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38화 (38/166)

제 3장. -전란의 길- (6)

갑작스런 손님들의 난입으로  본래의 취지에서  약간은 어긋나  버린

나이트길드의 간부 회의가 끝나고, 피리우크는  고급여관 세피로이스에

5층에 마련돼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미 밤이  깊은 시각이라

잠들어 있을 이네린이 잠에서 깰까봐 그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피리우크의 부인인 이네린은 5년 전 페이오드 왕국에서 죽음의 위기에

놓여있다 탈출해온 마후린 공작 일가의 장녀였다. 마후린 공작의 두 아

들은 리플레이크 기사단이었기 때문에 그들 일가를 나이트 길드로 받아

들이기로 약속이 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피리우크는 마후린 일가의 사이에서 이네린을 만나

게 되었고 그들은 첫눈에 서로의 눈빛을 확인하게 되었다. 현재 피리우

크는 39세, 이네린은 27세였다.

"어서 오세요, 여보. 오늘은 많이 늦으셨네 요."

그러나 피리우크의 세심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잠을 자지 않

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태어난 지  2년째를 맞이하는  귀여운

그들의 아들을 요람에 재워두고, 그녀는 늦은  시간까지 남편을 기다리

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아직 자지 않고 있었어?"

"아.. 네."

피리우크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겉옷을 벗어  옷장에 집어넣었다.

사랑스런 아내의 따뜻한 마음에 무언가 고마움의  말을  하고싶었지만,

그는 그런 표현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방금 전에, 정말 대단한 사람들을 만났어."

밝은 등잔불을 끄고 아내와 함께 침대에 누운 피리우크는 눈을  감으

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단한 사람들이요?"

"그래.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지.... 나도   5년간의 패러딘나이트의 수

련을 견디어 내긴 했지만, 그들은 3년 동안 그야말로 지옥 같은 마계에

서 생존하여 끝내 세상으로 돌아온 거야. 하긴, 그 정도의 남자들이니까

나이트길드의 간부 네 명을 앞에 두고도 그렇게 당당했었던 거겠지."

피리우크는 아무런 흔들림이나 거리낌없이 정면으로 모두의 눈을  바

라보았던 킬츠라는 청년을 생각했다. 조금, 아니 많이 건방진  청년이었

지만 거리낌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모두 밝혀버리는 그 모습에서 피리우

크는 진정한 진실 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크라다겜은 저희 동료입니다. 그리고 지금 막 생각한 것인

데, 나이트 길드는 추방된 기사들의 집단이라고  하니까 크라다겜도 나

이트길드에 받아 들여주었으면 합니다.  설마 마족이라고 차별대우하지

는 않겠지요.'

지금 생각해봐도 의표를 찌르면서도 당당한 말이었다. 분명히 마족도

기사는 기사인 것. 추방당했거나 자신이 조국을 떠났다면 나이트 길드

에서 못 받아들여 줄 것도 없었다. 게다가  혹시 모를 적대국의 스파이

일 염려도 없었다. 그 악명 높기로 유명한   데스나이트의 마스터를 게

다가 마계에서 뭔 바람이 불어서 나이트길드에 스파이로 침입시킬  리

가 없기 때문이었다.

'음........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군요. 하지만 제게 자치도시 연합

의 참모자리를 내어 준다니. 기꺼이 받겠습니다. 지금은 실업자지만  그

래도 미숙한 대로 조금은 아는 것이 있으니까요.'

양 국가의 병력 상황을 전부  듣고 나서도 자신 있게 자치도시의  총

참모장을 승낙해버린 마인슈의  여유 있는 모습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젊은 나이로 페이오드의 총 참모장 자리를 맡아 드라킬스와의 크고 작

은 전란을 완벽히 막아낸 과거도 있는 만큼. 피리우크는 그런 그의 태

도가 허풍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단한 사람들도, 나이트길드에 들어왔겠지요? 원래 나라들이란

유능하고 대단한 자국의 인재들을 시기하는 못된 성격이 있으니까요."

졸린 목소리였지만, 무척  예리한 이네린의 목소리에 피리우크는 '응'

이라고 짧게 대답하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맞아. 왜 권력자들은 좀더 넓은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일

까.'

피리우크 자신도 처음 패러딘 나이트의 수행에 참가했을 땐  클라스

라인이라는 유서 깊은 대국의 명예로운 기사가 된다는 자부심과 긍지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패러딘나이트가 되고 보니, 그  사랑하

는 조국 클라스라인은 사실상 수많은 귀족들의 권력과 재물을 채워주는

썩은 보물상자에 불과했다.

그때는 세상이란 이런 것이었나, 많은 생각과 상념에 빠져들던 시간이

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진정한 인간이 순수한 신념과  목적에 따라

행동하는 그런 곳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배신자다, 변질 자다 하고 그들

을 매도했지만, 이미  그들에게 나이트길드라는 조직은  그들의 진정한

꿈과,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장소였다.

귀부인을 모시는 것이, 아니면 국왕께 충성하는 것이, 아니면  전쟁터

에서 장렬하게 전투를 벌이는 것만이 기사의 소망은 아니었다. 지금 그

들이 정말로 바라는 것, 그것은 바로 진정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리

고 모든 인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

다.

