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42화 (42/166)

제 3장. -전란의 길- (10)

제란스의 염려는 다행이 현실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성을 떠난 자유기사단은 적의 병력을 기습 공격한 다음 교묘하게 말머

리를 돌려 토우르 성으로 재 진격했다. 신입  나이트들은 처음 겪는 전

쟁에 무척 긴장된 모습을 보였지만, 그 동안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고참

나이트들의 견실한 지휘하에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령관을 맡은 나이트길드의 피리우크는 갑작스런  지휘계통의

변화가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판단, 기존의  자유기사단의 기사단장을

맡고 있던 나이트 세텔에게 총 지휘권을 맞기고 자신은 전체적인  상황

을 판단, 나이트 세텔에게 조언을 해줄 뿐이었다.

그리하여 갑자기 자신들의 사령관으로  불쑥 나타난 피리우크에  대한

자유기사들의 불신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오히려  적절한 상황판단을

하는 뛰어난 인물로 인식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토우르성에 남아있는 소수의 드라킬스 군들이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

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나이트 세텔은 굳게 닻인 토우르의 성문을 멀리서 바라보며  피리우크

에게 말했다. 성안의 적군은 100명도 되지  않는 미약한 것이었으나 일

단 성문을 닫고 수세로 나온 이상 격파하는데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몇 가지의 공성병기를 준비 되 있기는 하지만 무턱대고  성문을 파괴

해버리면 나중에 드라킬스군의  재공격 시에 곤란할지도  모르니까........

일단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립시다. 적의 숫자는  극히 소수이니 넓은 성

벽을 전부 수비하지 못하겠지요. 약 30여명의 기사들이  밤에 성  벽을

타고 올라 기습을 가한다면 큰 피해 없이 성을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

다."

피리우크는 적절한 방법을 생각해 내고는 나이트 세텔에게 야습을  주

문했다. 원래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성벽을 타고 안으로 기습을 한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었지만 자유기사들에게 그런 가식 따위는  존재하

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자유기사의 속성

을 잘 알고있는 피리우크였고 또한 그런 피리우크의 기대에 충분히  부

흥할 수 있을 실력 정도는 갖추고있는 자유기사단이었다.

이윽고 밤이 되자 성안 잠입 부대로 선발된 30명의 젊은  자유기사들

이 낮 동안의 경계로 지쳐버린 드라킬스군의 시아를 피해 성벽을  타고

무사히 잠입하여 성벽 위에 있던  100여명의 드라킬스 군을 기세  좋게

해치워 벼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문이 무사히 열렸고 자유

기사단들은 유유히 성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환호성소리가 성안을 가득 매우며 울려 퍼졌다. 억압되어 있

던 3만 여명의 사람들 모두가 자유기사단을 환성과 열광으로  맞아주었

다. 주민들은 대부분 여자나  노인, 어린아이들이었는데 대부분의  젊은

남자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병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죽음을 맞이했

기 때문에 그랬다. 만약 성안 사람들이 평균적인 연령구성을 이루고 있

었다면 드라킬스 군도 고작 100여명으로 수비를 시키는 따위의  어리석

은 일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성안에는 드라킬스 군의 본대로 보낼 보급품들이 수레와 마차에  담겨

져 대기 중이었다. 이로써 현재 파울드 성을 노리고 공격해오는 드라킬

스군의 모든 보급로가 차단된 것이었다. 보급은  곳 군대의 생명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무시하며 중요하게  생각 치 않았던 드라킬스군의

파멸의 종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어째서! 보급물자가 오지 않는 것이냐! 대체 왜!"

"아무래도..... 마켄 성과 토우르  성이 적의 손에  점령된 것 같습니다

만...."

"뭐! 이 비겁한 놈들!"

