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52화 (52/166)

제 4장. -안개의 숲- (7)

"허억.. 허억...... 이런."

매직길드에서 A클래스의 판정을 받은 루디의 알마스가 바닥을 드러낸

것은 실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다크핵사곤의 결계 내에서도 초반에만

경험해보았지, 점차 생활에  익숙해진 후반부에는 결코  알마스를 완전

고갈시킨 적이 없었다. 쌓여  가는 경험에 의해 축적되는  마력 운용의

노하우와 신중한 루디 자신의 마력 운용력이  함께 빚어낸 결과였는데,

지금은 그 두 가지의 이유 중에서 신중함을 잃어버린 후였기 때문에 결

국은 밑천을 전부 들어내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총 다섯 마리로 늘어난 가고일들은 또다시  꿈틀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적어도 열 번 이상은  반복 되 버린 일

이었는데, 그 광경을 계속  보고있자니 루디의 속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검게 타버렸다.

"쳇! 또 냐! 하지만 마법은  내 전부가 아니란다. 이  끔찍한 녀석들....

전투마법사의 위력을 보여주지!"

루디는 가고일들이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루디에게로 날아들  자세를

취하자 재빨리 뉴린젤에게로 가서 그녀의 검을 뽑아서 기세 좋게  세워

들었다. 결코 루디가 검을 배운 일은 없었지만, 이제는 달리 방법이  없

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덤볐!"

루디가 굳이 소리치지 않아도 알아서 그렇게 하고있는 가고일들을  바

라보며, 루디는 머릿속으로 킬츠가 검을 휘두르며  마계의 마수들을 해

치워 버리던 그 장면을 떠올렸다. 어중간  하게나마 흉내라도 내 볼 생

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3년간 마계와도 같은 곳에서 단련된 루디의 몸이라고는

하지만, 총 길이가25세션(약 2m)이나 되는 뉴린젤의 검을 자유롭게 다

룬다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상대는 그런 어중간한 검이 먹혀들을 정

도로 약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그리고 선두에서 돌격해오던 가고일은 전력으로 휘두르는 루디의 검이

자신의 몸에 닿기도 전에 고속으로 루디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그러자

루디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검을 놓이며 그대로 한참을 뒤로  날아가서

한 굵은 나무에 강하게 충돌하며 주르륵 흐르듯 무너지며 쓰러져  버렸

다.

"크.... 윽.... 빨라...."

루디의 눈앞이 붉은 색으로 뒤덮이며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한 순

간의 과도한 충격은 끔찍한 고통과 함께 루디의 의식을 점차 흐리게 만

들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의식을 잃기  전에 '끼약!' 하며 자신을 향

해 날아오는 가고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의 주저

없이 무더기로 몰려오는 그 마법생물들의 공포스런 모습을  마지막으로

감상하며, 루디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 날카로운 손톱

이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다면 과연  자신이 그 끔찍할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순간 자신의 앞으로 날아드는 가고일들을 능가하는 엄청난  속

도로 옆에서 무엇인가가 그들을 덮쳐왔다. 순간적인  일격에 막 루디를

덮치려던 선두의 가고일 한 마리가  옆으로 두 동강 나며 그  자리에서

흙으로 변해 땅으로 떨어졌다.

"자식..... 너무 늦게 왔잖아...."

자신을 마지막 순간에서 구해준 그 누군가가 킬츠라는 사실을  루디는

굳이 그의 모습을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밀려오는 안도

의 편안함과 그에 못지 않을 과도한 피로를  함께 느끼며, 루디는 자신

의 속으로 깊이 잠겨들었다.

"대체 어쩌라고 나이트길드에선 우리를 이런 곳으로  보낸 거지! 아무

리 결계에서 살아 빠져 나온 경험이 있다고는 해도.... 나중에  돌아가서

반드시 특별 수당을 단단히 챙기고야 말겠어!"

조금전 가지만 해도 거의 정신이 나가려고 했던 킬츠였으나 일단 루디

와 뉴린젤을 발견하자 바로 안정을 찾으며 가고일들을 신중하게 상대하

기 시작했다. 루디와 뉴린젤은 눈을 감고 둘  다 나무에 기대어서 쓰러

져 있었지만, 킬츠의  소울아이는 그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에 안심이 되었다.

