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46화 (46/166)

제 4장. -안개의 숲- (1)

"공주 님. 왕실 재단사인 밀린입니다."

"어서 와요 밀린."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단을 붙이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러

니까..."

세렌에게 크게 수모를 당하고 얼마 후,  클라스라인의 둘째 공주인 미

네아 공주는 갑자기 왕실의 재단사인 밀린부인을 모셔다 놓고는 옷  짓

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밀린은 30년 이상 왕족만을 위하여 옷을 만들어온 명실공히  클라스라

인 최고의 재단사로, 원래 아무에게 그 기술을  전수해 주는 것이 아니

었으나, 미네아 공주는 자신의 말이라면 꼼짝 못하는 그녀의 아버지, 법

왕의 성질을 이용하여 손쉽게 최고의 명인에게서 옷 짓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녀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떤 한가지의 일에  열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어떤 일도, 놀이도 그녀의 흥미를  지속시켜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하고있는 일은 흥미를 위해서, 즐기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남의 마음을 진정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위도, 돈

도, 명예도 아닙니다.-

세렌에의 그 말을 들은이후, 그녀의 생각은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내

가 만약에 공주로 태어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냥 아무 것도 못하는

무능한 여자일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태어나서  지금

까지 공주로써 편하게 놀고 지내며 덧없이 써버렸던 시간들이 너무나도

아깝게 느껴졌다.

'난.... 이제 공주가 아니라도 인정받을 수  있는 나만의 가치를 쌓아가

겠어.... 그리고 그런 내가 완성되는 그때는.... 지휘, 권력, 돈 같은, 나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진짜 내 마음으로 세렌, 너의 마음을 잡을 꺼

야.'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전에는 없었던 확실한 '목표' 가정해지자  하는 일 하나 하나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한번 느끼면 잠시 후에 사라지는 그런

유희로써의 즐거움이 아닌, 영원히 간직될 자신의 성장에 대한  즐거움,

그리고 언젠가 목표가 이루어 질 날을 상상하는 두근거리는 진정한  즐

거움이었다.

전 미네아 공주입니다.

지금 저는 옷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정말로 나를 위해서요.

그리고 언젠가 당신의 저의 기사로 하겠다는 말 꼭 이루겠습니다.

그러니까 세렌도 훌륭한 패러딘나이트가 되어서

저의 기대에 부흥해 주시길 바래요.

미네아 파우킨저로부터.

견습 패러딘 나이트,  세렌 마

틴스에게.

추신. 저는 나중에 대륙 최고의 재단사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요?

패러딘나이트의 수행기간이 1년 반정도 남아있을 무렵,  수행은 그 하

이라이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평균 성인남자의 몸무게에

필적하는 무게를 가진 패러딘나이트의 갑옷을 입고 지금까지의  수련을

그래도 하는 것이었다.  오전에 휴페리온 천  번, 오후에 휴페리온  4천

번, 저녁에 승마훈련 1크락. 전혀 줄지 않은 그대로의 수련을 이제는 그

무거운 갑옷으로 완전 무장하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 5일째.... 생각보다 정신적인 데미지가 강력해......"

밤의 자유시간 때, 평소처럼 루벨이나 펠린과의 연습대련을 포기한 카

젯은 비틀거리며 자신의 침대로 몸을 던졌다. 물론 신관들이 수련이 끝

난 다음엔 신성마법으로 거의 완벽하게 화복을 시켜주었지만, 그 1크락

의 시간을 다시 견디어야 한다는 정신의 부담감과 압박감은 여전히  지

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었다.

"뭘 보고 있어 세렌?"

카젯보다 방으로 조금 뒤에 들러온 펠린이 가장 먼저 방에 들어와  무

엇인가를 보고있는 세렌을 바라보며 궁금해했다.

"아, 편지 읽고 있어. 얼마 전에 구경하러 와서는 소란한번  피우고 갔

던 그 공주 님 있잖아."

"미네아 공주님?"

"아, 그 공주? 이번에는 패러딘나이트의 기사단장 님과 대결해 달라고

하는 도전장인가? 하하하...."

펠린의 뒤를 이어 들어온 루벨이 그 거대한 몸집을 흔들며 한껏 웃자,

세렌은 고개를 저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니, 좀 뭔가를 깨 닳은 모양이야."

