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전란의 길- (13)
"대승이야. 내일은 모여서 파티라도 해야겠군."
"장소는 세피로이스의 1층 로비가 좋겠습니다."
"좋아. 지금부터 여관의 요리사들을 총 가동시키도록!"
자치도시 연합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튿날, 자치도시 연합의 시장
을 비롯한 인사들과 군의 장교 급(천인장 이상)이상의 사람들, 그리고
나이트 길드 소속의 몇몇 인물들이 참석한 승리를 자축하는 파티가 열
렸다. 장소는 파울드의 고급여관 중에서 선두를 달리며 그 숨은 실체는
나이트 길드의 총 본거지인 여관 세피로이스의 1층 로비였다.
이 파티에 킬츠와 루디는 일단 나이트 길드의 소속으로 참가했다. 아
직 정식으로 들어오지 않아서였다. 크라다겜은 특별히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나이트 길드의 나
이트 제란스와 나이트 피리우크가 말쑥한 예복차림으로 참석하여 더욱
자리를 빛내주었다. 특히 피리우크는 화려한 드레스를 아름답게 차려입
은 자신의 아내 이네린과 함께 정답게 참석함으로써 주위에 큰 부러움
을 샀다.
"정말 아름다우시군 요, 이네린 부인. 멋진 드레스입니다."
"감사합니다. 제란스 님. 남편이 골라 준거예요."
"아.... 그렇군요,"
제란스는 잠깐 단 청을 피우는 피리우크를 바라보며 알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나이트 길드의 자치도시 연합 담당관인 나이트
피리우크는 소문난 애처가임에 틀림없었다.
"정말 대단한 활약이셨습니다 스와인 대장."
"역시 혼의 용병단의 용병장답군요."
"귀 공의 눈부신 활약은 정말........"
스와인은 자치도시 연합의 인사들에게 휩싸여 엄청난 찬사와 감탄을
받고있었다. 일단, 적의 사령관인 펠류즈를 쓰러뜨린 것이 스와인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분위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스와인으로써는 혼
의 용병 전체를 대표해서 참석했음을 감안, 어색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
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저런 담소들이 연회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을 때 킬츠는 파티 장
한 편에 있는 음식 테이블 옆에 서서 불과 어제까지 전장에서 생사의
위기를 함께 나누었던 세 명의 새로운 천인장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다.
"캬! 정말 끝내주는 와인인데, 어이 킬츠! 이것 좀 먹어봐...... 음, 근데
말을 놓아도 되겠지? 용병에게 예의를 갖추어 말하라는 것은 너무 무거
운 짐이거든."
크랭크는 클라스라인의 612년 산 레드 와인 한잔을 죽 들이키며 탄성
과 함께 킬츠에게도 한잔 내밀었다. 그는 어디서 빌려왔는지 어색하게
나마 예복을 갖춰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척 불편한지 연신 어깨를
움직거리고 있었다. 그의 짧게 깎은 금발과 우람한 근육질의 체격에 예
복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 역시 이런 장소에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 먹을만하네. 물론 말을 놓아도 좋아. 하지만 나도 그럴 테니까."
"바로 그거야! 역시 말이 통하는 대장이란 말이야!"
"동감. 용병에게 10년 정도의 나이 차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누구나
친구고 누구나 동료니까."
옆에서 자신의 접시에 끊임없이 음식을 덜어놓으며 왕성한 식욕을 과
시하던 하인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크랭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인스는 크랭크와 함께 용병생활을 시작한 32세의 청년으로 절친한
친구인 크랭크와는 달리 약간 마르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짙은 갈색의
긴 앞머리를 한껏 내려 멋을 부리고 있었다. 언뜻 보면 마치 제비같이
보이는 외모였으나 사실 그는 크랭크와 쌍벽을 이루는 용병대의 실력자
였다. 일명 단창의 하인스라고 불렸는데 길이 15세션(약 120cm) 의 단
창을 양손으로 번갈아 가며 자유자재로 놀리는 그의 실력은 가히 신기
에 가까울 정도였다. 겉으로는 깔끔해 보이지만, 그것은 얼굴뿐이고 사
실 그곳을 제외한 그의 몸에는 10년 이상의 용병생활로 인해 입은 수많
은 영광의 상처들이 새겨져 있었다.
킬츠는 두 잔 째의 와인을 입으로 가져가며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는
뉴린젤을 바라보았다. 어제의 전투로 온몸에 묻은 핏자국을 없애기 위
해서인지, 처음으로 깔끔하게 보이는 길고 검은 결 좋은 머리카락과 얼
음으로 조각한 듯이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 표정 없는 인형과도 같은
얼굴. 바뀐 것이라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흰색 계통의 남성용 예복을
입고 있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녀의 성격에 드레스를 입을 리도 만무했
고 그렇다고 이미 있는 드레스 중에서 무척 큰 키의 그녀에게 맞는 사
이즈가 있을 리도 없었다.
지금 그녀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은 체, 오직 그 차가운 눈동자를
한 곳으로 고정시켜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킬츠는 그녀의 시선
을 따라 그녀가 보고있는 것을 따라 보았는데, 바로 그녀가 보고있는
것은 주변의 사람들과 환한 얼굴로 미소를 띄우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나이트 피리우크의 부인인 이네린이었다.
"이 와인 마시지 않을래? 뉴린젤?"
"........ 음, 아니, 마시지."
킬츠가 모르는 척 뉴린젤에게 말을 걸며 와인 잔을 내밀자 뉴린젤은
잠시 후 조금 당황하는 듯한 태도로 킬츠가 건넨 와인 잔을 받아 단숨
에 마셔버렸다.