이번 전쟁에 동원된 드라킬스군의 총 사령관을 맡고있는 드래곤  나이

트 NO74인 펠류즈는 연이어 들려오는 충격적인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은 자신 때문에 모두  초래한 결과들이었는데 자신

의 무능력함을 탓하지는 않고 오로지 적의 전략을 비겁하다 질타할  뿐

이었다. 아무리 적이라고 하나 상대의 훌륭한  전략을 보고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그 자세부터가 벌써 지휘관으로써의 능력에 절대적인  무능력

함을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이... 이렇게 된 이상 행군속도를 높여 빠른 속도로 파울드 성을 공격

하는 거다! 파울드 성만 점령하면 식량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다!"

현재 속도로 진군을 계속한다면 파울드 성가지 약 3일 정도가 걸렸다.

그러나 남아있는 식량은 2만 이상의  아군이 약 하루정도 먹을  분량이

남아 있을 뿐, 행군속도를 빠르게 한다해도 2일 정도는 걸릴텐데,  그렇

다면 적어도 하루정도는 굶어야만 했다. 그러면  군사들의 사기가 아래

로 곤두박질 칠 것이라는 것은 안 봐도 뻔한 사실이었다.

자치도시 연합군의 총 참모장인 마인슈는 여기에서 드라킬스 군이  병

력을 약 3,4천 정도 분산시켜 마켄 성이나 토우르 성의 재 함락을 시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으나,  드라킬스군의 사령관인 펠

류즈는 그 정도의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조금의 전략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성을  탈환한 적군이 소수일 것이라는

판단아래 그 이상의 병력을 보내어 성을 다시 탈환하여 보급물자를  확

보할 것이었지만 펠류즈는 애초에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미

련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 미련함이 오히려 득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다. 성을 탈환한 적의 군대는  결코 소수가 아니라, 거의  전부였던

것이었다. 보병 3,4천으로 공격했다간 손도 쓰지 못하고 전멸 당할 군대

가 그곳에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펠류즈에게 그런 행운이 따랐다고 하더라도,  보급선이

끊어진 이상, 승리의 여신은 이미 자치도시연합군의  손을 들어주고 있

었다.

킬츠는 어둠이 짖게 깔린 도시 파울드의 성벽 위에 올라 서있었다. 이

제 곧 벌어질 전쟁을 생각하며, 인간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을 그 처참

한 광경들을 상상하며 침묵의 어둠 속에 홀로 서있었다.

킬츠는 시간상 빠르면 내일 오후, 늦어도  모래 아침엔 시작될 본격적

인 전쟁을 위하여 성의 수비를 맡은 대부분의 용병들에게 막사로  돌아

가 편히 잠을 자두라고 말했다. 이제 곳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절

박한 상황이었지만 이런 휴식이 있어야  전쟁에 지친 용병들이 전력을

다해 힘을 낼 수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편히 쉴 수

있는 천금같은 시간임엔 틀림없었다.

"하아......."

킬츠는 눈을 감으며 차가운 밤 공기를 가슴 깊이 들어 마셨다. 그러자

곧 자연스럽게 그의 소울아이가 넓게 사방으로 퍼져나가 그를 제외하고

텅 비어있는 이곳 성벽 위를 광활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다크 핵사곤의

결계를 빠져 나온 뒤로 그의 소울아이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자신 혼자 뿐이라는 공허한 느낌, 자신이 무엇을 위

해 지금 이 자리에 서있으며 왜 세상을  향해 걸어가려고 하는지, 질문

할 수도,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때 성벽위로 누군가가 올라오는 것이  킬츠의 소울아이에 느껴졌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공허함과 아픈 슬픔들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분

노와 원한의 강한 감정들로 그것들을  덮어씌워 견뎌내고 있는 사실은

무척 약하고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 그의  마음으로 연주하는 슬픈 음

색의 소리가 가슴아프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런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어둠에 단련된 킬츠의 눈이 천천히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 누군가를

포착해 내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고  마치 인형처럼 굳어버

린 아름다운 얼굴, 무척 큰 키에 매끈하게 발달된 몸매, 어두운  성격의

검사나 입을법한 검은 색의 연습 복을 입고 검고 고운 결이 길게 빛나

는 머리카락을 흩날리고있는, 바로 뉴린젤이었다.

