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39화 (39/166)

제 3장. -전란의 길- (7)

꿈조차 꾸지 않는 똑같은 밤.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에 깨어나게 되는

아침. 그것은 바로 뉴린젤의 20년간의 모습이었다.

깨어나서 바로 세면도 하기 전에 착용하는 무거운 가슴갑옷과  어깨갑

옷 그리고 검. 세면을  마친 뒤에 어김없이 먹어야하는  언제나 동일한

아침식사. 그리고 점심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는 뼈를 깎는 수련. 그리

고 역시 동일한 점심을 먹고 나면 다시 밤이 될 때까지의 수련. 그리고

저녁식사 후 단편적으로 배우는 드라킬스의 역사와 전쟁의 전략.

아직 사람들이 깨어나기엔 이른 아침. 뉴린젤은  눈을 번쩍 뜨며 침대

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 옆에 놓아둔 갑옷을 챙겨 입으며 등

에 검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등에  매려던 검을 꽉 잡

으며 행동이 정지해 버렸다.

'이제 이럴 필요 없다.......'

지난 20여 년간 반복해왔던 일이라, 그녀는  무의식 적으로 몸을 움직

인 것이었다. 왠지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게 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슬픈 감정을 느끼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안는 자신의 얼

굴에 그녀는 더욱 큰 우울함에 빠져들었다.

그녀보다도 더욱 일찍 일어난 여관주인이 문 앞에 떠다놓은 물로 간단

한 세면을 마치고 그녀는 미련 없이 여관을  빠져 나왔다. 대부분의 22

살 처녀의 아침은 깨끗한 세면과 머리정돈, 취향에 맞는 화장으로 시작

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그녀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화장을 하거나  머

리를 정돈하는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드라킬스의 귀족가문 특

유의 희고 매끄러운 피부와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 않았

더라면 아마도 그런 생활은 그녀의 피부와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파울드의 여관은 침대가 푹신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사용했던 침대와

비교하면 거의 침대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가 사용하던 침대

는 매트가 대부분 나무로 되어있는 딱딱함의 극치를 달리던 것이었는데

지금 이 여관의 침대는 너무나 푹신하여 허리가  다 아플 정도였다. 물

론 이 여관에 묶었던 손님들 중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느끼는  감각이

었겠지만

'이런 침대가 정상인 것인가..... 난 이미 나무침대에서 자는 것이  익숙

해져 버렸다.'

그녀는 파울드의 용병 모집소로 향했다.  용병이 되어야만 드라킬스와

싸울 수 있고 그래야 언젠가 전장에서 그의 아버지와 만날 날이 올 것

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그녀의 마음은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오히려 더욱 더 증폭될 뿐이었다. 바로 세상에 대해 더 알

면 알수록 아버지에 대한 증오도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었다.

용병 모집 소 안은 이른 아침부터 몇몇의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중얼거

리고 있었다. 그들은 청색의 갑옷으로 완전  무장하고 있었는데 가슴에

새겨진 나는 매의 문양이 그들이  자치도시 연합의 자유기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용병이 되러오는 사람들의  실력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그곳에 와있던 것이었다.

"용병이 되고싶다."

모집 소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뉴린젤을 바라보았다. 모두

들 첫눈에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알아보았지만 워낙 큰 키와 살벌한 얼

굴로 인해 결코 무시하거나 비웃는 표정이 아니었다. 실제로 용병들 중

에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여성용병들도 여럿 있었다.

".....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되려는데 용감하군. 이름과 출생 경력을 말해

봐요."

반쯤졸고있던 용병 모집 소의  담당관은 뉴린젤의 차가운 무  감정한

목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뉴린젤 파우카. 드라킬스의 도시 네브란 출생. 경력은  이번이 처음이

다."

순간 묘한 분위기가 모집 소  안을 퍼져갔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두

명의 자유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뉴린젤에게로 다가왔다.

"성이 파우카라고 했나?"

"그렇다."

"드라킬스의 도시 네브란 출생이라고?"

"그렇다."

"혹시 파리퀸 파우카라는 사람을 아는가?"

"내 아버님이다."

순간 긴장하며 질문을 하고있던 두 명의 자유기사들은 재빨리 검을 뽑

아들었고, 덩달아 그곳에 있던 용병 몇 명도  동시에 무기를 꺼내 들어

뉴린젤에게 겨누었다.

"번번하게 잘도 왔군! 드래곤 나이트 파리퀸의 딸이라고!"

