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31화 (31/166)

제 2장. -가시의 길- (27)

갑자기 주위에 모든 적의 기운이 사라져 버렸다. 이상할 정도의 침묵과

고요함에 크라다겜은 달리던 것을 멈추고  주위를 바라보았다. 데스워리

어도, 그 어떤 마수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적들이  추격을

포기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데스워리어가 목표를 이렇게 쉽게

포기해 버릴 족속들이 아니라는 것을 크라다겜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

다.

저벅... 저벅.....

그리고 크라다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향해 정면에서 다가오는 어

두운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거대한  근육질의 몸집과 자신의 파일

팽과 맞먹을 크기의 검은 광택의  칼을 들고있는 너무나도 강해  보이는

회색 피부의 전사. 그것은 분명 크라다겜의 기억 속에 있는 모습이었다.

"크라다렛........"

"아니,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나? 영광이군."

그다지 외우기 힘들 것 같지 않은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크

라다렛은 음산하고 낮은,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와 함께 비꼬듯이 크라다

겜을 바라보았다.

"주위에 데스워리어가 사라진 이유를 알겠군. 나와의 전투를 위해........."

"맞아, 무척 눈치도 빠르셔."

".................."

크라다겜은 더 이상 말없이 자신의 파일팽을 어깨높이까지 치켜들어 크

라다렛을 향해 겨누었다. 전투를 시작하자는 무언의 표시였다.

"좋아, 좋아... 하하하... 이렇게 당신과 겨룰 수 있다니. 난  당신의 배신

에 정말로 찬사를 보내고 싶어. 어떤 바람이 불어서 마계를 배신하고 인

간의 편에 섰는지 알 수 는 없지만.. 그것 또한 자네의 운명이  아니겠는

가? 보아하니 말도 하고..... 파리카알 님께서 내려주신 어둠의 축복을 상

실한것 같은데."

크라다렛은 자신의 앞에서 완벽한 전투의 자세를 잡고있는  데스나이트

의 전 마스터를 바라보며 흘기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그러다가,  갑

자기 어느 순간 놀라운 속도로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상관없어! 넌 강하니까!"

"파앙!"

단 한번 검의 부딪침으로  숲의 나무들 전체가 강한  공명을 일으켰다.

너무나도 강력한 두 힘의 충돌. 그 검의 울림과  주위에 퍼져 나오는 날

카로운 파찰음이 곧 빠른 속도로  연이어 터져 나왔다.

"크크크....... 왜 그러지? 천하의 데스나이트  마스터인 크라다겜이 이런

수세만 취하고 있다니."

크라다렛은 상대를 철저히 몰아 뭍이며 비웃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끝

없이 몰아치는 파도와 같은 공격. 크라다겜은 말없이 그것을 막아내고만

있었다.

'강하다..... 크라다렛이 이렇게 강했나....'

크라다겜은 서서히 위축되고있는 자신을 느꼈다. 예전에 살의와 파괴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을 때, 그때는  크라다렛의 힘을 한번도 강하다거

나, 무섭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저 강한 전사일 뿐이라는 라는 생각

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의 생각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평범한 데스워리어들은 그의 마음에 그다지 큰  위압감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크라다렛은 확실히 격이 달랐다. 놀라운 속도와 막강한 힘.  하지

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실은 예전과  거의 변화 없는 능력임엔  틀림없었

다. 무엇보다 갑자기 강해 질리는 없었다. 마족의 힘의 성장은 기복이 심

하지 않은 편이었다. 문제는  바로 상대의 강함을 느끼고,  두려워하도록

변해버린 크라다겜, 자신의 마음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파일팽에서부터온몸으로 전해져오는  강력한 진동을 느낄  때, 그리고

그 격렬한 진동의 통증에 자신의 두 팔이 쩌릿하며 저리는 것을 느낄 때

마다, 크라다겜은 점점 엄습해오는 두려움도 함께 느껴야만 했다.

자신의 실력을 전부 발휘한다면 결코 이렇게 무력하게 밀리기만 할  상

대는 아니었다. 만약 예전처럼 전투에 그  어떤 공포나 두려움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오히려 크라다렛은 크라다겜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

고 바로 그것, 잃어버린 데스나이트의 투쟁심과 무감각함이 지금 크라다

겜이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뭐야! 약해, 약하잖아! 네가 정말 데스워리어  마스터인 나 크라다렛조

차도 일순간 공포를 느끼게 했던 바로 그 데스나이트 마스터인 크라다겜

이란 말이야?"

"............."

"이거, 실망이군. 유감이야...... 이런 전투는 재미없지.  정말 유감이지만,

난 재미없는 전투를 더 이상 하고싶지 않아. 이쯤에서 끝내주지."

"................."

"크크크...... 인간덕분에... 최강의 마족의 검사가 타락해 버렸군......."