가고일 한 마리는 킬츠 자신조차 예측 못하고 얼떨결에 한 기습의  일

격에 해치웠다고는 하나, 남아있는 네 마리는  먼저간 자신의 동료처럼

그다지 호락호락하게 흙으로 변해줄 것 같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공중

에서 공격해 온다는 지리적인 그들의 이점이 킬츠가 상대하기 더욱  어

렵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청난 속도로 순간순간 돌

격해오는 그 막강한 기세 또한 일품이었다.

"박쥐 같이 생긴 주제에!"

킬츠는 가고일들의 공중 선회 패턴을 파악하고는 그중 가장 가까운곳

에 있는 가고일의 공격을 피해내고선 바로 그 가고일의 공중  사어회장

소로 예측되는 지점을 노려 예리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킬츠의 예

측대로 그곳에서 선회하려던 그 가고일은 킬츠의 검에 반쯤 머리가  잘

려나가며 그대로 흙으로 바뀌어 바람에 흩날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이제 이렇게 상대하면 되겠다! 하고 생각한 킬츠가 자신 있게 다시 자

세를 잡고 나머지 세 마리의 가고일들을 향해 검을 세워들었다. 그러나

킬츠의 생각과는 달리 나머지 가고일들은 이번엔 킬츠의 삼면을 에워싸

며 동시에 협공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박쥐는  조류가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새 대가리는 아닌가 보군....'

킬츠는 밀려오는 아쉬움은 일단 제쳐두며 전력을 다해 사방에서의  공

격을 피해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가고일들의 발톱과  이빨이 킬츠의

급소들을 정확하게 노리며 공격해 왔고 또한 편으로는 루디를 공격했을

때처럼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킬츠는 침착하게 그 공격들을 피해내며 기회를 노려 한 마리씩

공격해 들어갔다. 마법에는 거의 절대적인 저항력을  가지고 있던 가고

일이었지만, 자신들의 속도를 능가하는 킬츠의 검에는  길게 버티지 못

하고 곧 한 마리씩 흙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킬츠가 마지막으로 남은 가고일마저 처리하자 숲은 다시  침묵

의 고요함으로 변해 바뀌어져 있었다. 킬츠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빼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간, 다시 정면의 안개  속에서

무엇인가 여럿의 그림자들이 바른 속도로 킬츠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

다. 바로 또 다른 두 마리의 가고일이었다.

"제길!"

두 마리 중 한 마리의 가고일은 고속으로 킬츠의  옆을 지나, 뒤쪽에

스러져 있는 뉴린젤을 향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

리는 바로 킬츠 자신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그리고 킬츠는 주저 없

이 몸을 돌려 뉴린젤을 향해 날아 들어가는 가고일을 향해 자신의 검을

온 힘을 다해 집어 던졌다.

"캬악!"

막 뉴린젤을 덮치려던 그 가고일은 킬츠의 검에 등에 박히며 그  자리

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흙으로 부스러져  버렸다. 킬츠의 얼굴

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킬츠를  공격해오던 가고일의 손

톱 역시 킬츠의 등을 주저 없이 파고들은 후였다.

"흥.... 고작 내 몸 하나 뚫지  못하는 손톱 따위는 뭣 하러  가지고 있

냐!"

킬츠는 전신으로 퍼져 가는 극악의 고통을 참아내며 오히려  비웃음과

함께 몸을 돌리며 전력을 다해 가고일을 주먹으로 날려버렸다. 퍼억 하

는 소리와 함께 일격을 맞은 가고일은 다시 그들이 날아왔던 늪지의 안

개 속으로 처절하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털퍽하는 소리가 들리

며 늪지 속으로 잠겨 들어가기 시작했다.

킬츠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지만 곧 눈앞이 흐려지며 정신이  아찔해져

오기 시작했다. 바로 등의 상처에서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대량의 혈액

때문이었는데, 이미 옷의 등 부분이 전부 붉게  물들 정도로 출혈의 양

은 심각했다.

그러나 이대로 쓰러질까, 아니면 오기를  써서라도 뉴린젤과 루디에게

로 돌아갈까 하는 결정조차 내리기 전에 킬츠는 또다시 정면의 안개 속

에서 날아오는 검은 날개 달린 그림자들을 보아야만 했다. 게다가 이번

에는 한 두개가 아닌, 그야말로 떼거지의 그림자였다.

