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32화 (32/166)

제 2장. -가시의 길- (28)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엔 7일 동안 쉬지 않고 전

투를 계속해도 몸에 힘이 빠지는 일 따윈 없었다. 그저 베고, 베이고, 죽

이고, 하며 상대를 가를 때 그 상처에서 나오는  비릿한 피의 내음을 즐

겼고 숨을 거두는 그 마지막 비명소리에 환희를  느꼈다. 전투, 싸움, 그

것은 유일한 내 삶의 전부이자 강렬한 쾌락의 유희였다.

크라다겜은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지금 크라다렛과의 대결에서 비

참하게 밀리는 자신의 모습과 예전에 마계제일의 살육자로 불렸던  데스

나이트 마스터 크라다겜의 모습을 비교해 보았다.

혹시 인간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인간, 인간. 킬츠와 루디. 세

상을 다양하게 볼 줄 아는 종족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투란 삶의 일

부이지, 전부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진정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악으

로 해야하는 힘든 일일뿐. 물론 킬츠의 말로는 세상엔 정말 전투가 즐거

워서. 살인이 즐거워서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그런 인간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이 아주 소수일 것이라는 것도 크라다겜은 알고  있

었다.

"크크크..... 힘이 빠지셨나...... 그래도 끈질기게 버티기는 하는군."

크라다렛이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크라다겜에게

마치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두렵다, 강한 적이 두렵다. 내가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두렵게

한다. 죽음. 그리고 이어서 찾아올 죽음. 그것도 두렵다, 아니 사실  그것

이 패배한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 왜 두려운 것인가....'

갑자기 3년 전 카름이라는 여자아이의 목을 루디가 땅에 묻었을 때, 크

라다겜은 루디의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었다.  갑자기 그때의 루디의 말

이 크라다겜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너의 감정은 두려움..... 인간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자주 느끼는군.-

-카름이 죽었으니까요. 나도 언제 죽을지 몰라서, 그게 두려운 겁니다.-

-두려워해도 상황이 바뀌지는 않지 않은가?-

-물론..... 두려워한다고 상황이 낳아지지는 않지요. 하지만,-

-하지만?-

-인간은 원래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

다.-

'내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 그것은 내가 인간의 감정을 얻었다는 증거이

다!'

크라다겜은 순간 정신이 번쩍 뜨이는 것을  느꼈다. 막강한 크라다렛의

연속공격, 무섭도록 강력한 기세. 분명히 두려웠다.  죽을지 모른다는 생

각에 정말 두려웠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가 동경하는 어떤 생명들이

느끼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루디의 마지막 말을 기억해낸 크라다

겜은 전신에 모든 힘과 모든 정신을 동원해 그 두려움과 정면으로  맞서

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두려움을 극복해 가며 성장해 가지요.-

"크아압!"

갑자기 강력한 기세로 크라다겜은 적의 검을  맞받아 쳤다. 크라다렛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크라다겜이 공세로 나오며 적극적으로 파일팽을 휘

둘러 왔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세와 힘이, 그 파일팽에 담겨 있었

다.

"오오? 크크크...... 갑자기 이게 웬 행운? 이젠, 즐거운 전투를 할 수 있

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위축될 크라다렛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도 더

욱 강한 힘으로 크라다렛의  거대한 파일팽에 맞서기  시작했다. 엄청난

파열음들이 그들의 충돌하는 검 사이에서 시끄럽게 울려왔으며 그곳에서

튀어 오르는 반짝이는 불꽃들이, 어두운 결계 안의 공간을  순간순간 밝

게 비춰주었다.

'이 두려움을 이겨낸다면, 난 진정한 강함을 얻게 된다!'

"죽어다, 크라다겜! 너의 마지막 분투는 내가 소멸할 때까지 반드시  기

억하겠다!"

크라다렛은 위에서 내리치는 크라다겜의 공격을 전력을 다해 위로 튕겨

내고는 비어있는 크라다겜의 몸통을 공격했다. 피한다면 아슬아슬하게나

마 피할 수 있을 공격이었다. 피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당할 것이 분명했

다. 하지만 크라다겜의 파일팽은 아직 완전히 튕겨 나가지 않았다.  죽음

을 감지한 두려움, 그러나 크라다겜은 순간 그것을 넘어서 있었다.