크라다렛은 점점 검을  휘두르는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막강한 위력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이, 그의 거대한

검에 튕겨 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라다겜은 자신의 밀폐된 갑옷과 투구사이로 차가운 땀이 흘러

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흘리는, 두려움의  식은

땀이었다.

"카... 카름? 카름?..... 이, 이럴 수가...."

킬츠는 거의 반쯤 넋이 나간 눈빛으로 저 멀리에서 조용히 다가오는 카

름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히 자신의 손으로  잘렸던 그녀의 목을 확

인했었던 킬츠였지만, 갑자기 흥분돼오는감정의  기폭이 그의 판단력을

심하게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정말이지? 정말 카름이지? 살아있었다니, 아니,  그럴 수도 있을 꺼야.

이 곳은 원래 이상한 곳이니까... 그렇지? 그런 거지? 살아난 거지?"

킬츠의 발쯤 벌어진 입가에 기쁨의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에

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했던 착하고  가련했던

카름이라는 이름의 소녀. 이미  그녀는 킬츠의 마음에  커다란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루디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동도중  쉬어갔던 어느 언덕

에서 루디 자신이 직접 묻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머리' 뿐이었기는

하지만.

"잠깐.... 기다려, 킬츠, 잠깐만!"

상식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 루디는  무방비상

태로 걸어 가고있는 킬츠를 다급히 불렀다.  혹시 심장이 멎었거나 뇌가

죽어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사람이 기적적으로  되살아날 수는 있었다.

루디도 직접 그런 광경을 본적이 있었다. 매직길드에서 수련도중 실수로

쇼크를 먹어 심장이 멎었던 수련 생이 있었는데 재빨리 담당 마법사  선

생이 달려와 약한 충격마법으로 수련 생의 심장에 충격을 가했더니 잠시

후 수련 생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목이 잘린 인간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

각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로 '좀비'. 바로 죽은 자를  마계

의 어둠의 마법으로 되살려낸 것을 말하는데,  지금의 카름의 모습은 말

로 듣던 좀비처럼 신체가 부패되어 있지  않았다. 조금 얼굴이 창백하긴

하지만 완전히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고  루디는 머릿속으로 궁리를 시

작했다. 킬츠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루디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대체

저 카름의 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지금 아무 것도 귀에 들리지

않고 있는 킬츠를 강제로 세워야 할 것인가. 혹시, 정말로 특별한 이유로

인해 카름이 살아 돌아온 것일까........

갑자기 그 순간 카름은  눈을 뜨고 자신의 정면을  바라보았다. 섬뜩할

정도로 생기 없으며 희미한 어둠의 사이로  빛나는 푸른빛의 눈동자. 그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이한 눈동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킬츠를 바라보고 있

지는 않았다. 루디도 갑자기 눈을 뜬 그녀를 보고 한번 더 경악했다.  그

리고 킬츠도 그제야 제정신이 드는지 흠칫하고 걸음을 멈춘 체 주춤거리

며 몇 발짝 뒤로 걸음을 옮겼다.

"색이 보인다.... 색이..... 세상이 보인다..... 저주스러운 세상..... 파괴하겠

어...."

카름은 눈을 뜨고 곧 이어 소리 없이 입을 열어 높은 톤의 음산한 목소

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억양과 톤이  다르긴 했지만 분명히,

살아있을 적의 카름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저주스러운 세상... 파괴하겠어.... 저주스러운 생명.... 파괴하겠어!"

그러자 그녀의 주위에서 결계안보다 더욱 어두운 암흑의 덩어리가 뭉쳐

져 갔다. 그리고 그것들은 곧 지름 20세션 이상의  수십 개의 공 모양이

되어 킬츠와 루디에게로 날아왔다. 날아오는 소리는 없었지만 기세는 지

금까지의 그 무엇보다도 사악했다.

"어, 어둠계열의 마법! 두 개의 화염과  두 개의 바람, 역으로! 나의 주

위를 감싸들어라! 실드 오브 윈드 화이어!(shield of windfire) "

루디는 재빨리 원소 마법을 전개하여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10여 개의

암흑의 구체를 막아내었다. 그 시커먼구체는  루디의 전개한 실드와 맞

부딪치자 역시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마지막 구체가 사라져

버릴 때, 루디의 실드 역시 같이 소멸해 버렸다.

그러나 거리가 가까웠던 킬츠는 사정이 달랐다.  자신에게로 곧바로 날

아오는 20여 개의 어둠의 구체들을 포착하자마자 재빨리 몸을 날려 옆으

로 굴렀으나 이미 대 여섯 개의  덩어리가 킬츠의 몸에 닿아 있는  후였

다. 그리고 곧 킬츠의 몸에서 강렬한 폭음과 함께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

다.

"으악!"