"그래..... 카름은 죽은 것이었구나...."

자신의 단 하나뿐인 소중한 딸의 머리카락을 앞에 두고, 쿠슬리는 침

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킬츠도, 세렌도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쿠슬리는 언덕마을 일대가  다크핵사곤의 결계로 휩싸여  버리자, 다시

나이트 길드로 복귀하여 나이트길드에서 보낸 다크핵사곤 조사단의  지

휘를 맡았다. 처음엔 무턱대고 결계 안으로 침입했다가, 마수들에게  떼

거지로 기습을 당해 큰 피해를 입었었다. 그리고 많은 나이트길드의 인

원들이 마수들에게 희생당하는 모습을 보며, 쿠슬리는  딸의 위험에 흥

분하여 앞뒤를 안 가리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겨우 추스를 수 있게 되

었다.

그리고 3년만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딸과 재회를 하게 되었다. 끝없

이 밀려오는 복잡하게 뒤엉킨 슬픔의 감정들이 쿠슬리의 마음속을 헤집

어 놓고 있었다.

"너희들이라도.... 살아 돌아와 주어서... 다행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

일 듣도록 하자. 그 로니온의 반지도 일단은 가지고있고...."

쿠슬리가 잠시의 침묵을 깨고 침울한 목소리로 킬츠와 루디에게  말했

다. 그러자 그들도 쿠슬리의 그런 모습을 가슴이 아릿하게 공감하며, 조

용히 그의 방에서 나갔다.

"휴..... 쿠슬리 씨...... 많이 상심하신 것 같아..."

어두운 등잔불이 한없이 늘어져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의

긴 고급여관 세피로이스의 6층  복도를 지나면서. 루디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킬츠도 무척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카름의 머리카락, 묻지 않고 가져오길 잘했어."

"맞아....."

누가 먼저 말하고, 누가 나중에 말해도 별로 다를  것 없는 어두운 대

화였다. 카름이 죽음을 맞이할 그 때의 기억이 가슴아프게 그들의 머리

속을 지나갔고, 또 누군가의 잔인한 술수로 직접 그녀의 몸을 공격

해야했던 얼마전의 더욱 고통스러웠던 기억 역시 그들의 마음을  괴롭

히고 있었다.

나이트길드의 사람들은  크라다겜을 길드의  일원으로  맞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킬츠와 루디도 비 길드  회원 형식으로 대우해주겠다

고 했다. 일단 오늘은  비어있는 객실에서 잠을  자고, 내일 다시  짐을

가져와 개인 방까지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압박 받으며 살아왔던  지난 3년간의 생활 때문에

내색하진 않았지만 무척 피로하고 지쳐있던 정신이,  어딘가 소속 되어

있다는 현실로 인해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슬픈 만남이었지만

세상에서 그들을 알고있는 몇 안 되는 사람중의  한 명도 만나게 되었

다. 확실히 전체적으론 점점 좋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단지, 지금은 다시 한번, 진심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를 슬퍼하고, 안타

까워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쿠슬리를 포함한 나이트 길드의 간부들과 마인슈, 그리고

킬츠일행은 다시 회의실에 모여서 중요한 사항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초반엔 킬츠일행의 직책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나이트길드 측은 우선

크라다겜을 정식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종족의 특성을 고려하여

우선은 연합의 내부에서 하는 일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파울드 내

에서의 특수치안 유지였다. 요즘은 특히 전시라서 기사들이나 병사들이

치안활동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덕분에 몇몇의  용병들과 불한당들이

도시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이 빈번했는데, 우선은 '은밀히' 그것을 처리

하는 직책을 맞게 된 것이었다.

루디는 전권을 위임받은 자치도시연합 군대의 참모를 맡게 되었다. 총

참모장으로 위임된 마인슈의  부관역할이었는데 그것은 일단  정신적인

분야에 뛰어나다는 마법사의 특징을 배려하여 내린 보직이었다.

"전략 같은 것은 전혀 아는 게 없지만, 일단 맡은 직책이니 마인슈님

을 잘 보좌해 드리겠습니다."

루디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거부감 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어

차피 길드의 사람들도 루디의 전술이나  전략적인 재능을 필요로 해서

참모를 맏긴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법사의 폭넓은 지

식을 활용하기 위한 보직이었다.

킬츠에겐 파울드의 외벽 방어사령관이라는 대단히 파격적인 직책이 맡

겨졌다. 마인슈가 구상한  전략에 따르면 전쟁의  후반부에는 어떻게든

도시의 외벽을 철벽처럼 수비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그 동안

그 공포의 아수라장을 끈질기게 견뎌온  킬츠의 물러서지 않는 끈기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생각보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일단 사령관이라는 지휘

는 천 명 이상의 병사를 지휘할 때 비로소 붙일 수 있는 명칭이었다.