"크압!"

크라다겜은 날카로운 기합소리와 함께 튕겨 나가고 있는 자신의 파일팽

을 힘으로 멈추었다. 그리고 멈추는데서 끝내지  않고 그대로 역시 무방

비인 크라다렛의 오른쪽 어깨부근으로 파일팽을 내리 그었다.

"파앙!"

크라다렛의 검은 상대의 견고한 갑옷을  파괴하며 살 속으로 파고들었

다. 그러나 그 검이 갑옷을 파괴하려는  순간적인 찰나에 크라다겜의 파

일팽은 이미 적의 어깨에서부터 가슴까지 베어 들어가 있었다.

"크아악!"

크라다렛은 자신의 검을 놓치면서 검고 푸른 피가 뿜어져 나오는  어깨

를 감싸쥐었다. 그리고 비명과 함께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크라다겜

의 왼쪽 가슴부위에서도 대량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크라다

겜은 미동도 하지 않고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굳건히 자신의 자리에  서

있었다.

"거기에서 다시 공격을 하다니.....  역시 데스나이트 마스터.  크크크......

나중에, 또 보자. 너만큼 강한 녀석이 적이라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

크라다렛은 희미한 웃음소리를 남기며 서서히 그곳에서 사라져 벼렸다.

그리고 그곳엔 그가 놓인 거대한 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스베리타 전송마법..... 끝났군."

크라다겜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크라다렛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육중한 갑옷이 지면과  부딪치면서 무거운

쇳소리를 냈다.

자꾸만 피가 빠져나가, 크라다겜은 점점 눈앞이 흐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육체적으로도 힘들었고, 정신적으로도

심하게 지쳐 있어서 쉽게 일으켜지지는 않았다.

"난.... 이겨냈다..... 나를..."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끼며 크라다겜은 서서히 몸에서 힘을  빼

고 있었다. 짙은 만족감이 그의 마음속에 은은하게 퍼져오고 있었다.  그

리고 그런 부드러움 속에 그의 의식은  차츰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그런

데,

"크악! 크라다겜도 쓰러져 있으면 어떡해!"

라고 시끄럽게 소리치며 누군가가 달려왔다. 바로  한쪽 어깨에 루디를

부축하고 있는 킬츠였다. 이를 악물고 마구 소리치며 무엇인가를 참아내

고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이봐! 크라다겜! 일어나!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어서  이 결계 안에서

나가야돼!"

킬츠는 루디를 옆에다내려놓고는 크라다겜의 얼굴을 흔들며 그의 사라

져 가는 의식을 깨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크라다겜은 약간의 신음소리만

낼뿐.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제길! 그래, 막 가는 거야!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보자! 이 지긋지긋한

곳아! 내가 널 두려워하는지 알아! 천만에! 내가 지쳤다고 얏 보는가  본

데! 어림없어!"

킬츠는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한쪽 어깨에는 루디를 그리고 나머지 어

깨에는 크라다겜을 부축하고 일어섰다. 루디는 별로 무겁지 않았지만, 크

라다겜은 거이 루디의 세배가 넘는 무거움이 느껴졌다. 다리가 휘청거리

고 엄청나게 힘이 들었다. 게다가 전신의  상처들은 더욱 고통스럽게 욱

신거리며 킬츠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킬츠는 크악  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크악! 내가 3일 더 못 걸을 것 같아! 웃기지마! 크악! 내가 무겁다고 이

녀석들을 포기할 줄 알아! 크악!  이제 단 세 명 남은  나의 소중한 사람

중 두 명이라구! 크악! ......... 으으으........ 힘들어 죽겠다........."

더 이상의 추격은 없었고 이동하는 속도는 느리지만 이제 3일이면 결계

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점까지 와있는  킬츠 일행이었다. 그리고 그들

은 오직 킬츠의 몸에 매달려, 마지막 3일의 이동을 계속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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