"멋지군! 역시 천인장다운 자세야 뉴린젤. 모름지기 용병이라면 남녀를
떠나서 맥주 한 통은 마셔야.. 아니이건 고급 와인이니 두 통은 마셔야
겠구만, 하하하..."
크랭크는 와인 잔을 단숨에 비운 뉴린젤을 보고는 호탕하게 웃어 제치
며 자신도 조 한잔의 와인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직접 다음 와인 잔을
뉴린젤에게 건네주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
크랭크가 두 번째의 와인 잔을 건네주기도 전에 뉴린젤은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스러져 버렸다.
"어어! 왜 그래!"
킬츠는 깜짝 놀라며 쓰러진 뉴린젤에게로황급히 몸을 숙였다.
"뉴린젤! 뉴린젤! 정신차려!"
"....."
"하하하....... 어째 시작이 좋다 했더니 그거 한잔을 못 버티나....."
정신을 잃은 그녀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본 크랭크는 다시 한번 크
게 웃으며 킬츠의 등을 두드렸다.
"우리 무서운 표정의 천인장님께서 술에 취해 쓰러지셨네. 킬츠 사령
관? 방까지 옮겨다 드리지 그래?"
"엑! 내가?"
"난 여기서 이 좋은 와인을 거덜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띄고 있어서
말이야,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구. 하인스도 고급 요리라면 사족을 못쓰
고 말이야."
"음....."
별수 없이 뉴린젤을 방까지 모셔다 놓아야되는 임무를 맡게된 킬츠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서 등에 없었다.
"그럼, 뉴린젤을 방에다 눕혀 놓고 다시 내려올게."
"엉뚱한 짓은 하지 말라고 대장."
"맞아. 자고로 여자란 서로가 동의하지 않고서는 건드리면 안 되는 것
이지."
짓궂은 부하들의 농담을 뒤로하고, 킬츠는 연회장에서 벗어나 뉴린젤
이 묵고있는 세피로이스의 5층 객실로 향해갔다.
'키는 엄청 크던데.... 생각보다 무겁지는 않군. 역시 여자라서 그런가?'
킬츠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막 계단 가에 도착하여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그의 등에 업힌 뉴린젤이 조금 정신이 드는지 꿈틀거렸다.
"아, 정신이 들어?......."
"난... 난....."
킬츠는 조금 머쓱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뉴린젤은 자신이 킬츠에게 업
혔다는 사실 따윈 전혀 의식하지 않은 체 발음이 굴러가는 취한 목소리
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 아니...... 나빠......"
평소와는 전혀 다른 그녀의 말투에 킬츠는 적지 않게 놀랐다. 역시 술
에 취해서인지, 그녀는 킬츠의 예상밖의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슬퍼..... 너무 슬퍼... 나도.... 다른 여자들처럼 예쁘게 꾸며보고 싶어....
치마도 입고... 레이스가 달린 걸로... 드레스도 입어보고 싶어...... 하지
만... 난 너무 키가 커서 안 어울릴 꺼야...."
도대체 뉴린젤이 어떤 얼굴로 이런 말을 하는지 킬츠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 평소에 얼음장같던 말투의 그녀가 이런 말을 하다니.
킬츠는 조금씩 당황하기 시작했다.
"화장도.. 해보고 싶어.... 하지만 내 얼굴은 이미 굳어버렸어.... 굳어버
렸어... 그리고... 그리고... 흑.. 흑... 흑....."
'우, 운닷!'
갑자기 뉴린젤이 흐느끼며 울음을 터트리려 하자 킬츠는 어쩔 줄 모르
며 더듬거렸다.
"뉴.. 뉴린젤은.. 우. 워낙 미인이라 화장 같은 건 안 해도 상관없어."
그러나 뉴린젤의 킬츠의 달램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점점 울음에 잠겨
들어가는 목소리로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난.. 난.. 흑흑.... 흑.. 어제..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어... 아주 많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죽은 사람들의 피에 가득 젖어버렸어.... 언제
나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제는 한숨
도 자지 못했어... 잠이 안 왔어... 흑.. 흑흑... 너무 아파... 가슴이... 가슴
이 너무 아파..."
그러고 보니 킬츠도, 뉴린젤도 사람을 직접 죽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었다. 오히려 킬츠 자신은 사람을 수없이 죽였어도, 전혀 개이 치 않고
있었다.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
히려 깊이 상처를 받은 것은 카름이었다. 반복된 생활로 굳어져 버린
그녀의 차가운 표정으로 지금까지 겨우 숨겨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흑... 흑흑... 여자로 태어났는데... 왜 생명을 죽이는 도구로
만들어 졌을까.... 흑......"
그녀는 결국 큰 울음은 터트리지 않고 계속 흐느끼며 중얼거리다가 점
점 조용해졌다.
"아버지... 미워... 증오해.... 하지만.... 쉬고싶어..."
뉴린젤의 방에 도착한 킬츠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며 이불을 덮어주었
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킬츠는 그녀가 짓고 있는 평범한 소녀의 슬
픈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감긴 눈가에 가득 눈물이 고여 주르륵 흘러내
리고 있었다.
"평소의 표정도... 원래의 표정도... 22살 아가씨의 표정이 아니야...... 잘
자, 뉴린젤."
킬츠는 그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불을 끄고는 조심스레 그녀의 방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나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하던 킬츠
에게 소리 없이 기다리고 있던 뉴린젤이 나타났다.
"어제 나를 방까지 옮겨 준 것이 너인가?"
"음... 그래."
"내가 이상한 말하지 않았나?"
"아니? 난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킬츠는 고개를 저으며 시치미를 떼었고 뉴린젤을 고개를끄덕이며 몸
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킬츠도 어깨를 으쓱하며 뉴린젤의 뒤를 따
라, 계속 식당으로 나있는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