기본적으로 경력 있는 기사 급  이상이 되어야만 맡을 수 있는  것이었

다. 그러나 나이트길드에겐 그런 명분을 따질 시간적인,  그리고 물질적

인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외벽을 수비하는 병사들은 대부분 어떻게 튈지 모르는 기름 위

의 콩과 같은 잡다한 용병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지휘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었다. 그러므로 명령에  불복하는 용병 몇몇쯤

은 사령관이 직접 제압해야 하는  골치 아픈 일이 바로 이번  작전에서

방어사령관에게 주어진 또 다른 임무였다. 그러므로 역시 전투 시, 두려

울 정도로 살기 등등해 지는 킬츠가 적격인 직책이었다.

직책이 전부 주어지고 나자, 마인슈는 밤새 체계적으로 구상한 작전의

본격적인 설명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무척 심리적인  요소

가 다분히 들어간 도박과도 흡사했다.

일단 설명하자면 적은 아군의 두  배의 병력으로 전방의 네 방향에서

진격해 오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무척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적도 몇 가지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첫 번째로 드라킬스의 병사들은 네 개로 분산되어 있다는  점이었

다. 마치 포위해 진격해 들어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적의  본

대 인 지원군 2만을 제외하고 양옆의 1만 2천의 기존 군사들은  상당히

본대와 떨어져서 오고 있었다. 그것은 자치도시  연합군이 압도적인 자

신들의 병력에 놀라 필시 공성 전으로 나올 것이라는 굳은 생각 때문에

병력을 집중시키지 않은 것이었다.

설마 군대를 성밖으로 출격시켜 두 배의 아군에게 야전을 단행할  것

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노려, 자치도시  연합군

은 일단 숫자가 적은 양옆의 군세를 각개 격파하여 허를 찌르는 피해를

입힐 생각이었다.

우물쭈물 하다가 적군 본 대의 지원이 온다면 큰 피해를 입겠지만  드

라킬스 군은 전원 보병으로 되어있고 연합군은 기사단을 운용할 수  있

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차를 둘 수 있다는 마인슈의 계산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약점은 바로 보급이었다.  현재 드라킬스 군의 식량

은 대부분 빼앗긴 자치도시 연합의  도시나 성에서 조달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점을 노려 적의 양 날개를 격멸 시킨 후 성으로 퇴각하는 것처

럼 위장을 하고 나서 곧바로 점령당한 가까운 도시들을 공격해  들어가

는 것이었다.

그 대상이 바로 몇 달전 점령당한 마켄 성과 토우르 성이었는데  이곳

을 재탈환한다면 드라킬스의 본대는 얼마 되지 않는 자체내의 식량으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드라킬스 군은

더욱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마켄 성이나 토우르성의 재 함락보다는  예정

대로 파울드의 점령을 서두를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때는 기사단도 없

어 빈 성이나 마찬가지인 파울드이기 때문에 더욱 공격의 박차를  가하

겠지만 이미 마켄성과 토우르 성을  점령한 아군의 기사단들은 그것을

노리고 바로 적의 후방을 공격해 간다.

그러면 드라킬스 군은 3면에서의 협공을  받게되고 그렇다면 곧 적의

괴멸은 맡아 논 것이었다.

"무척 심리적인 작전이군요. 마인슈 총 참모장님. 하지만  적이  그렇

게 생각하는 데로 놀아줄까요?"

설명을 다 듣고 나자 정보처리 담당관 제란스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

이면서도 일단 의문점을 내어놓았다.

"일단 처음의 자유기사단과 혼의 용병 단을 이용한 적의  좌우의 군대

를 공격하는 작전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드라킬스 군들도 우리가

성에서 나오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에 오직 보병으로만  군대를 편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다시 본 진으로  귀환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아군의 움직임입니다. 그것에  적들이 속아줘야만

우리는 다시 멀리 돌아 점령당한 가까운 두 곳의 성을 되찾을 수 있습

니다. 또 그래야만 적들의 보급선을 끊을 수 있구요."

마인슈는 침착하게 말하며 모두에게 중요한 점을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아군이 기마병이

라는 것을 최대한 이용하여 빠른 속도로 성을 점령하여 적들의  보급을

차단하고 나서는 다시 적당한 시간에 맞춰 적군의 배후를 공격해  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파울드의 방어 군은 어떻게든 적의

공세를 막아내어 시간을 벌어야만 합니다."

조금이라도 적의 배후를 공격하는시간이 늦어진다면 파울드가 드라킬

스의 손에 넘어가 버릴 테고 또 너무 빠르게 돌아와 공격한다면 그때는

연합군이 드라킬스군의 각개격파의 먹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

만큼 타이밍이 중요한 전략이었다.

"일단 한시라도 빨리 자유기사단을 준비해서 적군을 공격할 준비를 해

주세요. 그리고 제인트 성채로도  어서 사람을 보내 혼의  용병 단에게

작전을 지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의 상세한 설명이나 질문  없이 일단 해산하여 작전을  시작할

준비를 갖추기로 모두가 동의했다. 그만큼, 지금의 전략을 실행하기  위

해선 시간이 촉박하게 남아있었다. 어서 빨리 전 군에게 작전을 명령하

고, 준비시켜야만 했다.

바로 이 놀라운 전략의 승산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한 후방의  필

사적인 노력이 지금 시작된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