새롭게 날아온 가고일의 숫자는 대략 30마리도 더 넘어 보이는 듯  했

다.

"제길.... 쪽수로... 밀어붙이겠다 이거냐...."

킬츠는 도저히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허세를 부리며 다시 검을  쥔

손에 마지막 힘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애초부터 포기와는 인연

이 먼 성격이다 보니 뻔히 보이는 결과에도 마음이 담담해지는  킬츠였

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 무리의 가고일들은 공중에서 킬츠의 주변

을 맴돌기만 할뿐, 그 어떤 공격의 위협도 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저 멀리 정면의 늪지에서부터, 이곳을 침묵의 공간으로 바꾸어 버

리는 공포의 짙은 안개조차 통과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했다.

-이곳은 고대인의 성역, 인간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목소리는 너무나 강압적이고 뻣뻣해서, 마치  공식석상의 국왕이 신하

에게 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단순히 위압이 느껴진다고 해

서 공손하게 고개 숙여 예의를 표할 킬츠가 아니었다.

"누구냐! 이 박쥐들의 보스라면 본인이 직접 나와서 상대하는 것이 어

때!"

킬츠는 혹시 이 목소리의 주인공만 제압한다면 현재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수많은 가고일들이 무력해지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소리쳤다. 소리를 지르자 등이 울려 상처는 더욱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

다. 덕분에 상처가 더 벌어져버렸지만, 그것은 이제 와서 적당히 아물기

를 기대할 정도의 가벼운 상처가 아니었다.

-나는 고대인의 정신이자 의지, 마음이다.-

"그래? 그럼 나이가 까마득하겠군.... 난 올해로 18세인  킬츠 마켄시타

다."

정말로 목소리의 주인이 고대인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은 대륙  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일이었지만, 킬츠로써는가물거리는 의식의 끝자락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는 상황이라 빈정거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

다.

그러자 잠시동안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킬츠는 버티고 서있는  자신

의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 인간이여, 왜 너는 이곳을 찾아온 것인가.  왜 지금 쓰러진 자

들을 막아주는 것인가.    도망치면 살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잠시 후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고 킬츠는 가증스럽지도 않는다는  표정

으로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다니......만약 그렇게 살아남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

데?"

-의미?-

"그래. 대체 무엇을 위해 인간이 산다고 생각하는 거냐."

-생명의 목적은 바로 그  생명 자체가 살아남고  자손을 퍼트리는 데

있지 않은가.-

"하..... 인간을 무슨 늑대나 쿨드처럼  생각하나 본데, 맞긴 맞는  말이

지....... 하지만, 나에겐 소중한  사람들을 버리고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그 소중한 사람들이 내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내가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일

이다. 내가 아직 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 슬픔이,  그 고

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잘 알고 있어....... 더 이상 헛소리하지 마라."

킬츠는 마지막 힘을 다해서 쥐어 짜내듯  말을 마쳤다. 그리고 자신의

바다로 향해 잠겨 들어가는 의식을 완전히 빠지지 않게 붙잡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다. 너무나 고통스런,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신과의 싸움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 신은.. 너희를 만들기 위해.... 우리를 멸망시킨 것인가.... 인간이

여, 그 마음 잘 받았다.-

"뭐?"

-알았다. 너의 행동의  이유를 그것은 실로  평범하면서도 고귀한 것.

우리들이,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 우리는 강하기 때문에 얻지  못했지

만. 너희는 약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구나.-

킬츠의 주위를 맴돌고 있던 가고일들이 다시 방향을 돌려 늪지의 안개

속으로 다시 사라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무엇인가가 그 늪

의 위를 커다란 네 발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자멘은 너희의 생명을 구해주고, 안전하게 바라는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너의 마음에 반한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약하지만 강인한  인

간. 자네가 자멘의 주인이다.-

그 거대한 생물은 바로 말보다 더  큰 몸집을 가지고 있는 긴  은빛의

털을 가진 늑대였다. 늑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푸른빛의 서글서

글한 눈매뿐. 마치 모든  늑대의 우두머리처럼, 수려하고  멋진, 당당한

모습을 하고있었다.

"은색의..... 늑대......"

킬츠는 그 늑대의 모습을 막 잠겨 들어가는 눈으로 바라보고는  그대로

의식의 끈이 잘라지며 힘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버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킬츠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한계를

버티어 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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