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49화 (49/166)

제 4장. -안개의 숲- (4)

"크라다겜 공. 특별히 느껴지는 것은 없나요? 예를 들면 이 자치도시

연합에 대한 적의라던가...."

쿠슬리는 크라다겜과 함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출입하는 남쪽  성문을

지켜보며 수상한 자들이 성으로 들어오지 않나 감시를 하고 있는  중이

었다. 파울드 평원 전쟁동안  카름의 죽음에 대한 실의에  빠져 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잠적해 있었던 쿠슬리는 약 보름만에 완전히 기운을  차

리고 나와 고급여관 세피로이스의 각 층마다 활보하고 다니며 사람들에

게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둥 전보다 더 활기찬 모습을 보이기 시

작했다. 그리고 일단은 파울드의  특수치안담당관인 크라다겜의 보조를

자처하고 나서 지금은 그와  함께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첫 보조의 역할을 하게된 오늘 아침부터 부슬거

리며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비에 옷이 젖는다 해서 임무를 내 팽개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

다. 쿠슬리는 비가 오던, 오지 않던 전혀 상관하지 않으며 깊게  눌러쓴

모자 사이로 보라색의 섬뜩한 눈동자를 번득이고 있는 크라다겜은 바라

보았다. 마계 제일의 전투 마족 중 하나로 불리는 데스나이트의 마스터

였던 마족. 그러나 지금은 신기하게도 인간과 같은 차림을 하고, 인간의

일을 하고있었다. 음성이나 피부색을 봐서는 극히 정상적인 마족이었으

나, 최근 점점 인간을 닮아가서 타고난 음성은  어쩔 수 없지만 말투나

어조만큼은 무척 부드러워져 있었다. 자치도시 연합의 용병대의 천인장

이며 용병들 사이에 '얼음 인형'  으로 불리는 뉴린젤 파우카에  비하면

오히려 더욱 인간다웠다.

"특별히..... 살기는 느껴지지 않는군. 들어오는 사람들 대부분  그냥 평

범한 인간들이야. 만약 나의  감각영역을 피해 자신의 살기를  숨길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크라다겜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도시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응시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소울아이와 흡사한  이 살기를 감지하

는 마족의 특별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제아무리 전 나이트길드의 드라킬

스 지부장이었던 로니온이라 하더라도 성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숨겨

진 속뜻을 짐작할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실제로  요 근래 전쟁이 끝나

고  사흘동안, 드라킬스의 청탁을  받은 암살자 들이 시장을  암살하기

위해 여행객이나 상인,  혹은 용병으로 위장하여  파울드로 들어오려고

했었다. 그들은 감쪽같이 성 문지기를 하고있던  자유기사들의 눈은 속

였지만, 그보다 조금 멀리서 감시하고있는 나이트길드 특수치안유지 담

당관의 눈은 속이지 못하였다.

"드라킬스의 총 참모장은 외부적인 군대에 의한 공격과 내부적인 암살

자들에 의한 공격을 절묘하게 혼합하여 사용하는군요. 어제까지만 해도

여섯 명이나 잡았지요?"

"그랬지. 다들 무척 실력 있는 자였다. 지금  나이트길드의 정보담당들

이 역으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데리고 갔다."

"네. 오늘 아침에 제란스 공에게 들었는데 그들 대부분 시장을 암살하

기 위해 침입하려고 했다 하는군요. 드라킬스의 총 참모장은 다 좋은데

정보에 약간 소홀한 것 같습니다."

쿠슬리가 빙그레 웃으며 크라다겜에게 말하자 크라다겜은 잠시 생각하

다가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쿠슬리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쿠슬리는

"지금 자치도시 연합의 군대의 통솔권을 쥐고있는 것은 파울드의 시장

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나이트 길드이기 때문입니다. 시장의 암살에 성공

해 봤자, 군대의 통솔엔 아무런  영향이 없어요. 민심이 조금  흔들리는

정도?"

쿠슬리는 거기가지 말하고는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

자치도시연합에 드라킬스와 맞붙을 수 있는 최소한의 넉넉한 병력만 준

비되어 있다면, 암살자를 매수한 뒤 시장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대륙

전역에 퍼트려, 파울드의 사정이 혼란할 것이라고  판단해 급히 병력을

파견할 것임에 분명한 드라킬스의군을 역공을 섬멸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이 성공한다 해도 현재로써는 그

들과 맞설 수 있는 병력이 절대 부족하기 때문에 굳이 시도해볼 가치가

없었다. 어서 빨리 사신으로 떠난 킬츠일행이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오

면 좋으련만, 쿠슬리는 혹시 그들이 위험해 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훌륭히 임무를 성공하고 당당히 파울드로 귀환할 것을 바라는 기대감이

서로 상반되어 충돌하고 있었다. 이제 세상에서 약초 상, 쿠슬리의 모습

을 알고있는 것은 바로 킬츠와 루디, 그리고세렌뿐이기 때문이었다.

"음......... 저기 저 어린 여자, 느낌이 이상하다, 살기는 아닌데...... 무엇

인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힘을 체내에 유지하고 있어, 대체 뭐지?"

그때 변함없이 도시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감시하던 크라다겜이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한 사람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쿠슬리도 크라다겜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있는 그 사람을 보았는데, 그녀는 16, 17세쯤 되 보

이는 소녀로 밝은 녹색의 바탕에 사계의 나무문양이 수놓아진 스피리스

트의 정령사복장을 하고있었다.