"엥? 왜?"

"옷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대."

킬츠의 말에 모두들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세렌이 테이블

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질문을 할 수  없었

다.

"어디가지, 킬츠?"

최근, 서로 책을 빌려와서 읽고는 그것을  가지고 격렬한 언쟁을 벌이

고 있는 다운크람과 키사르는 뒤늦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가지도 돌아

오다가 계단을 내려오는 세렌과 마주쳤다.

"아, 다운크람, 키사르. 잠깐 바람이나 쐬려고..."

세렌은 그답지 않게 살짝 어깨를 으쓱하고는 더 이상의 말없이 그들의

옆을 지나갔다.

"무언가 이상하군, 키사르. 그렇게 생각 한해?"

"신관들의 말로는 세렌에게 편지가 왔다고 한다."

"거기에...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나? 예를  들면 다른 가문에서 보

내온 약혼 신청서라던가......"

"낸들 아나."

영문을 모르는 다운크람과 키사르를 뒤로하고,  세렌은 수련관 밖으로

나가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평범한 걸음걸이였지만, 묘하게 즐거운  박

자가 있는 그런 걸음이었다.

'어쩌면.... 사실은 정말 대단한 공주 님께 호감을 사버린 모양이 군....'

사실 세렌이 미네아 공주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야말로 이 부패한 귀

족, 왕족 사회의 결정적인 병폐의 부산물이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그러

나 세렌의 판단과는 달리, 진짜 그녀는 사실 무척이나 개방적이고 열정

적인 마음의 소유자였다. 아무래도 대국의 공주라는  외부적 환경이 그

녀를 지금까지 그렇게 막 가는 인생으로 만들었던 것 같았다.

"..... 패러딘나이트가 되어야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정말 어깨가

무거운데...."

중얼거리는 말과는 달리 세렌은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다시 펴보았다.

이미 밤이 깊은지라 주변에 만만한 불빛이 없어 편지의 글씨를 보는 데

에는 문제가 있었으나, 그 편지를 쓴 사람의 마음과 그 편지를 읽은 사

람이 느끼는 마음을 즐기기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음날, 공포의 갑옷을 갖춰 입고 아침수련에 몰입되어 있을 무렵,  옆

에서 함께 수련하던 키사르가 세렌에게  어제 알아낸 정보를 알려주었

다.

"신관들의 말에 의하면, 자치도시 연합이  드라킬스와의 그 마지막 전

쟁에서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 세렌은 신기해하며  검을 휘두르는 속도를 약간  늦추었

다.

"정말? 대단하군. 아마 병력차이가 두  배정도 아니었나? 게다가 농성

을 한다고 했는데,"

"나도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새롭게 임명된 자치도시연합의 총 참

모장의 전술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그렇다면.... 역시 기병들을 이용하여 분산된 적군의  일부를 공격하거

나 보급선을 끊어서 심리적, 체력적인 우위를  확보하여 전쟁을 벌였나

보지?"

"그런 세세한 사실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아마  그 방법 이외엔 그 정

도의 압도적인 전력 차를 가지고 승리할 리가 없을 거다. 나중에 더 자

세하게 알아보지."

"난 네가 이 수련관 안에서 그런 정보들을  알아내는 게 더 신기하다.

그런데... 자치도시 연합이 마지막이라고 여겨졌던  그 전쟁에서 승리했

으니, 그 다음은 어떻게 나올까?"

세렌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자치도시연합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들이

앞으로어떤 방향을 취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계속 병력의 열세를 가지

고도 전술적인 우세를 믿고 전쟁을 계속한다면,  아무래도 결국은 망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이번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하여도, 무언가  획기

적인 전략이 없는 한, 결국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자치도시연합의 슬픈

국력이었다.

"나 같으면 전쟁의 불길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방법을 사용할 것이

다. 아무리 이번에  승리했다. 해도 앞으로 그런 전쟁을 계속한다면, 북

부 자치도시 연합은 결코 멸망을 피하지 못해."

키사르는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었

다. 살아남기 위한, 멸망하지 않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 하지만 만약

전쟁의 불길을 돌린다면 과연 어디로 돌릴 것인가? 세렌은 아무래도 심

상치 않은 기분을 느끼며, 혹시나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르는 클라스라

인과 드라킬스의 전면전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