나이트 파리퀸은 드라킬스와 자치도시연합과의 전쟁 초반에 철벽의 기

갑단이라 불리는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전선을 초토화 시켰던 드라킬스

공국의 3대 지휘관중 한사람이었다. 당연히  자치도시 연합의 군사들에

겐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죽엇! 철벽의 기갑단 때문에  2만을 넘던 용병 단들이  지금 2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중 흥분한 용병 하나가 순간 끌어 오른 분노를 참지 못하고  두꺼운

검을 휘두르며 뉴린젤에게로 달려들었다. 뉴린젤은 그것을 가볍게 피해

냈고 검 집채로 빼어들어 허점 투성인 그 용병의 등을 무자비하게 가격

했다.

"역시 적이다! 공격하자!"

분명 자신들 쪽에서 먼저 공격했으면서 단지 그것에 반격만 했던 뉴린

젤을 보고 역시 흥분해버린 자유기사 중 한 명이 또다시  뉴린젤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동시에 나머지 사람들도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나라는 아버지의 죄를 자식이 짊어져야 하는 법이 있다는 건가!"

갑작스런 그들의 태도에 뉴린젤은 사늘한 얼굴로 소리쳤지만 이미  자

유기사들과 용병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있지 않았다.

'죽음을..... 재촉하는가? 하지만 이들을 죽이면 난 아버님과 대결할  기

회를 잃게 된다.....'

죽이지 않고 실력 있는 다수의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 그녀의 마음속

에 일말의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물론 그 긴장감이 결코 표정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마음을 얼굴로 나타내는  방법을 거의 상실

하고 있었다.

"방어 사령관 님! 적이 성 내부로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엥? 뭐라구!"

이미 준비를 마친 8천의 자유기사들은 적의 오른쪽 에 떨어진  군대를

공격하러 어제 급하게 성에서 출격했다. 그리고  킬츠는 성벽의 방어사

령관을 맡아 2천의 용병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느라 고심하고  있었는

데, 킬츠는 그런 쪽에 관련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부관으로 임

명된 활기찬 성격의 신참 자유기사 라르스가 대신 맡아주었다.

아무리 신참이라곤 해도 라르스가 킬츠보다는  세 살 정도 더  나이가

많았지만 그는 상관의 예의를 갖추어 깍듯이 킬츠를 대했다.

킬츠는 도시 안의 용병 소에 적이 침입했다는 말을 듣고는 혼자서  재

빨리 그곳으로 달려갔다. 사실은 몇몇의 용병들보고 따라오라고 했지만

그들은 킬츠의 달리는 속도를 다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라르스의 말로는 침입한 적은 단 한 명인데 그 실력이 정말  대단해서

벌써 두 명의 자유기사와  네 명의 용병들을 제압했다고  했다. 그리고

킬츠는 그 말을 듣자 호기심이 먼저 발동하여 전력으로 용병 소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용병 소의 정문 근처에는 몇몇의 용병들이 감히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며 버티고 있었다.  킬츠는 한심하다는 눈빛

으로 그들을 처다 본 후 주저 없이 용병 소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엔 여러 명의 남자들이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져 뒹굴고 있었고 그

들의 가운데엔 장신의 마른 몸매를  가진 한 사람이 무척 길다란  검을

검 집채 들고는 우두커니 서있었다. 아름다운 결의  긴 흑발과 흰 피부

의 아름다운 얼굴로 봐서는 여자인 것 같았는데 킬츠는 그 싸늘하고 무

표정한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본듯하다고 느꼈다.

"당신은 그때나와 겨루었던......"

그날 밤의 결투가 생각이 난 킬츠는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생각해  내

느라 잠시 진담을 빼어야만 했다.

"뉴린, 맞아, 뉴린젤."

"킬츠 마켄시타. 나와 겨루었던 남자군."

"어억....... 당신은 방어사령관....... 어서 빨리 이  자를 해치워.... 이자는

적군 사령관의 자식...."

쓰러져있던 한 자유기사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킬츠에게  말

했으나 킬츠는 그 말을 무시하며 카름을 바라보았다.

"어찌된 것인지 이야기를 해봐요 뉴린젤."

그러자 뉴린젤의 싸늘한 목소리로 그 동안의 대략적인 상황설명을  간

단하고 명료하게 설명했고 킬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날카로운  눈초리로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째려보았다.

"미안해요 뉴린젤. 하지만 당신 같은 사람을 그냥 용병으로 하기엔 아

까운데.... 일단 나랑 갈 데가 좀 있어요."

어느 샌가, 강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예의를 갖추어

말하게 된 킬츠였다. 그러자 뉴린젤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다시 등에

다 메었고 킬츠를 따라 용병 소를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킬츠가 향 한곳은 바로 파울드  최고의 여관이자 나이트 길드의  숨은

본진 이기도 한 고급여관 세피로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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