"그냥.... 성밖을 바라보고 있어."

어떤 분야이건 간에 강하다고 인정될 만한 사람에게는 존대 말을 쓰는

킬츠였으나 본이 아니게 방금  전, 뉴린젤의 마음을 읽고  나서는 말을

놓게된 킬츠였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를 무시해서  나오는 말투가 아니

라, 루디나 크라다겜에게 대하는 것과 같은, 그런 친근함에서 나오는 말

투였다.

"그런가....."

뉴린젤은 킬츠의 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다가와 그곳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녀도 역시 오직 어둠만이 남아있는 성밖의 모습을 바라

보기 시작했다.

"뉴린젤은....... 아버지에게 복수하려고 이 전쟁에 참가한 거야?"

뉴린젤은 킬츠의 바뀐 말투에 전혀 개의치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날보고 말하지, 이상한 여자라고.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내

모습을 좋아해 줄 사람은 없어. 하지만, 난 표정을 안 드러내는 것이 아

니다. 못 드러내는 거지. 내 얼굴은 이렇게 20여 년간 길들여져 버렸어.

그렇기 때문에 날 이렇게 만든 아버님을 용서할 수 없다. 반드시, 이 원

한을 갚아드려야겠어............."

순간 '그리고 원한을 다 갚고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킬츠

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갔다. 복수의 끝은 허무한 법이다. 킬츠는 카름

을 살해한 데스워리어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지만 그렇게 하고 나서도

허무함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행동을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뉴린젤은,

지금 오직 그 복수의 일념  하나로 약한 마음을 버텨내고 있는  것이었

다.

"그런데, 너는 왜 이 전쟁을 하고있지?"

이윽고 뉴린젤이 킬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차갑

고 냉정해 보였으나 오직 그녀의 푸른 보석같이 티 한 점 없이 맑고 깨

끗한 눈동자 안의 깊은 곳에 살며시 부드러움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뉴린젤의 질문에 킬츠는 자신의 기분이 묘하게 바뀌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자신은 왜 이 전쟁에 참가하는지, 왜 사람을  죽여야

하는지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돈을 벌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일까, 크라다겜이 자리를 잡은 곳이

라서 그를 위해 같이일해주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예전에 그의 어머니

가 드라킬스의 군대에 살해당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대체, 대체

무엇을 위해서 자신은 이 전쟁에 들어온 것일까.

킬츠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그믐이라 달이

뜨지 않아 어둡기만 한 밤하늘이었다. 그러나, 군데군데 반짝이는  별들

이 옹기종기 모여서 저마다 작은 빛을 세상을 향해 뿌리고 있었다.

"난....... 아마도 이 전쟁에서 나를 필요로  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

에 이 자리에 서있는 걸 꺼야.  그리고.....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넓은 세상으로 걸어가

기 위해서.........  정확한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래서 그런  게 아닐

까?"

킬츠의 애매한 대답에 뉴린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어둠으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킬츠는 가만히 생각했다. 자신이  과연

어두운 하늘에 떠있는 저 하나의 별처럼, 미약하게나마 빛을 발해 자신

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비춰줄 수  있는지, 아니면 그의 어

머니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카름처럼 또 다시  먼 곳으로 보내는 것은

아닌지, 그런 아련한 공포의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인간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해야 강해지는 존재지.'

갑자기 떠오른 누군가의 말에  킬츠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바로 예전에 몬스터 나비에게 심하게 당해서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었

던 킬츠가 당시 언제나 산으로 검을 수련하러 가던 세렌에게 왜 그러냐

고 말했을 때 했던 세렌의 대답이었다.

과거에 언제나 자신의 곁에서 함께 생활했던  뛰어나고 배려 심 깊은,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있던 세렌이, 왠지 오늘따라 더욱 그리

워지는 킬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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