발드는 무척 치밀

한 계산 속에 일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외무부로 찾아간다면 극히 보수적이고 소심한 클라스라인 특유의

귀족들이 허락할 가능성이라고는  무척 희박했다. 하지만  조금은 앞을

볼 수 있으며 진심으로 자국을 걱정하는  충직한 인물인 프레이어라면,

그 서신을 받아들일 확률이 확실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직접적

인 관련은 없지만 클라스라인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쥐고있는 국무총

관 프레이어 공작이라면 독단으로라도 서신을  채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그리고 조금  더 미래를 내다본 키

발드는 그렇게 할 프레이어의 행동이 장차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

지에 대해서도 예측하고 있었다.

확실히 프레이어는 나라를 위해 남부자치도시 연합의 지원군을 통과시

켜 줄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지원군이 북부자치도시 연합에 오는 것

이 오히려 전쟁의 불길을 클라스라인에게로 옮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예

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는 좀더  고차원적인 전략가의 시아

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그 동안 나이트 길드에서 총력으로

수집한 정보로 인해 간파한 키발드의 예리한 외교적 수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킬츠일행이 무사히 텔핀에 도착하여 지원군을 얻어오

는 것이다.'

키발드는 지체없이 클라스라인의 수도인 세인트룸을 마차로 빠져 나오

면서 안개의 숲을 지나고 있을 킬츠일행을 생각했다. 마계의 결계인 다

크핵사곤에서 3년을 버티며 탈출에 성공한 킬츠와 루디의 능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총 참모장 마인슈의 말대로, 정말 그들만큼 안개의 숲

을 통과하는데 적격인 사람도 대륙에 드물  것이었다. 하지만 키발드는

자꾸 불안해져 오는 자신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완벽에 가까운

나이트 길드의 정보능력으로도 아직 그 지도마저 완벽하게 만들지 못한

곳이 바로 안개의 숲이었다. 인간의 침입을  완벽히 거부하는 공포스런

자연의 요새였는데 켄타로스 종족과 엘프, 드워프, 심지어는 북해의  빙

해림(氷海林) 에 살고있는 인어들의 서식지까지  정확하게 꾀고있는 나

이트 길드로써는 몇 안 되는 정보의 불모 지역 중 하나가 바로 그곳이

었다.

'일단은 믿어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키발드는 약간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천년 역사의 나이트길드의 흥망

이 이제 막 성인으로써 모습을 갖춘 어린 청년들에게 맞기여야만  한다

는 생각이 그의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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