킬츠는 비명과 함께 폭발의 반동으로  원래 자신이 몸을 던진  방향과는

다른 곳으로 튕겨 져 날아가 버렸다. 전신에 폭발로  인해 생긴 크고 작

은 상처들에서 대량의 붉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크으윽........"

킬츠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잠깐의 즐거

웠던 상상도, 환상도 전부 사라져 버렸다. 오직 잔인한 현실만이  남아있

을 뿐.

그때 루디가 양손을 치켜올리며 카름을 향해  마법을 사용했다. 간단한

바람의 마법이었는데 그것은 빠른 속도로 카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

다. 그러자 카름의 얼굴에 가느다란 상처가 나며 얇게 피가  흘러내렸다.

어두워서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인간의 붉은 피였다.

"생명체에 닿으면 폭발하는 어둠의 구체..... 이제야  알았어......... 누군가

가 금주법으로 죽은 카름의 육체를 살려내 버린 거야."

"뭐! 그럼 진짜 카름이라는 거야!"

루디의 말에 킬츠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진짜 정상적

인 카름이 갑자기 보지도 듣지도 못한 어둠의 마법을 사용해 그들을  공

격할 리는 없었다.

"단지 육체뿐..... 영혼이 없는 껍데기 육체일 뿐이야. 오직  영혼이 있는

생명을, 그리고 그 생명이 살고있는  세상을 증오할 뿐이지... 바로  바로

성의전쟁 이전부터  매직길드에서 금지해  버린 전설의  금주법, 타나스

텔.....(tanastel)"

루디의 말에 킬츠는 부들거리며 떨려오는 자신의  몸을 느껴야만 했다.

저것은 분명히 살아있는 카름의  몸이었다. 아무리 이성과  영혼이 없고

자신들을 공격하지만, 분명한 카름의 몸이었다. 킬츠의 눈은 순식간에 핏

발이 가득 차버렸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킬츠가 소리를 질렀을 때,  다시 카름은 어둠의 구체를  만들어 그들을

향해 쏘았다. 이번엔 전보다 더욱 강하고 많은 수의 구체들이 킬츠와 루

디를 향해 여전히 소리 없이 날아왔다.

루디는 다시 한번 '실드 오브 윈드 화이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향해  날

아오는 구체들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전보다 더욱 많은 숫자였기 때문에

결국 전부를 막아내지 못하고 폭발에 휩쓸려 버렸다.

그러나 킬츠는 재빨리 카름을 향해 달려가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구

체들을 피해냈다. 꽉 다문 입 사이로 약간의 피가 새어나왔다. 킬츠는 속

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용서하지 않겠어!'

몇 개의 어둠의 구체가 킬츠의 몸에 닿아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킬

츠는 이를 악물고 견디며 달리는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신음소리조

차 내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카름의 바로 앞까지 육박해왔다.

"용서하지 않겠어!"

킬츠는 분노와 고통, 절망과 괴로움이 합쳐진  최악의 마음으로 크라다

겜이 그에게 준 데스 나이트의 검을 휘둘렀다. 검은 정확히 카름의 가슴

을 갈랐고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광기에 찬 힘없는

푸른 눈을 감으며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킬츠는 헉헉거리며 눈을 감았다. 인간을 벤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의 소중한 사람

의 몸이었다. 비록 영혼이 없는 비어버린 몸이었지만, 킬츠의 마음은  그

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죽겠군..... 넌 이런걸 맞고도 끄덕 없는 거냐...."

루디가 잔득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킬츠에게 다가왔다. 킬츠

는 다시 눈을 떴지만 말은  없었다. 그러자 루디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마법을 사용했다.

"휴우........ 두 개의 화염. 목표를 불태워라. 화이어 벌릿(fire bullet)"

곧 쓰러져서 숨을 거둔 카름의 몸에서 진홍빛의 화려한 불길이  일어나

그녀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디는 킬츠에게 몸을 기대어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이제..... 카름의 몸을 가지고 누가 장난을 치지 않겠지....."

킬츠는 정신을 잃은 루디의 몸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불타는  카름에게

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말없이 정면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마음 것 소리쳐 비명을  지르고 싶었고 크게 소

리내어 울고싶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슬픈 적은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드라킬스의 보병에게 창에 찔려 돌아가셨을 때도, 3년 전 카름이 목숨을

잃었을 때도, 이 정도로  슬프지는 않았다. 분노와  절망, 고통과 회한이

뒤섞인 끔직한 슬픔. 그러나 킬츠는 소리치지도, 울지도 않았다.

진정 울기 위해서, 진정 소리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진정한 슬픔의  원흉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카름을 위해서라도, 모두 죽어버렸을 언덕마을의 사람들을  위

해서라도 이 저주스런 결계 안을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그것만이 지금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킬츠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견뎌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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