"아, 긴장할 것 없어요. 저 소녀는 스피리스트의 정령사이니까. 크라다

겜 공이 느끼는 그것은 그녀의 정령일  것입니다. 아마도 8년의 수행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데...."

쿠슬리는 크라다겜의 어깨를 두드리며  정령사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

다. 크라다겜은 그 정령사에 대하여  무척 관심 있는 반응을  보였는데,

마계엔 정령이 오직 분노와, 절망, 같은 인간의 감정에 관련된 것들만이

있어서 정령사라는 직업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정령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령에게 지배당하는 것이기 때문

에.

그때 바로 그 문제의 정령사  소녀가 비를 맞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

다가는 쿠슬리와 크라다겜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는 급하게 달려오기 시

작했다.

"실례지만.... 혹시  미놀이라는 여관을  아세요? 이   도시는 처음이라

서......"

"아, 그러셨군요. 여관 미놀은......"

갑작스런 정령사의 행동에 잠깐 긴장했던 쿠슬리는 곧 안심하며  여관

의 위치를 설명해 주려고 했다  그리고 그때 자세히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얼굴  생김새라서 쿠슬리는 약간

어리둥절했다.

'어디에서 봤더라.......'

그리고 그는 곧 이 정령사 소녀의 약 8년 전의 얼굴형태를 가물거리게

나마 기억할 수 있었다. 언제나 밝고 활기차게 마을을 뛰어다니며 사람

들을 즐겁게 했던 바로 그 소녀.

"에리나! 에리나 아니야? 세상에."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알고있는 이상한  아저씨의 당황하며 기뻐하는  표정에

역시 소녀정령사 에리나도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8년이란 성

장기를 보낸 에리나와는 달리, 쿠슬리의 얼굴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

으므로 그녀는 곧 그의 얼굴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쿠, 쿠슬리 아저씨? 살아 계셨군요!"

에리나는 갑자기 그 고운 눈가에 가득 눈물이 고이며 쿠슬리의 품으로

와락 안기었다. 쿠슬리도 감격하며 예전과는 몰라보게 미인으로 성장한

그녀를 기꺼이 꼭 안아 주었다.

"정말.... 많이 컸구나 에리나."

"우리 마을이, 우리 언덕마을이 이상한 결계로 휩싸여서.....  모두다 죽

은 줄 알았어요. 혹시나 해서  이 도시로 와봤는데... 역시 살아  계셨군

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는 글썽거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희망에 가득 찬 얼굴로  쿠슬리에

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그야말로 천사의 미소였다.

"그런데 우리 오빠는 요? 세렌  오빠는 어떻게 됐지요? 살아  있지요?

그리고 킬츠 오빠는 요? 역시 살아있겠지요?"

그녀의 울먹거리는 희망에 가득 찬 얼굴을 바라보며 쿠슬리 역시 그녀

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척 기뻐했다.

"그럼, 물론이지. 그 녀석들이 어디 쉽게 죽을 녀석들이니. 다 건강하

게 잘 있어. 특히 킬츠는 말이지."

쿠슬리는 크라다겜에게 자리를 맡겨 두고는 에리나를 데리고 현재  그

의 안식처인 세피로이스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오랜만에 진심으로

즐거운 기분을 느낄 수 있게된 쿠슬리였다. 슬픈 이야기도, 즐거운 이야

기도 모두 해야겠지만, 일단은  그녀가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한   없이

세상이 밝아지는 듯 했다.

"세렌, 뭘 쓰고 있는  거야? 저번에 왔던  공주 님의 편지에  대한 답

장?"

"아니. 이건 스피리스트의 신전으로 보내는 거야."

기마 수련이 끝나고, 저녁  자유시간이 되자 갑옷을  정리해 벗어놓고

샤워를 끝낸 세렌은 테이블에 앉아서 최근 걱정되는 일을 해결하기  위

한 행동에 들어갔다. 바로 스피리스트의 신정에서  정령사의 수련이 끝

났을 그의 여동생, 에리나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동안 수련 때문에  편

지 한 통 제대로 못쓴 것을 후회하며,  언덕마을이 일을 당했으니 이쪽

클라스라인으로 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관심을 가지던 카젯이 여동생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아니, 여동생이라고? 그런데 그 동안 왜 한마디도 안 했어!"

"그야.... 너 같은 무 지능의 막가는 인생이 함부로 관심을 가질까봐 그

랬을 테지."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세렌이 아니라 자신의 침대에서 독서에 열중하

던 다운크람이었다. 실로 통렬한 일격이었는데 간만에 기습당한 카젯은

비틀거리며 다운크람에게 강력하게 항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왜....... 무 지능의 막가는 인생이라는 거야! 증거 있어?"

"증거는 없지만..... 여기 이렇게 다섯 명이나 되는 증인들이 버티고 있

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마침 방으로 들어온 루벨도 다운크람의 말에 긍정을 하면서 고개를 끄

덕거렸다. 펠린도 부정하지는 않는지 고개를 숙이고는 큭큭거리며 웃고

있었다. 물론 자이푸스 남작의 신간 저서를  빠져서 읽고있던 키사르는

예외였지만.

믿었던 펠린마저 기대를 배신하자  당황한 카젯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가만히 있는 키사르를 발견하고는 감격하며 소리쳤다.

"역시 키사르! 너밖에 없어."

"조용히 해. 이 무능하고 졸렬하며 예의 없는 상식 밖의  불한당. 시끄

러워서 책을 읽을 수가 없다."

"어,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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